Posted
Filed under 사진



‘미련’은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깨끗이 떨쳐버리지 못 한 채 여전히 과거에 붙들려있는 마음을 가리키는 단어이자, 더 이상 어찌 해 볼 수 없는 일에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꼬집는 말이다.

그러나 또한 미련이란 차마 끊어버리지 못 해 연연(戀戀)하는 그 어리석음에조차 달콤한 향기를 배게 하는 낭만적인 단어이기도 하다.

미련, 그것은 종종 새벽이라 오인 되는 황혼과도 같아서, 마음의 저편에 드리운 주홍빛이 부질없는 집착인지 혹은 인생의 목적인지 알지 못 한다. 그것은 어제에 갇혀버린 삶의 잔광(殘光)일까? 내일을 향한 삶의 신광(晨光)일까?

절절이 애태우며, 갈구하며, 바라고 바라고 바라며, 빛을 향해 걸어갔다.

2009/08/24 04:19 2009/08/24 04:19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백년 같은 하루, 그리고 영원(永遠)이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

지치고, 피곤하다.

2009/08/22 04:49 2009/08/22 04:49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저녁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운 날이었다. 며칠 동안 하늘을 뒤덮었던 비구름은 서서히 동쪽으로 물러가고 서쪽 하늘로부터 온화한 저녁 햇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대기의 수분에 산란된 때문일까, 석양은 여느 때보다 한결 부드러운 주황색이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짧은 길, 내리는 이슬비에 차 유리창 위로 물방울이 맺혔다. 촉촉이 젖은 아스팔트 도로는 하늘의 빛에 물들어 있었다. 한적한 시골길. 모든 것이 넉넉하고 푸근해 보였다.

2009/08/13 04:12 2009/08/13 04:12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캠프에 대해서도 몇 자 적어두는 것이 좋겠지. 사실 캠프 다녀 온 뒤로 컨디션이 영 엉망이다. 날씨도 한 몫 하는 것 같지만.

운전은 문제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려운 거야 시내 운전이지, 내쳐 달리기만 하면 되는 고속도로 운전은 어려울 게 없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내려서 좀 긴장하긴 했지만.

캠프는 시종 가식적인 상황에서 서로 서툰 연기를 하다가 막판에 기만적인 감동을 부르짖으며 끝났다. 인간적인 약점들에는 관용적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것은 나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남들을 붙잡고 내 관심사를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짓은 하지 않는다. 가령 ‘그러고 보니 요즘 든 생각인데, 우리가 보통 서양 중세 시대 때 봉건 영주들의 자치권을 인정받는 영토를 일컫는 단어인 장원(莊園)은, 사실 8세기 초 일본에서 생겨난 지방 호족이나 낙향 귀족들의 광대한 사유지를 지칭하는 단어였잖습니까? 여기서 오는 개념상의 혼동…….’이라는 식의 대화를 시작한다면, 이건 상대방을 질식시키겠다는 도발이나 다름없다. 결국 그것은 폭력 아닌가?

반대로 나는 동아리 내의 누가 누구와 사귀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고, 여성 품평이나 타인의 뒤 담화 같은 것에도 흥미가 없다. 개인의 연애사 같은 것을 구구절절 듣고 있느니 차라리 마다가스카르 풍조(風鳥)의 짝짓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 낫다.

내가 남들과 어떤 공통의 화젯거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데에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게으르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이집트가 동유럽 국가인 줄 알거나 고흐를 ‘절규’의 화가로 아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서 나는 정말 무슨 대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TV 예능 프로에서 한 패널이 자작시를 낭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내 옆에서 한 명이 참 잘 썼다고 감탄한다. 그 시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그대로 가져와 단어만 몇 개 바꾼 이른바 ‘패러디 시’였다. 이런 인간도 지난 학기 경제학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았다며, 자신은 미래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고 말한다.

간혹 내가 의미 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에 책이라도 한 줄 읽으려 하면 별종이라는 듯이 바라본다. 내 쪽에서 보자면, 냄비에다가 아무 거리낌 없이 맥주와 소주와 탄산음료를 뒤섞어서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이 훨씬 기이하다.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종국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뻔히 보인다. 비좁은 자리에서 몸을 잔뜩 움츠리면서도 이따금 맞닿은 살결에서 전해지는 체온을 느끼고 싶어 한다. 더 넓은 면적을 통해 더 높은 체온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어떤 친밀감을 구축해야 할까? 그러나 서로의 얼굴을 벌겋게 달구어놓는 술자리는 하룻밤의 판타지이다. 다음 날 아침이면 김빠진 맥주처럼 밍밍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고작 서로의 컵에 땅콩을 집어 던지며 연거푸 술잔을 비우는 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사교(社交)의 기술이라니!

이런 상황에 대해 새삼스럽게 화를 내는 것은 아니다. 다소 한심스럽기는 하지만, 이런 방식도 용인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면 그러려니 하겠다. 생애 대부분을 타인에 대한 절대적인 무관심으로 일관해 온 내가 사람들의 소통 방식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도 겸허히 받아들인다. 내게 무슨 비판의 자격이 있겠는가? 단지 어울리지 않는 곳에 오래 있다 보니 지치고 짜증이 났던 것이다.

사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다 바쳐도 전혀 응답을 해 주지 않는 저 악기(樂器)의 무서운 침묵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하고 있다. 사람들의 헛소리보다도 내 악기의 거친 소리가 훨씬 더 가슴을 깊이 후벼 판다. 멍청한 것으로 치자면 몇 년째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내 둔한 손가락만한 것이 또 있을까. 평범한 사람이 한 가지 일에 언제까지 한결 같은 정열을 쏟아 부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회의와 의혹이 정신을 좀먹는다.

2009/08/11 04:29 2009/08/11 04:29
Posted
Filed under 음악/오페라

기사(騎士)이자 가수인 탄호이저는 천성이 오만하며 절제보다는 탐락을 미덕으로 여기는 자다. 용모가 수려하고 노래 솜씨가 뛰어나서 그를 흠모하는 아가씨들이 많았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이 방자한 청년에게 걱정스런 시선과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탄호이저 역시 순수니 절제니 신앙이니 하는 고리타분한 가치들을 전통의 미덕이라며 고수하고 있는 이 촌구석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는 진심으로 이 따분한 마을은 자신이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여겼다.

결국 탄호이저는 길을 떠났다. 관능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열정에 있는 그대로 도취되기 위해, 이윽고 환희의 마력에 휩싸여 영원한 쾌락을 누리기 위해. 그리하여 그가 도착한 곳은 베누스베르크, 즉 ‘비너스의 도시’였다. 술에 취한 사티로스와 목양신들이 바쿠스 신의 여사제들을 거느리고 흥청망청 향락을 벌이는 무릉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보다 더 매력적이며, 꿀보다도 더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 비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잘생기고 누구보다도 노래 솜씨가 뛰어나며 관능에의 욕망으로 충만한 이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탄호이저는 비너스의 마음을 사, 그녀가 지배하는 쾌락의 정원에서 신과도 같은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탄호이저가 하프를 타며 노래를 시작하면 어느 새 비너스는 그의 등 뒤로 다가와 흰 팔로 탄호이저의 늠름한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부드러운 가슴을 등 뒤에 맞대며 귓가에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탄호이저는 정념이 솟구치고 피가 끓어오르며 하프를 타던 손을 멈추고 열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비너스는 이 세상의 모든 미를 합한 것보다도 아름다웠고, 이 세상 모든 사랑의 기교를 몸소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일찍이 꿈꿨던 모든 것이 이루어진 비너스의 도시에서, 그러나 탄호이저는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늘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요정들은 탄호이저의 노래 소리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비너스의 빛나는 얼굴도 더 이상 고향 마을 처자들의 소박한 용모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관능에의 진한 욕구가 식자, 침대 위에서의 향락도 더 이상 그를 사로잡지 못 했다. 그러자 탄호이저에게는 갑자기 비너스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솟구쳤다. 마치 자신이 비너스의 포로가 되어, 잘못된 향락의 길로 빠진 피해자처럼 생각되었다. 가슴 한편에서 새로운 삶, 무절제와 탐락을 벗어던지고 보다 의식이 있고 신사적인 삶에 대한 열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탄호이저의 눈은 새로운 의지로 반짝이는 듯했다.

떠날 때가 되었다. 탄호이저는 비너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자 비너스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탄호이저를 저주했다. “배신자! 당신을 붙잡지는 않겠어. 그러나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곧 당신의 파멸이 될 거야. 결코 평화를 찾지 못 할 사람. 결코 용서를 얻지 못 할 그대. 그러나 치유를 원한다면, 그때는 내 품에 돌아오게 되겠지.” 그러자 탄호이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나는 당신에게서 평화와 안식을 찾지는 않을 거요. 나의 구원은 성모 마리아에게 있으니까!”

베누스베르크에서 빠져나오자,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같았다.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새들의 지저귐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축복하는 소리로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자못 신사적인 태도로 말을 몰았다.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내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 삶을 살리라. 참된 사랑을 찾고, 참된 신앙을 가지리라!

이윽고 탄호이저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탄호이저의 마음 한 구석은 무거워졌다. 한때 그토록 거만하게 굴었던 나를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들을 경멸하고 오만한 태도로 마을을 떠났는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가다니! 마을 근처에 이르자 몇몇 사람들이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과거에 오만방자했던 탄호이저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그러나 탄호이저가 신사적이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인사를 하자, 마을 사람들은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그들은 탄호이저가 오랜 시간 넓은 세계를 여행하며 드디어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재능 있는 젊은이가 성숙해서 돌아온 것을 크게 반겼다. 탄호이저는 마음 한 구석에서 죄책감을 느꼈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에 이내 그 죄책감을 벗어버렸다. 그는 정말 자신이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성숙한 인간,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 지난날 탄호이저에게 그토록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던 그녀가 아직도 그를 못 잊고 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는 바르트부르크의 노래의 전당에서 오래전에 떠나간 탄호이저를 아직도 그리워하며 회상에 잠겨있었다. 볼프람의 안내를 받고 노래의 전당으로 간 탄호이저는 엘리자베트와 재회하고, 그녀에게로 자신을 이끈 기적을 찬양하며 이 조신한 아가씨의 마음을 다시 휘어잡기 위해 달콤한 말들을 쏟아냈다.

바르트부르크의 영주는 탄호이저의 귀환 소식을 듣고 그를 환대하는 의미에서 노래 경연 대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경연 대회를 통해 탄호이저가 그동안 어떤 경험을 했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탄호이저는 흔쾌히 경연 대회의 참가를 수락했다.

이윽고 노래 경연 대회가 시작되었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가 노래의 주제로 던져지자, 이 정숙한 도시 바르트부르크의 사람들은 저마다 진실 되고 고귀하며, 정신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자코 듣고 있던 탄호이저는 점점 이 순진한 사람들의 생각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사랑의 본질이라고? 이 자리에서 나보다 그것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누가 뭐래도 나는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의 사랑의 독차지하였던 사람이다! 정신과 영혼의 사랑?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맑은 샘? 그 정절을 지키는 지순함? 내가 이 사람들에게 진짜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어야겠다!

“샘이 있다면, 나 불타는 갈증을 식히기 위해 그 샘으로 기꺼이 입술을 축이리. 샘이 마르지 않는 것은 마치 나의 갈망이 꺼질 줄 모르는 듯, 영원히 내 그리움이 불타도록 영원히 나 그 샘에서 활기를 찾겠소.”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탄호이저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는 믿음에 균열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래도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는 셈 치고, 진실함의 미덕을 가르치는 노래로 탄호이저에게 교훈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탄호이저는 이를 비웃으며 외쳤다. “우리의 육신에는 즐거운 향락이 어울려! 그리고 사랑은 그 향락 속에만 있지!”

그러자 귀부인들은 탄호이저의 음탕한 생각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다 이내 황급히 자리를 피했고, 마을의 신심 깊은 기사들은 격분하여 탄호이저를 추방하려고 들었다. 그때서야 탄호이저는 자기가 그만 자제심을 잃고 어떤 위험을 초래하였는지를 깨닫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기사들의 거친 포승이 그의 몸을 휘감으려는 순간, 그 앞으로 한 여인이 몸을 내던졌다. 영주의 조카인 엘리자베트였다. 엘리자베트는 기사들 앞에 무릎 꿇고서 눈물로 호소했다. “나의 소원은 이 분의 구원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감히 이 사람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엘리자베트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탄호이저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고통스런 참회의 길을 떠나는 마지막 기회를 부여 해 달라고 탄원했다.

엘리자베트의 헌신에 탄호이저는 죄책감을 느꼈다. 결국 자신이 돌아와서는 안 될 곳에 돌아왔음을 깨달았고, 변했다고 믿은 자신이 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삶의 의지로 믿었던 열정은 결국 향락에 대한 권태로움의 반대급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떠나겠소, 순례자들과 함께. 천사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로마로!” 탄호이저는 순례자들의 무리와 함께 로마로 향하는 고통스런 순례길에 올랐다.

그 뒤로 또 긴 시간이 흘렀다. 구원을 위해서라지만 탄호이저를 고생스러운 순례길에 보낸 엘리자베트는 날마다 고통스러워하며 예배당에서 탄호이저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이교의 신인 비너스와 향락에 빠져 젊음을 낭비하고, 신앙으로부터 등을 돌린 탄호이저가 구원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나날이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이 야위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던 순례자들의 무리가 바르트부르크로 돌아왔다. 엘리자베트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뛰어나가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았지만, 그 안에서 탄호이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절망했다.

엘리자베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성모 마리아에게 이제 그만 자신을 거두어 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볼프람이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그녀의 집으로 데려다 주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볼프람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홀로 바위산을 향해 걸어간다.

볼프람은 엘리자베트에게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음을 알지만,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홀로 고개를 떨어뜨린다. 볼프람은 저녁별에게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엘리자베트를 결코 잊지 못 하는 자신의 인사를 저녁별이 대신 전해주기를. 이제 가냘프게 흔들리는 그녀의 생명이 꺼지고 나면,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한편 탄호이저는 순례자들의 무리와 함께 고생고생하며 겨우 로마에 당도했다.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전해 받고 지상에서 그 권세를 대신 행사하는, 지상 교회의 수장 교황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교황은 베누스베르크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 향락에 물든 생활을 하며 신을 져버린 탄호이저는 낡은 지팡이에 새싹이 돋지 않는 한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이라며 저주를 내렸다. 탄호이저는 절망에 빠진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다른 순례자들과 떨어져 홀로 괴로움을 곱씹었다. 이제 그에게 돌아갈 곳은 베누스베르크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어느 밤, 베누스베르크를 향해 가다가 고향 마을 인근을 지나게 된 탄호이저는 한 남자의 노래 소리에 이끌려 다가간다. 그는 볼프람이었다. 볼프람은 탄호이저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 했다. 탄호이저는 다 헤진 옷을 걸치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한데다가 몹시 야위어 있었다. 그 옛날 자신감과 생기가 넘치던 아름다운 청년의 면면은 사라져버리고, 겨우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겹게 서 있는 초라한 사나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탄호이저는 볼프람에게 베누스베르크로 가는 길을 묻는다. 어느 때고 치유가 필요해지면 결국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비너스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탄호이저는 스스로를 향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탄호이저의 체념을 눈치 챈 비너스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탄호이저는 모든 구원의 희망을 버리고 비너스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비너스는 이제야 말로 탄호이저의 영혼을 취해 영원히 자기 곁에 두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탄호이저의 낯빛은 이미 시체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지옥의 쾌락에…….” 탄호이저는 절규했다. 이때 볼프람이 그를 막아섰다. “전능하신 주여! 당신의 종을 구하소서!” 비너스는 거듭 탄호이저를 재촉했다. “비켜나시오, 내게서 멀리 떨어지시오!” 탄호이저는 볼프람을 향해 위협적으로 말했다. “한 단어가…….” 볼프람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을 구할 것이요.” “아니, 나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소. 비키시오, 볼프람!” “어서 내게로 와요, 탄호이저, 당신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 비너스가 팔을 벌려 탄호이저를 맞이하려 했다. “탄호이저, 한 천사가 당신을 위해 희생했소.” 볼프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천사가 곧 당신 위에 나타나 축복할 거요.” 그러나 탄호이저는 거의 비너스 품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윽고 볼프람이 외쳤다. “엘리자베트요!” 볼프람의 눈에서도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탄호이저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엘리자베트…….” 그때였다. 마을에서 장례 행렬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애통함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비너스는 절규하며 사라졌다. 볼프람이 잠시 행렬을 멈추게 하고 탄호이저를 관 가까이에 데려갔다. 새벽의 어스름한 빛 속에, 그러나 새벽별처럼 평화로운 모습으로 엘리자베트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 탄호이저는 쓰러졌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동녘에서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온화한 빛이 한 순례자의 낡은 지팡이를 비추었을 때, 그 위에 돋아난 푸른 새싹에 맺힌 이슬이 반짝였다.

이상이 바그너의 음악극 ‘탄호이저’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바그너는 이 곡을 1843년 테플리체에서 작곡하기 시작하여 1845년에 완성한다. 대본은 하인리히 하이네, 호프만 등의 작품과 독일 전승들을 참고, 짜깁기하여 직접 썼는데 역시 내용은 좀 엉성한 편이다. 갈등 구조가 뜬금없고 해결이 갑작스럽다.

성(聖)과 속(俗)의 대립 구도, 그리고 타락과 회개의 이야기 구조는 서양 예술에서 줄기차게 반복되어 온 하나의 패턴이다. 비너스는 속된 사랑을, 엘리자베트는 성스러운 사랑을 상징하며, 타락한 삶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상승의 이야기 구조는 본 오페라의 주인공인 탄호이저의 삶 속에 매우 ‘극적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뻔한 얘기는 그만 하자. 바그너의 음악극 속 주인공은 탄호이저이지만, 내 이야기 속 주인공은 탄호이저가 아니다. 재능이 넘치고 끝까지 방종하여 정신 못 차리다가 여인의 희생으로 구원 받는 행운의 사나이는, 이 블로그에서 주인공으로 거론될 자격이 없다. 21세기에도 ‘왜 여자들은 나쁜 남자에게 끌리나’ 같은 주제가 여전히 술자리 이야깃거리로 거론되고, 이를 다룬 심리학 서적이나 심지어 거지같은 소설도 줄기차게 출판되는 판에, ‘엘리자베트’를 주인공으로 꼽을 이유도 없다.

오히려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면 엘리자베트를 초월하는 진상 중의 진상, 그러나 정작 사람들로부터 주목도 제대로 못 받아 존재감마저 미미한 미련퉁이 남자, ‘볼프람 폰 에셴바흐’야 말로 이 블로그에서는 주인공으로 대접 받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자 그럼 위의 줄거리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이 한심남의 스토리를 좀 자세히 들여다보자. 알고 보면 볼프람, 이 남자도 노래에 소질이 좀 있다. 탄호이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노래 경연 대회에서 첫 타자로 노래를 뽑아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을 정도다. 그런데 성품이 지나치게 올곧다. 여인들을 보고 반할 수는 있지만, 차마 그들의 순수를 조금이라도 흐트러뜨리는 짓은 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탄호이저처럼 갈증이 나면 샘물을 들이키기는커녕, 이래서야 샘물을 퍼서 가져다준대도 입을 못 댈 사람이다.

볼프람은 엘리자베트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었다. 탄호이저의 노래에 푹 빠져있던 엘리자베트가, 탄호이저가 떠나가 버린 뒤 상심에 잠겨있는데도 볼프람은 그 주위를 맴돌며 애만 태울 뿐 엘리자베트를 어찌 해보지 못 한다. 남의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어진 선을 과감하게 넘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볼프람에게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어느 날 탄호이저가 돌아온다. 지난날 탄호이저의 거만한 태도를 기억하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계심을 품을 때, 가장 먼저 탄호이저의 개심을 믿고 그를 환영한 사람이 다름 아닌 볼프람이었다. 그것은 볼프람이 탄호이저의 본심을 꿰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볼프람이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엘리자베트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이었으니까!

볼프람은 앞장서서 탄호이저를 엘리자베트에게로 데려간다. 이 장면에서 볼프람은, 배경이 되는 벽면에 서서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윽고 두 사람이 감격의 재회를 하자, 자신에게는 희망의 빛이 사라졌다며 절망한다. 이런 미련퉁이! 이런 답답한 인간!

‘그녀만 행복하다면…….’은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만큼이나 역사가 깊고 해명이 불가능한 멍텅구리 순진남들의 심리다. 결국 볼프람, 너는 엘리자베트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어!

그러나 볼프람은, 평범한 순정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상을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는다. 탄호이저가 순례지에서 돌아오지 않자 절망에 빠진 엘리자베트가 죽어가며 자신의 희생으로 탄호이저의 죄를 대속(代贖)하기를 비는 모습을 보고서, 한편에서 볼프람은 그녀의 가련한 숙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바위산으로 홀로 올라가는 엘리자베트를 차마 붙잡지도 못 하고 그녀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떠오른 저녁별을 붙잡고 하소연한다.

이 하소연이 저 유명한 아리아 ‘저녁별의 노래’가 되었다. 엘리자베트가 사랑한 사람은 탄호이저였다. 엘리자베트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도 탄호이저, 그리고 엘리자베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사람도 역시 탄호이저였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를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볼프람이다. 물론 이야기 속의 인물이니까 그랬겠지만, 볼프람은 자신이 결코 탄호이저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볼프람은 자신의 역할을 엘리자베트의 조력자로 한정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다른 남자를 위해 희생하기로 한 결심까지 받아들이고, 그 숙명을 완수하는 것을 돕는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서도 그 미운 탄호이저가 비너스의 품으로 안기려 드는 것을 전력을 다해 막는다. 현대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 장면이 다루어졌다면 이때 볼프람은 탄호이저의 뺨을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긴 뒤, 땅 위에 엎어진 탄호이저를 깔고 앉아 멱살을 잡고 외쳤을 것이다. “정신 차려! 너 때문에 엘리자베트는 죽었단 말이야. 나의 엘리자베트가…….” 눈물이 뚝뚝.

오페라 계의 진정한 루저(looser) 볼프람. 종종 여인네들은 너무 쉽게 ‘나도 이런 사랑 한 번 받아 봤으면’하고 말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오페라 안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당하기만 하는 이 슬픈 사랑의 숙명은 도저히 구제 받을 길이 없다!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영원한 시간을 두고 맴도는 것처럼, 조금만 멀어져도 가슴에 서리가 내리고 조금만 가까워져도 속까지 시커멓게 태워버리는 이 바보 남자들의 가련함이라니.

오페라 탄호이저의 숱한 명곡들을 뒤로 하고, 이 세상 짝사랑으로 가슴앓이 하는 모든 순정남들을 생각하며 ‘저녁별의 노래’를 띄워본다.


Wie Todesahnung, Damm'rung deckt die Lande,
umhullt das Tal mit schwarzlichem Gewande;
der Seele, die nach jenen Hoh'n verlangt,
vor ihrem Flug durch Nacht und Grausen bangt!
Da scheinest du, o lieblichster der Sterne,
dein sanftes Licht entsendest du der Ferne
die nacht'ge Damm'rung teilt dein lieber Strahl,
und Freundlich zeigst du den Weg aus dem Tal.

O du mein holder Abendstern,
wohl grußt' ich immer dich so gern;
vom Herzen, das sie nie verriet,
gruße sie wenn sie vorbei dir zieht,
wenn sie entschwebt dem Tal der Erden,
ein sel'ger Engel dort zu werden.

죽음의 예감처럼 어둠은 땅에 내려
검은 옷자락으로 골짜기를 덮네
저 높은 곳을 희구하는 영혼도
어둠과 공포를 향한 비행이 두렵다
그때 네가 나타나는구나, 아 사랑스런 별
부드러운 빛이 멀리서부터 다가와
그 사랑스런 빛이 어둠을 꿰둟고
계곡의 길을 은은히 밝힌다

아, 나의 다정한 저녁별,
너에게 나 언제나 기쁘게 인사한다
나의 그녀가 너의 곁을 지나갈 때에
그녀를 끝까지 따르는 나의 인사를 전해다오
천국의 천사가 되기 위하여
그녀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천국의 천사가 되기 위하여
그녀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2009/08/10 03:17 2009/08/10 03:17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5박 6일 동안 오케스트라 캠프 다녀온다. 캠프 장소까지는 직접 운전해서 갈 생각이다. 그런데 내가 아직 자동차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 집에 차가 무려 세 대라 어느 차에 보험을 들어야 할지 망설이다가……. 월요일에 가입 신청하면 화요일부터 보험 적용을 받는다는데, 가는 길 스릴 넘치겠는걸? 게다가 차는 아빠 차. 즉 수동이다.

운전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거리는 남자들이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면허 취득 후에도 가능한 운전대 잡는 걸 피해왔다. 자취방을 빼고 학교 가기 위해 매일 운전을 하게 된 뒤로도 ‘도로 및 주차 사정’을 핑계로 늘 차는 버스 정류장 근처 주차장에 놓고 버스를 이용했다.

물론 나의 미숙한 운전 실력이 우선 걱정거리이긴 하지만, 사실 그보다도 난 수많은 운전자들의 합리성을 믿지 못 하겠다. 내가 이성적으로 조심조심 운전하면 뭐하나, 어떤 또라이가 달려와 받으면 끝인데. 집 앞 속도 제한이 80km인 도로에서도 신호 위반하고 거의 150km로 달리는 미친놈들을 보고 있노라면, 남들도 나와 같을 것이라고 믿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태도인지 절실히 깨닫는다. 그러니까 운전이 피곤하다고…….

하지만 내일은 집에서 차타고 가면 금방인 콘도 가는데 굳이 학교까지 가서 또 한국 단체 활동 특유의 시간 딜레이까지 감내해 가면서 먼 길 돌아서 가기가 싫다 이거다. 사람들이랑 가능하면 부대끼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대략적인 캠프 일정

아침식사
아침연습
점심식사
점심연습
저녁식사
저녁연습
밤 행사, 술, 술, 술…….
아침식사
.
.
.

지난 번 캠프 때는 무료하고 비생산적으로 흘러가버리는 시간에 스트라빈스키의 전기를 읽었더랬다. 이번엔 뭘 가져가 읽지…….

덧...

2009/08/03 03:28 2009/08/03 03:28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레슨 재개했다. 거의 두 달 만이다. 역시 음정이 많이 흐트러졌다. 활 그립을 바꾸기로 했다. 과도하게 올라가고 경직된 손목, 트레몰로라도 하려하면 거의 경련을 일으키는 팔……. 힘도 들거니와 주속이 느려서 템포 뒤처지기 일쑤. 별 수 없이 선생님과의 오랜 상담 끝에 활 쥐는 법을 교정 받았다.

첫 레슨 선생님이 가르쳐 준 그립은, 활을 매우 얇게 쥐는 것이었다. 사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좀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일본에 가서 그립을 고쳤는데, 검지로 활대를 감듯이 잡아 단단히 고정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거의 활대를 따라 말려있다시피 한 검지를 밖으로 좀 빼서, 활등 위에 얹어 약간 무게를 싣는 느낌의 그립.

아무래도 손과 활의 각도가 달라지다보니 자꾸 활이 지판 쪽으로 가려하는 등 보잉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지. 일단 검지로 무게를 실을 수 있게 되니, 스타카토와 스피카토는 훨씬 편해진 것 같다. 손목을 이용하는 트레몰로는 아직 감이 잘 안 온다. 지금은 바뀐 그립으로 활을 빨리 쓰면 점점 활의 위치가 바깥으로 밀려나는 둥 갈피를 못 잡기 때문에…….

바이올린 4년 배우면 어디 가서 바이올린 좀 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 음악적 재능은 재앙의 수준. 그럼에도 이렇게 음악을 좋아하게 된 운명은 무슨 저주가 내린 건가. 뭐 좋다. 일단 6년 더 배우고 보자.

2009/08/01 04:41 2009/08/01 04:41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오랜만에 고교 동창 김선민 군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엄마의 미니를 몰고 서현까지 갔다. 사실 이곳으로 차를 몰고 가는 것은 정신 건강에 해로운데, 어차피 집에서 나가려면 차는 필수라. 그리고 평일 낮이라 그런지 그리 복잡하진 않더라. 주차는 프라임 등급 이상의 회원에게 무조건 두 시간 무료 주차의 혜택을 주는 교보문고에. 살다보니 이런 혜택을 누릴 날도 오긴 한다.

선민 군과는 정태풍에서 런치 세트를 시켜 먹었다. 여기 볶음밥이나 면류는 평타 수준이지만, 딤섬 하나는 정말 맛있다. 장교 합격 축하한다며 선민 군이 샀음.

원래 공부 얘기 좀 하자고 본 것 같은데, 엉뚱하게 정치 얘기 하다 헤어졌다. 사실 공부 얘기한다고 해도 내가 별로 해 줄 충고 같은 것은 없고, 스스로 잘 알아서 하겠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것은 개인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이지만, 지나친 고민은 어차피 비생산적이다. 남들처럼 살고 싶다면야 모범 답안은 이미 나와 있다. 그걸 취하기 싫다면, 필요한 것은 허심(虛心), 배짱, 그리고 실천이겠지.

수요일은 아침 10시부터 연습이다. 지금 새벽 4시 반인데, 죽겠군…….

2009/07/29 04:37 2009/07/29 04:37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12시~1시: 개인 연습

1시~3시 반: 파트 연습

4시~8시: 전체 연습

8시~10시: 개인 연습

피곤할 만하군. 그러나 지난 연주회 준비 기간과 비교하면 확실히 태만해졌다. 여행 기간 3주 동안 연습을 쉰 것은 확실히 타격이 크다. 생각해보면 지난 번 연주회 준비 때는 일본 여행 갈 때에도 악기를 들고 갔었지. 물론 미련한 짓이었지만, 그래도 호텔 방에서 약음기 끼고 간단히 손이라도 풀어보곤 했었다.

지난 일본 여행 때였다. 오호츠크 해를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는데, 휴대 전화로 연습하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물론 파트 사람들 전부에게 보낸 단체 문자였지만, IT 기술이 이 세상에 사람 숨을 곳을 사라지게 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 때는 아부심벨 신전 앞에서 연습 안 오냐는 문자를 받기도 했지.

금요일부터 다시 레슨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다음 주부터 오케스트라 합숙훈련이 시작되기 때문에 또 레슨을 거르게 된다. 정말 입대까지 남은 레슨 횟수가 얼마 없다. 비오티 협주곡까지는 해보고 싶었는데, 아델라이데 콘체르토 복습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

2009/07/28 02:32 2009/07/28 02:32
Posted
Filed under 서재

초등학생 시절, 게임 데이터를 에디트하기 위해 ‘울트라 에디터’라는 프로그램으로 세이브 파일을 열어젖혔을 때, 난생 처음 세상에 ‘16진법’이라는 기수법 체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까지 나는 10진법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나머지, 십진법 자체를 수의 체계로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수를 표기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물론 수의 개념도 제대로 몰랐던 아주 어렸을 적, 종이 위에 어떤 수의 크기만큼 일일이 사물을 하나씩 그려 넣었던 것이 인류 최초의 기수법인 ‘1진법’ 표기였다는 것은 당연히 알 지 못 했고 말이다.

16진법의 존재는 내게 하나의 충격이자 공포였다. 나는 현재 전 세계의 인류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10진법 체계가, ‘수(數)’라고 하는 개념에 내재된 자연스러운 속성이어서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원리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설령 우주 저 멀리에 인류와 전혀 다른 외계 문명이 존재하더라도 반드시 10진법 체계는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또 다른 기수법의 존재는 사실상 10진법 체계가 수의 원리에 부합하는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기수법 체계라는 믿음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정녕 10진법은, 인간의 손가락이 10개라는 생태적 특성에서 기인한, 철저한 우연의 산물(물론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역시 필연의 산물이지만)이란 말인가!

1974년 미지의 외계 문명을 향해 발송된 지구인들의 메시지인 아레시보 메시지는 2진수로 작성되었다. 숫자가 우주 공통의 언어임에는 틀림없지만, 기수법 체계는 다를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정말 외계인들의 손가락이 6개이거나 14개라면, 6진법이나 14진법을 사용할까?

참고로 16진법은 16을 밑으로 하여 숫자를 표기하는 기수법을 말한다. 1진법에서는 모든 숫자를 그 수의 크기와 동일한 개수의 어떤 기호로 표시한다. 즉 10진법상 12라는 숫자를 1진법으로 표현하면, 동그라미 열두 개가 된다. 설령 동그라미 대신 ‘0’이나 ‘1’같은 숫자를 쓰더라도, 1진법 상에서는 ‘자릿수’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령 1진법 상의 수 111111을 놓고 보면, 첫째자리 1이나 끝자리 1이나 같은 1이다.

2진법 이상의 기수체계가 되면, 숫자의 위치가 중요해진다. 그래서 이러한 표기법을 ‘위치 기수법’이라고도 한다. 10진법 체계에는 0부터 9까지 총 10개의 기호가 존재하며, 단지 이 10개의 기호로 모든 자연수를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10진법은, 한 자리에 0부터 9까지 표기할 수 있으며 셈이 ‘열’에 이르면, 1의 자리를 비워주고, 대신 10의 자리를 마련하여 숫자를 표기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셈에서 열을 하나의 단위, 혹은 완결로 보는 것이다.

16진법은 16을 밑으로 한다. 이 말은 한 자리에 0부터 15까지 열여섯 개의 숫자 표시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셈이 16에 이르면, 10진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릿수 하나를 늘린다. 단 이때 새로 생긴 자리는 ‘10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16을 위한 자리’다. 따라서 16진법 상에서 ‘10’은, 10진법 상에서 ‘16’을 의미한다.

16진법으로 수를 표기하기 위해서는, 10진법보다 많은 기호가 필요하다. 열다섯까지는 한 자리에 표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16진수를 표기할 때에는, 0부터 9외에 알파벳 A부터 F를 함께 사용한다.

10진법의 수 : 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진법의 수 : 0 1 2 3 4 5 6 7 8 9 A B C D E F

사실 수의 표기는 ‘약속’에 불과하니까, 어떤 기호를 쓰든 무방하다. 이 경우에는 10진법상의 수 1부터 9를 빌려와 표기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 ‘십’이니 ‘십일’이니 혹은 ‘이십 사’니 하는 자연어 표현도 역시 16진수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장애 요인이 된다. 16진수에 완전히 적응하려면 ‘십육’ 혹은 ‘열여섯’ 대신 다른 명칭이 필요할 것이다.

16진수를 10진수로 바꾸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C236이라는 16진수를 10진수로 바꾸려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낮은 자리부터 높은 자리의 수를 표기한다는 약속은 동일하다. 6은 10진법에서와 마찬가지로 ‘1의 자리’의 숫자다. 3은 ‘16의 자리’에 있다. 2는 16의 제곱, C는 16의 세제곱 자리에 표기되어 있다.

C236을 10진법의 수로 변환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과정이 필요하다

C x 16^3 + 2 x 16^2 + 3 x 16^1 + 6 x 16^0

여기서 C는 16진법 체계에서만 존재하는 기호이다. 10진법 수로 변환하는 과정에 있으니까, C를 10진법 상의 수인 ‘12’로 대체하자.

C x 16^3 = 12 x 16^3 = 49152

나머지 숫자를 더해주면 16진수 C236은 10진수 49718이 된다.

숫자를 10진법으로 표기하든 16진법으로 표기하든, 수의 속성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소수’나 ‘완전수’ 같이 특정한 수의 특수한 성격도 그대로 유지되고, ‘우애수’ 같은 수 사이의 관계도 변하지 않는다. 10진법과 16진법은 단지 같은 수를 표기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숫자의 크기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것은 그저 적응의 문제일까? 만일 우리의 손가락이 16개였다면, 16진법을 오늘날 10진법 사용하듯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인류 역사상 10진법이 실제로 사용된 유일한 기수법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수메르인들은 60진법 체계를 고안 해 냈다. 10세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이는 마야 문명은 20진법을 사용했는데, 매우 정밀한 역법을 개발 해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날 일상생활에서도 10진법 외의 기수법이 쓰이고 있다. 바로 60초를 1분, 60분을 1시간으로 규정하고 있는 시간이다. 물론 완전히 10진법 상의 숫자들만을 가지고 표기하기 때문에 다소 헷갈리는 면은 있다. 사람들은 종종 120분을 1시간 20분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시간 계산에서 60진법을 처음 사용한 것은 바빌로니아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중국 문명에서도 60간지를 이용하여 날짜 계산을 한 것은 보면, 이 60진법 체계의 발달에도 어떤 필연성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시간의 표기가 60진법인 까닭에 초등학생 때 따로 시간 계산법을 배워야 할 정도로 시간 계산은 까다로워졌다. 언젠가 일본에서 연예인들이 나와 퀴즈를 푸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몇몇 바보 연예인들은 분을 시간으로 환산하는 간단한 문제를 풀지 못 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이러한 병폐를 고치고 또 사람들을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해 100초를 1분으로, 100분을 1시간으로 하는 새로운 시간 체계를 도입했으나, 이때에는 사람들의 습관이 승리했다.

또 하나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바로 ‘2진법’이다. 사실 2진법은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가 흔히 ‘아날로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디지털’은 본래 어떤 모호한 중간 값을 표기하지 않고 데이터를 단위 별로 끊어서 ‘숫자’로 표현하는 것을 일컫는데, 이 디지털의 기저를 이루는 것이 ‘2진법’이다. 2진법이 유용한 이유는 신호의 ‘있음’과 ‘없음’만으로 모든 수의 표현이 가능해, 이 단순한 수단만으로도 무한한 데이터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기계 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이 2진수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2진법과 16진법의 관계이다. 내가 울트라 에디터로 세이브 데이터를 열어 젖혔을 때 마주한 것은 2진수가 아닌 16진수였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2진수와 16진수 사이의 관계를 알면 의문은 쉽게 풀린다.

자연수 중에서 네 자리로 표기 가능한 2진수를 모두 생각해 보자. 몇 개나 있을까? 0001, 0010, 0011 ... 1110, 1111 등 모두 15개다. 이는 10진법 상의 자연수 1에서 15까지에 해당한다. 10진수 1에서 15라니, 왠지 친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이는 16진수 1부터 F까지로 간단히 나타낼 수 있다. 즉 무려 네 자리로 이루어진 복잡한 2진수를, 16진수로 바꾸어 표현하면 달랑 한 자리 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0001 = 1

0101 = 5

1000 = 8

1110 = E

1111 = F

2진수가 신호의 ‘있음’과 ‘없음’으로 디지털 신호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얘기 했다. 컴퓨터에서 이렇게 ‘있음’ ‘없음’의 단 두 가지를 표현할 수 있는 최소의 단위를 ‘비트bit’라고 한다. 그리고 ‘있음’과 ‘없음’은 간단히 1과 0으로 쓴다.

1과 0 단 두 개의 신호를 표현할 수 있는 1비트를 8개 모은 것이 1바이트byte이다. 따라서 1바이트는 무려 8자리로 된 2진수로 표현된다. 8자리로 된 2진수는 대체 몇 개나 있을까? 이것을 일일이 화면상에다 표시하는 것도 일이다.

하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이런 복잡한 2진수를 16진수로 바꾸어 매우 간결하게 표기할 수 있다. 네 자리로 된 2진수를 모두 표기하는 데, 16진수는 겨우 한 자리를 필요로 했다. 이제 2진수의 자리가 네 자리에서 여덟 자리로 늘어났다. 모든 숫자를 표기하기 위해서는 몇 자리의 16진수가 필요할까? 답은 단 두 자리이다.

여덟 자리로 된 2진수를 네 자리 씩 둘로 끊어서 보면 이해하기 쉽다. 가령 8자리로 된 2진수 중 가장 큰 수인 11111111은 1111,1111로 끊어서 표기할 수 있다. 이를 16진수로 바꾸면 F,F가 된다. 이렇게 1바이트는 16진수 단 두 자리로 표현할 수 있다. 왜 그 옛날 게임 캐릭터들의 한계 능력치가 255였는가 하는 의문이 풀린다. 10진수 255는 16진수 FF에 해당한다. 캐릭터의 능력치에 할당된 공간이 1바이트였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생활 속에는 이미 여러 가지 기수법들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우리가 종종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의심조차 품지 않는 세상의 겉모습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어떤 절대성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여지없이 부수어버리는 낯선 진실들이 가득하다.

정녕 10진법 체계는 수 개념의 내적 속성과는 아무 관련도 없고, 결코 절대적이거나 유일무이한 수 체계도 아닌 것이다. 눈앞에서 10진수가 해체되었다가 16진수로 재구성되는 순간, 나는 숫자 앞에서 완전한 무지자가 되었으며, 머릿속에서는 숫자의 모든 개념이 백지화된 것과 같은 공황 상태가 일어났다. 이는 실로 생활에 필요한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수를 정복한 것처럼 여기던 그 오만함에 경종을 울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우주적 차원에서 수의 질서는 정말 절대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낮은 차원에서 그 절대성을 구하고자 했던가? 단지 우주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수를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위해서 고안한 표기법, 고작 그 표기법의 장난질에도 내가 믿었던 질서는 붕괴되고 혼돈에 휩싸이고 말았으니!

다른 기수법을 통해 바라본 수의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수의 본질은 전혀 변화하지 않지만, 우리 인식 구조에는 완전히 낯선 세계가 표상한다. 이것은 비단 수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전혀 다른 기준에 의해 정렬된 세계에서는 우리의 상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수 있다. 익숙한 세계는 모습을 바꾸고, 절대적이라 신봉했던 질서는 한 순간에 붕괴되어 우리를 가치의 혼돈 속으로 내몬다.

10진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16진법의 수 체계는 잘 이해되지 않고, 낯설며, 심지어 공포를 유발하기도 한다. 공포는 혐오를 낳고, 혐오는 언제나 인간들의 분노를 이끌어 낸다. 아마 지구상에 열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소수의 인종이 존재했다면, 그들은 손가락이 열 개인 다수의 인간들로부터 10진법의 사용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사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오늘날에도 살짝 다른 모습으로 수없이 자행되고 있지만.

미약한 인간은 우주적 차원에 서서 모든 자연의 질서를 파악할 수 없다.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만 해도 한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지평의 범위를 훨씬 초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국소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기준들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거나 이해할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 기준이 절대적이며 유일무이한 가치라는 판단을 섣불리 내려서는 안 된다. 이런 태도는 종종 10진법에 타 기수법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초래한다. 그리고 자신이 신봉하는 그 절대성이 붕괴되었을 때, 인간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손가락이 열 개인 우리는 10진법만 잘 알고 활용하면 된다. 그러나 2진법이나 16진법, 그 외에 5진법이나 8진법, 12진법, 60진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다양할수록 좋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저 재미를 위해서도 말이다.

2009/07/26 08:13 2009/07/26 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