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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나 아무런 글도 쓰지 않았다니. 그만큼 생활이 바빴던 거라고 생각하여야 할까. 그 사이 5일 일정으로 통역 수행을 다녀왔다. 이번 행사는 한일 중급 장교 교류회의로, 대령의 인솔 하에 중령 두 명과 소령 두 명 등 총 5명이 방한했다. 그 동안 2성이나 3성 장군을 주로 모셔왔으니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주 부담 없는 행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통역이 쉬운 일은 아니니, 조석(朝夕)으로 찬바람이 불고 낮에는 더운 봄 날씨 속에 서울, 대전, 청주, 김해를 오가는 일정을 따라다니다 결국 목도 상하고 몸살도 나고 말았다. 그나마 본부는 출장비를 잘 챙겨줘서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5일 수행에 출장비만 대략 20만원이다. 물론 통역이라는 엄청난 정신노동의 대가치고는 소략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답사

날씨도 제법 따뜻해졌으니 슬슬 출사를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가볍게 몸 풀기로 몇 군데 답사를 다녀왔는데, 2주 전에는 창덕궁을 다녀왔고 지난 주 화요일에는 공주시를 찾아서 공산성을 둘러보았다. 공주까지 간 김에 무령왕릉도 들렀으나 아쉽게도 공사 중이라 들어가 보지는 못 했다. 저녁 식사는 공주대학교 앞에서 먹었는데, 3월 신학기인 만큼 대학가는 활기에 넘쳤다.

도서관

요즘에는 퇴근 후에 도서관에 다니고 있다. 계룡대 근처에 있는 엄사 도서관이라는 곳이다. 5시에 칼 퇴근해서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고 6시 즈음에는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아 8시까지 책을 읽는다. 그리고 나면 바이올린 연습을 하러 간다.

바이올린

8시 반부터 10시 반까지는 노은동의 연습실에서 바이올린 연습. 올해 초에 시작한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의 1악장을 3개월 째 붙잡고 있다. 하지만 꾸준한 연습 덕택에 연주는 점차 나아지고 있다. 시작할 때만 해도 도저히 불가능한 도전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역시 시간과 노력 앞에 버티는 것은 없는 모양이다. 선생님도 칭찬을 많이 해준다. 연습이 끝나면 이제 운동하러 간다.

복싱

10시 40분부터 12시까지는 장대동의 체육관에서 복싱. 복싱을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되었다니 믿을 수 없다! 그런데 살이 조금도 빠지지 않다니 더더욱 믿을 수가 없다! 성실하게 다녔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중도이폐(中道而廢)하지는 않았다. 이제 비로소 조금 어깨에 힘이 빠지고 펀지가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아무튼 한바탕 뛰고 땀을 쭉 빼고 나면 몸이 개운하다. 비록 체중은 줄지 않았어도 예전보다 건강해졌음을 느낀다. 얼마 전에는 사무실에서 등산을 갔는데, 길이 험한 천왕봉 등반이었지만 다음 날 가벼운 근육통 하나 없었던 걸 보면 평소 전신의 근육을 골고루 쓰고 있는 모양이다. 제대할 때까지는 그만두지 말고 착실히 운동하자.

도시락

집에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면 벌써 새벽 1시에 가깝다. 쌀을 씻어서 밥솥에 안친다. 다음 날 싸갈 도시락을 만들기 위해서다. 밑반찬이야 대부분 주말 중에 만들어 놓으니, 반찬 통에서 도시락 통에 옮겨 담기만 하면 그만이다. 가끔 특별한 반찬이 먹고 싶을 때는 생선 한 도막 굽기도 한다.

향후 계획

뉴질랜드

여행 허가도 받았고 여권도 무사히 발급 받았다. 항공권도 이미 예매했다. 4월 7일에 출국하여 15일에 귀국하는 8박 9일의 일정으로 뉴질랜드에 다녀온다. 부모님이 계시는 오클랜드 일대와 뉴질랜드 남섬을 여행하고 올 예정이다. 뉴질랜드의 대자연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 초점 거리 10-20mm의 초광각 렌즈도 거금 40만원을 들여 장만했다.

중국어

본부에 영국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영어 통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선배가 한 명 있는데, 중국어를 제법 잘 한다. 이 선배와 함께 중국어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나나 선배나 일이 그리 바쁘지 않은 한량들이라서 근무 시간에 잠깐 짬을 내서 30분 정도라도 공부를 하기로 했다. 제대하기 전까지 기초 회화는 가능할 정도로 실력을 쌓는 게 목표다.

서예

1주일에 한 번 공주에 있는 서예 교실을 찾아 서예를 배우려고 한다. 단순히 붓글씨 쓰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고전 텍스트를 본 삼아 그것을 베끼면서 글씨 연습도 하고 고전 공부도 하는 곳이라 한다. 텍스트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하니, 역시 사서(四書) 중 입문서인 대학(大學)부터 시작할까 한다. 아마 너무 바쁘지만 않으면 다음 주 중에 첫 방문을 하게 될 것 같다.

2012/03/24 15:45 2012/03/2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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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생체 시계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심박 수나 체온, 호르몬의 분비 등은 일정한 주기를 따라 변한다고 한다. 그에 따라 우리의 생활 리듬도 일정한 주기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생체 시계는 밤과 낮의 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자전 주기(24시간)가 인간의 생체 시계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한편 밤과 낮의 구분이 없는 동굴 속에서는 인간의 생체 시계가 혼란을 일으켜서 그 주기가 한없이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동굴 속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의 생활 주기는 약 50시간까지 늘어났다. 즉 피실험자가 동굴 안에서 하루라고 느끼고 생활한 시간은, 실제로는 이틀정도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자연의 힘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처럼 대단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인위적인 힘들이 얼마든지 자연의 지배력을 물리칠 수 있다. 가령 알람은 확실히 인간의 생체 시계를 지배할 수 있다. 그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계를 봤을 때 알람 울리기 불과 1분 전이었던 적은 꽤 많다. 내 생체 시계는 지구의 자전이라는 우주적 현상이 빚어내는 낮과 밤의 변화와는 무관한, ‘알람 타이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내 방은 채광이 나쁘다. 반 지하는 아니고, 지상 2층이지만 창 밖에는 건물 벽이 버티고 있어서 한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방 안은 어둑어둑하다. 이게 나에게 딱히 나쁜 점인지는 모르겠다. 화창한 햇살이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황홀한 시간대에는, 애당초 내가 이 방에 있을 일이 없다.

불충분한 채광의 거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새벽녘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대체 몇 시쯤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더더욱. 이럴 때는 항상 시계를 확인하기가 두려워진다. 알람 울리기 1분 전에 깨는 것은, 차라리 더 이상 숙면을 취하기는 글렀을지언정 알람 울릴 때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맘 편히 눈을 감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다.

알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알람은 지금이 생체 리듬 상 활동해야 할 때인지, 혹은 낮인지, 밤인지, 오전 7시인지, 오후 8시인지 상관없이 침대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을 고지한다. 내 경우, 대게는 출근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잔혹한 경고다.

겨울 철 출근은 힘들다. 외투에 목도리, 장갑까지 완전 무장을 갖추지만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이, 아마 알람 울리는 순간과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하루 중 가장 끔찍한 순간일 것이다. 간밤에 꽁꽁 언 차가 녹고 히터가 내뱉는 공기가 따뜻해 질 때까지는, 음악을 들어도 듣는 것 같지가 않다.

여름에는 에어컨에 인색한 사무실이지만, 겨울 히터 인심은 넉넉한 편이다. 옷을 사복에서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앉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일종의 체념 같은 것에서 오는 안락인 듯하다.

컴퓨터를 켜고 커뮤니케이터(군 내에서 쓰는 메신저)에 접속하니, 곧 메시지가 쇄도한다. 이번 주말 부산 여행을 함께 가기로 한 사라들로부터다. 땅 덩어리가 좁은 이 나라의 장점이라면 어디든 저렴하게 갈 수 있다는 것이지만, 단점이라면 이 땅을 지배하는 계절로부터 도망 칠 구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부산이라면 조금은 따뜻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내가 총대를 메고 부산 해운대에 있는 군 휴양시설인 그린나래 콘도를 예약했다. 이 정도면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보는데, 사람들은 이제 여행 계획까지 내놓으라고 한다. 뻔뻔스럽기는.

추운 겨울에 남쪽 바다로 떠나는 여행이다. 무슨 계획이 필요한가. 맛있는 회나 먹고, 쓸쓸한 바닷가 풍경이나 카메라에 담으면 그만이다. 밤에는 광안 대교를 배경으로 야경을 찍어야지. 사람들의 관심은 결국 ‘어디를 갈까’와 ‘무얼 먹을까’에 집중됐다. 고급 스시 뷔페와 수산시장 바닥의 광어회 혹은 시장 뒷골목의 돼지국밥이 서로 상충했다. 나는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지만.

퇴근 후 잠깐 방에 들렀다가 악기를 챙겨서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이 있는 건물은 좀 비정상적으로 춥다. 다행이 연습실에는 전기난로가 있는데, 전기를 많이 먹게 생겼다. 악기만 놓아두고 일단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이 먹고 싶어지는 날씨였다. 근처에 ‘아리가토 마마’라는 일식집이 있어서 들어갔다. 라면, 우동, 돈가스, 카레, 오코노미야키, 타코야키, 카라아게 등등 일본 요리는 거의 망라하고 있는 음식점이었다. 오사카식 카레우동과 야키교자(군만두)를 주문했다. 카레우동이 오사카 요리였던가? 오사카에서 1년을 산 나이지만, 대체 뭐가 오사카식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인스턴트 카레에 우동 사리를 담가놓은 것 같았다. 야키교자는 싸구려 냉동만두를 대충 튀겨낸 느낌. 음식의 퀄리티에 비해 값이 너무 비싸다.

다시 연습실로 돌아갔다. 바로 연습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추워서 난로를 최대로 틀어놓고 방 안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악기를 꺼냈다. 손 풀기로 생상의 백조. 그 다음 B 플랫 메이저 스케일을 연습. 이윽고 요즘 연습하고 있는 곡인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의 악보를 펼쳤다. 적당한 난이도는 의욕을 고취시키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곡은 오히려 의욕을 상실시킨다. 이건 아무래도 못 오를 산처럼 보인다. 중음이 난무한다. 8도 화음을 정확하게 짚으며 내려오는 건 정말 불가능하다.

9시 반, 연습을 마쳤다. 연습을 마무리 할 시간 즈음이면 한 음 한 음 켤 때마다 오늘은 운동을 쉴까 하는 생각이 뇌를 스쳐지나가지만 결국 체육관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사람이 좀 많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한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먼저 준비 운동으로 몸을 풀고 줄넘기 4라운드로 열을 좀 낸다. 8방향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잽, 훅, 어퍼, 바디를 적절히 섞어 세도우 복싱을 한다. 이미지 속의 내 모습은 꽤 날래고 멋지지만, 거울에 비치는 정직한 내 모습은 영 둔탁하고 어설프다. 6~7라운드 정도 숨 가쁘게 운동하고 나면 이제는 샌드백을 칠 시간이다. 오른손 잽은 괜찮은데, 왼손 잽이 영 부실하다는 지적을 거듭 받고 있는 터라, 왼손에 신경 쓰며 샌드백을 때린다. 하지만 힘이 실리는 것도 잠시, 근육의 글리코겐을 급속하게 소모해버리고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내 왼팔. 아, 근력 운동을 따로 해야 할 것 같다. 마무리 운동은 역시 줄넘기.

방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니 12시가 넘어버렸다. 월요병을 앓을 새도 없이 지나가버린 월요일.

아빠는 지금쯤 뉴질랜드 행 비행기에 탑승 해 있겠지. 이제 한국에 나 혼자 남았다.

2012/01/10 01:21 2012/01/10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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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연습실에 바수니스트가 출몰하고 있다. 현재 실력으로 봐선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바순을 취미로 하는 사람은 '없고' 나이도 어려 봬는 것으로 봐서 뒤늦게 음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아닌가 싶다. 오늘은 바순 선생님까지 출몰해서 쌍으로 바순을 부는 진기한 풍경을 목격 했다. 바순 연주도 아니고 바순 레슨이라니, 정말 희귀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어제까지 휴가였기 때문에 월요병은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나흘간의 휴식 뒤 출근에는 그런 만만한(일본어あまい에 해당하는 단어가 한참동안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이 통하지 않았다. 지루하고 숨 막히는 근무 시간. 천근만근 피로. 방에 돌아와 그대로 쓰러져 눈을 붙였으나, 그래도 기어이 일어나 연습실로 가서 바이올린 연습 1시간 하고 운동도 하고 왔다.

역시 금, 토, 일, 월 나흘을 쉬었더니(물론 금요일에는 등산을 했지만) 몸이 무거워졌다. 잽이 이렇게 둔해지다니. 훅과 어퍼컷은 여전히 스피드보다는 자세에 중점을 두고 연습. 어느 새 복싱을 시작한 지 3달째를 맞이했다. 물론 첫 달은 1주일 나가고 말았으니 다닌 거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10월 한 달은 주 최소 3회 이상, 보통 4회 정도 꾸준히 나가 운동했다. 결과적으로 몸이 좀 가벼워졌고, 소화가 잘 된다. 적게 자더라도 훨씬 개운하다.

내일은 3주 만의 레슨. 하지만 회식이 있다는데! 이번에는 또 무슨 핑계를 대고 빠지나.

주말에 사진 찍으러 가고 싶은데, 또 산에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고, 단풍도 이미 졌으니 서울 시내에 산책하기 좋은 길이나 좀 찾아봐야겠다. 이참에 오랜 숙원이었던 서울 역사 탐방이나 시작 해 볼까.

2011/11/09 01:06 2011/11/09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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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도시의 번잡함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마음이 엷어지더니, 이제는 가끔 그것을 그리워하게까지 되어버렸다. 화려한 불빛, 시끄러운 소음, 메마른 아스팔트 위에 납작이 붙어 달리며 검은 매연을 토해내는 자동차들, 도시의 그림자를 형성하는 고층 빌딩들, 그리고 저 높은 곳에 별 대신 빛나는 것은 불 켜진 창(窓) 하나. 그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 내가 도시에 마음이 이끌리고 마는 것은 겉모습이 때문이 아니야. 한 꺼풀 벗겨놓고 보고 싶은 것이다. 손을 넣었을 때 뜨겁다고 해서 반드시 끓고 있는 것은 아니지. 도시의 공허함, 뜨겁지만 결코 끓어오르지 않는 이 도시의,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1도’의 부재를, 나는 애달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에 굶주려 있는 걸까. 나와 만나는 사람들은 왠지 내게서 존경심을 기대한다. 내가 그에 대해 고개 숙이고 경탄하며 그의 일과 그의 능력과 그의 열정을 존경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을 그 나름의 위치에서 존중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천성이 무언가에 들뜨는 것과 거리가 먼 나는 제아무리 열정적인 사람을 만나더라도 반드시 그 열정의 이면에 숨겨진 권태로움, 지루함, 평범함 그리고 인간적인 약점들을 먼저 발견하게 된다. 토해내는 열변은 무대 위의 대사처럼 지리멸렬하고, 그 과장된 몸짓들은 한낱 그림자 연극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항상 그랬다.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무심하게 바라보아 왔다. 그리고 항상 깨닫게 된다.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 대해 품는 지독한 경멸의 절반쯤은 항상 나를 향해있다. 타인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숨 막히는 권태로움과 평범함이 실은 다 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때로는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다.

<이렇게 안 생겼다>


프로그램

J.S. Bach : Partita No.3 in E Major, BWV 1006

L.V. Beethoven : 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5 in F Major, Op.24 <Spring>

D. Shostakovich : Five Pieces for Two Violins and Piano

J. Brahms : 3rd Sonata for Violin and Piano in d minor, Op. 108


지난 일요일, 연주회를 보러 갔다. 오랜만의 연주회. 보통 솔리스트의 리사이틀은 잘 보러가지 않지만, 근래에는 괜찮은 오케스트라 공연이 없었고, 간혹 있더라도 시간이 맞지 않아 보러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통역 업무의 스트레스로부터 간신히 해방된 주말, 나는 녹았다 굳은 캐러멜처럼 침대나 소파 위에 들러붙어 있었다. 연주회 당일인 일요일 오후까지도 나는 달콤한 무기력함에 젖어 표를 예매할 생각도 않았다. 그러나 리사이틀의 매력적인 프로그램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고, 결국 공연 시작 6시간 전에 표를 예매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나가 저녁 식사를 하고, 나는 식당에서 바로 예술의 전당을 향해 출발했다.

콘서트홀과 오페라 하우스가 모두 휴관이었던 예술의 전당에는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날씨가 많이 풀렸는데도 사람 없는 공연장의 공기는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공연 시작 40분 정도를 남기고 로비로 들어섰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디저트로 먹을 케이크 한 조각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커피숍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리사이틀 홀 앞에는 공연 시작을 기다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늘 이런 무명 연주자의 독주회를 보러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했었다. 연주자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있는 사람들일까? 저마다 인사 건네고 담소 나누는 모습으로 보아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오직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 홀로 연주회장을 찾은 나는, 달리 할 일도 없어서 유일하게 문을 연 가게인 앨범 가게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괜히 힐러리 한의 신보를 한 장 샀다. 히그던과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녹음된 앨범이었다. 힐러리 한이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들으러 간 적이 있다. 그때는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해석의 연주로 대단한 실망감과 그 이상의 의아함을 안고 공연장을 나왔던 기억이 있다. 과연 힐러리 한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앨범에 담은 해석은 어떠할지 궁금해졌다.

연주 시작 10분 전에 리사이틀 홀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 홀을 들어가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간혹 유명 연주자들의 리사이틀을 보긴 했지만, 명성 있는 연주자들은 리사이틀이라 해도 객석이 몇 안 되는 리사이틀 홀이 아니라 콘서트홀에서 연다. 그 거대한 연주회장을 가득 채우지 못 하는 솔로 악기의 소리가 때로는 애처롭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 아담한 리사이틀 홀을 가득 채울 솔리스트의 연주가 기대되기도 했다.

연주자가 등장했다. 첫 곡은 바흐의 파르티타 3번. 무반주의 솔로곡이다. 첫 악장 프렐류드는, 내가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동경하고 목표로 삼았던 곡. 이 곡에 대한 기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주는 처참했다. 내 생애, 프로의 연주로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인 연주는 처음 들었다. 첫 마디부터 불안한 음정에, 나는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고, 홀의 음향을 의심했고, 악기의 조율 상태를 의심했다. 불안한 음정은 연주가 계속 되면서도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추어처럼 먼저 소리를 내고 음정을 찾아가면 어쩌잔 말인가? 성부간 밸런스가 전혀 잡히지 않은 것은 곡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기본 기량의 부족 때문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바흐 연주에 대해 말하자면, 마치 연주회 2~3일 전에 처음 악보 펼치고 대충 읽은 다음 무대에 올라온 느낌이랄까? 바이올리니스트들의 구약성서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이 곡을 고르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무런 준비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프렐류드만 두고 말할 것 같으면, 내게 한 달의 시간만 준다면 이 날 이 연주자의 연주보다 더 잘 연주할 수도 있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이미 연주회는 망쳤다. 뒤이어 연주된 베토벤이나 쇼스타코비치, 브람스는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그 연주들의 수준도 하나 같이 엉망이었다. 쇼스타코비치 연주 때는 웬 고등학생 제자 한 명을 데리고 나왔는데, 잔뜩 얼어붙은 어린 학생을 옆에 세워 놓으니 자신감이 붙었는지 연주자 자신은 신나게 연주를 했지만, 덕분에 세컨드 바이올린을 맡은 학생의 소리는 완전히 묻혀서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브람스 연주 때는 반주자와의 호흡마저 불안 해 보였다. 특히 리듬의 매력을 살리는 3악장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4악장에서는 활 털이 두 가닥이나 끊어져나가서 비주얼 적으로는 격정을 잘 표현했지만, 그뿐이었다.

인터미션 시간에 나는 하마터면 옆에 앉은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을 할 뻔했다. 혹시 연주자와 친분이 있어서 오셨냐고. 나는 연주를 들으러 왔지만, 이렇게 처참한 연주회는 처음이라고…….

이날 연주만 놓고 본다면, 나는 이 연주자가 재학 시절에 오케스트라 수석까지 맡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수석을 얼굴로 뽑지 않는 한에야 말이다. 그러나 만일 이 연주자가 그래도 기본 기량은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날 연주회에 대한 준비가 소홀, 아니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이건 감히 티켓을 판매한 연주자에게는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각 악장이 끝날 때마다 놓치지 않고 박수를 쳐댔던 관객들은 음악에 대해 전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보통은 연주회가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관객들이, 이날은 로비에 모여 사교의 장을 열고 있었다. 그 무리 속에서 탤런트도 두 사람이나 발견했다. 중견 연기자 이정길과 박상원. 이들도 오늘 연주자와 무슨 관련이 있는 사람들인가?

옷 잘 차려입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등장해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시시덕거리는 소위 상류층 사람들이 음악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이용하든 난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이런 사교의 장이라도 그 핵심이 되는 연주회가 정작 이 꼴이어서는 이 모든 모습 자체가 너무 우스꽝스럽지 않나.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멋졌어요.’ 홀을 빠져나오면서도 몇 번은 들었던 말이다. 나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다른 건 잘 모르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데, 정말 엉망이었어요.’

2011/02/22 02:15 2011/02/22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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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많았지만, 이따금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깨끗했다. 노을로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 남한강변을 시원하게 달려 좁고 구불구불한 충주 시내의 도로로 들어서자, 퇴근 차량들로 정체를 빚고 있었다. 제 속도로 달렸다면 15분이면 도착했을 텐데, 30분이나 걸려버렸다. 초등학교가 보였다. 그 앞으로 초등학생들 상대로 하는 분식집이며 치킨집, 미술학원 따위가 늘어서 있었다. 그 중 ‘예당 음악 교실’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곳도 있었다.

공터가 눈에 띄어 차를 대어 놓고, 학원 문을 두드렸다. 선생 한 사람이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바이올린 레슨을 해 주고 있었다. 전화로만 몇 차례 통화한 바이올린 선생임에 분명했다.

“그럼 레슨 받으시겠어요?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 나눈 후, 선생은 최종적으로 그렇게 물었다. 내게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확인할 것이 남아있었다. 평소 저녁 때 이 학원에서 바이올린 연습을 할 수 있는가였다.

“그건 어렵습니다.”

이유란 것이, 선생의 어린 조카와 친구들이 저녁때면 이 학원에서 과외를 받는단다. 무슨 고도의 음악적 훈련도 아니고, 고작 누구나 바라보고 사는 별 볼일 없는 것들에 목메며 사는 인생을 위한 ‘과외’ 따위 때문에 음악학원이 음악 배우는 학생에게 연습할 공간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게 웃겼다. 이런 게 이 사회에서는 너무 쉽게 납득될 사정이라는 것에는 차라리 짜증스러웠고.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단은 레슨을 받기로 했다. 주 1회 1시간, 타임 당 4만원이다. 가장 최근에 받던 레슨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다. 선생의 성격은 상당히 꼼꼼한 듯싶다. 당장 이번 주 목요일 저녁부터 레슨을 시작하기로 했다.

부대로 돌아왔다. 차 뒷좌석에는 바이올린 케이스와 각종 교본 및 악보를 넣은 가방이 실려 있었다. 나는 그대로 관사로 돌아가지 않고, 부대 내의 스포츠 센터로 갔다. 2층 헬스클럽 창문으로 런닝머신 뛰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1층 로비를 통과 해 2층으로 올라갔다. 헬스클럽에는 눈길로 주지 않고, 맞은 편 강당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강당 안을 살폈다. 꽤 널찍한 강당이다. 책상과 의자가 수십 개 있다. 스탠드 형 에어컨도 코너마다 배치되어 있다. 정면에는 작은 스테이지도 있고, 반음 내지 무려 1도 가까이 음이 내려간, 고물 피아노도 한 대 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다시 1층 로비로 내려가, 데스크의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우선 헬스클럽 한 달 등록했다. 한 달 회비가 겨우 만 원이다. 이래서야 등록해 놓고 이용 안 한다고 해도 그다지 아까울 게 없을 정도다. 등록부에 이름을 올리고 카드로 결재했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헬스클럽 맞은편 강당 말인데, 거기 좀 써도 되나?” 병사가 대답한다. “예약하면 쓰실 수 있습니다.” “아니, 예약 말고. 저녁 때 아무도 안 쓸 때. 자습실 같은 걸로 좀 쓸 수 있을까?” “저녁 때, 아무도 안 쓸 때라면, 괜찮지 싶습니다…….”

낮에야 이따금 부대 장병들 교육 목적으로 쓰이는 곳이지만, 저녁 때 누가 쓸 일이 있을까. 차에서 바이올린과 가방을 꺼내 2층 강당으로 갔다. 보면대가 없다. 낡은 피아노 위에 악보를 어정쩡하게 걸쳐 놓고, 바이올린을 꺼내 튜닝을 했다. 먹먹한 소리가 난다. 이 녀석도 제 소리를 찾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거다. 흐리말리를 펴놓고 스케일 연습을 했다. 가장 기본적인 C 장조 스케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서드 포지션 잡는 것도 고역이다. 잠깐 악기를 내려놓고 깊은 한 숨을 쉬었다. 이내 악기를 다시 들고, 묵묵히 연습을 시작한다.

그렇게 약 두 시간 정도 연습을 했다. 이 정도 연습은 오랜만이라 피로가 느껴졌다. 연습의 성과라고 하면 손가락 근육이 약간 풀어진 정도. 반년 전 이미 도달했던 위치에 가기에도,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연습 중간에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설마 누가 쫓아내기야 하겠냐마는.

일본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 시절, 현부터 목관, 금관, 타악이 다 들어차서 시끌벅적 연습하던 학관이, 가장 마음 편안한 연습 장소였다. 저녁 8시면 일찍도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유일한 흠이긴 했지만, 누구나 악기 연습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 공간에서 나는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그러면서도 내 자신의 연습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유포니아에 지원하고 첫 번째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오디션 볼 때 유포니아 단원이었던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혹시 오디션 떨어지더라도, 여기 대강당 복도에 와서 연습해도 되나요?” 그때 들었던 대답이 “해도 될 걸요. 근데 자기가 쪽팔릴 수 있으니까.”였던가. 때로는 쪽팔림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다.

다행히 신촌 인근에서 학원을 찾았고, 너무 붐비지 않는 낮이나 늦은 저녁 때는 학원에서 마음껏 연습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매일 강의가 끝나면 학원에 가서 2시간 정도씩 연습을 했다. 오사카 대학의 학관만큼 열정이 넘치는 곳은 아니었지만, 방 하나 차지하고 차분히 연습할 수 있었다. 각 방에는 원장 선생님의 배려로 온풍기와 에어컨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학원을 오가며 연습한 기간이 약 1년 정도 된다.

두 번째로 유포니아 문을 두드렸을 때, 대강당 옆 복도라는 그 열악한 연습 장소를 이용하기 위해 ‘쪽팔림’을 무릅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곳은 여름이면 너무 덥고 모기가 들끓었고, 겨울이면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이 추웠다. 그러나 나는 많은 나날 그곳에서 11시까지 연습하며 순찰 도는 경비 아저씨와 함께 하루를 마감하고는 했다. 그곳은 오케스트라의 ‘공식적’ 연습실을 표방하는 곳이었지만, 그리 많은 단원들이 늘 그곳을 애용하지는 않았다. 향상 음악회나 정기 연주회를 앞둔 시점이 아니면 대체로 한산했고, 특히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많은 날 밤을, 나는 홀로 연습하며 보냈다.

대학 강의실에서 보던 것과 흡사한 책상과 의자들. 굳게 닫힌 철문, 창문을 덮은 커튼, 낣은 피아노. 소리가 텅텅 울리는 이 황량한 공간. 어쩌면 여기가 앞으로 3년 간 나의 연습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 또 다시 고독한, 아주 고독한 연습이 시작될 것이다.

2010/09/07 22:57 2010/09/0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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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듬해 1월. 교토의 콘서트홀에서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제88회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 이들이 연주한 곡은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곡’, 그리고 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이었다. 나는 이때 연주자가 아닌 스태프로 참가하여, 로비의 데스크를 지키며 연주회장을 찾은 관객들이 연주자들 앞으로 보내는 선물을 위탁받는 일을 했다. 연주회가 중반을 넘어가면 어차피 할 일이 없는 역할이라, 나는 로비 안에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었다. 브람스 2번 4악장의 격정적인 피날레가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교토 콘서트홀을 가득 채웠다. 나 역시 로비에서 그들에게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연주회가 끝난 뒤 대기실에 돌아가니 여기 저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그 눈물을 비웃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아직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더욱 연습에 매진했다. 3월 초, 89회 정기 연주회를 넉 달 정도 남기고 아미야로부터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서곡의 제2 바이올린 파트로 들어와 주지 않겠느냐고, 아미야 다운 매우 정중한 어조로 쓰인 글이었다. 초대의 형식을 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연주회에 설 수 있다는 ‘승낙’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정중한 글에는 그러나, “힘들게 연습 시킬 것이니 각오 하고 대답을 주십시오.”라는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저히 못 따라간다 싶으면 쫓아내도 좋으니, 같이 하고 싶습니다. 물론 쫓겨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명실공이 한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었다. 연주회를 준비하는 네 달의 기간은 결코 신나지만은 않았다. 네 달 동안 단 한곡의 곡을 붙잡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네 달의 시간을 온전히 쏟아 부어도 한 곡을 제대로 연주하기 힘들만큼, 나의 기초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120일간 하루 평균 세 시간씩 연습했는데, 악기를 잡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매주 주말에 있던 전체 연습은 한두 번 빠진 일이 있었지만, 매주 목요일 저녁 파트 연습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물론 바이올린 레슨도 계속 받았다.

2007년 7월 7일. 행운의 숫자 7이 세 번 겹쳤다 하여 길일이라던 그 날,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제89회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 연주회의 문을 연 곡은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의 서곡. 아마가사키 홀에서 천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또 천 명의 관객 중 한 사람, 백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 중 한 명의 나를 보기 위해 찾아와 준 친구를 두고, 나는 이 곡을 연주했다. 연주 시간은 10분 남짓. 그 10분 남짓의 연주를 위해 나는 300시간 이상을 연습했다. 아니 어쩌면 그 10분을 경험하기 위해 나는 일본에 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주가 끝났을 때, 나는 굳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노력의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케스트라 단원. 실현 불가능한 공상으로 치부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다음 달, 바이올린 파트의 동료들이 나를 위한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그렇게 내 유학 생활은 마감되었다. 동료들은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에서 연주 생활을 이어가게 될 터였지만, 내 경우는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오케스트라 활동을 지속해 나가겠다는 의지만은 확고했다. 그때 오랫동안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있던 이름이 떠올랐다. 바이올린 시작한지 한 달 남짓인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이름, 연세대학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유포니아. 새로운 길은 의외로 빨리 발견될 것 같았다.

7.

2007년 8월 20일. 나는 1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대부분의 짐은 배편으로 미리 부쳤으므로, 산더미 같은 짐을 들고 돌아오지는 않았다. 어깨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신만만했다. 1년 동안 실력이 조금 향상된 것에 우쭐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일에도 도전할 용기가 있고, 어떤 힘든 길도 걸어갈 성실함과 인내심이 있다고 믿었기에 자신감이 있었다.

거의 2년 만에 돌아간 학교는 완전히 낯선 공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벌써 3학년생이 되어있었지만, 기분은 흡사 새로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개강 직후, 유포니아 동아리 방을 찾았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의 문을 처음 두드릴 때만큼의 각오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오케스트라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유포니아의 동아리 방은, 채플을 들으러 다니던 대강당 1층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찾아갔을 때, 나는 그게 오케스트라 동아리의 방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비록 주말이면 전체 연습 할 공간을 찾아 시내 여기저기의 홀들을 전전해야 하긴 했어도 학교 안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상시 연습할 수 있는 커다란 공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는 거의 1년 내내 누군가가 악기 연습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유포니아의 동아리방은 너무 비좁아 열 사람만 들어가도 가득 찰 것 같았다. 푹신푹신한 소파와 컴퓨터가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 안에서 악기 연습을 할 수는 없어 보였다. 마침 동아리 방에 단원들이 몇 명 있어서 나는 입단 절차를 물어보다가 슬그머니 연습 장소에 대한 것도 물어보았다. 혹시 따로 연습할 공간이 있느냐고. 그러자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평소에 개인 연습은 대강당 양 옆의 복도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복도에서 연습을? 오케스트라마다 여건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며칠 후, 나는 유포니아의 정기 연주회를 관람하러 갔다. 서곡은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 관람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연주회의 서곡이었던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두 번째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는데,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협주곡을 연주한다는 것도 나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메인 곡은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이었다.

단원들이 개인 연습을 할 변변한 공간도 갖지 못한 오케스트라가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일본의 대학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들 중에서도 실력이 좋기로 평판이 나있다. 도쿄대나 교토대처럼 엄격한 기준으로 단원들을 선발하는 입단 절차 같은 것이 없으면서도 ‘되는 대로’ 받은 신입들로 그처럼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 개개인들이 실력을 연마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원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개인 연습을 할 수 있는 ‘학관’의 존재야 말로 그 여건의 핵심일 터였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 선배 중에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 있었는데, 연주회 후 연설 때 자신은 마음속에 늘 학관과 같은 장소를 품고 앞으로 건축 설계를 해 나가고 싶다고 했다. 물론 학관과 같은 난잡한 장소를 설계의 모델로 잡으면 낭패겠지만, ‘정이 깃드는 공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건축의 철학을 얘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도 학관은 의미가 큰 장소였다. 학교를 떠나기 전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학관을 들러 구석구석 찬찬히 살펴보았던 기억이 있다. 수업이 끝나면 늘 찾아갔던 장소. 사람들이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에 나도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이상적인 공간. 어쩌면 오케스트라를 생각할 때 무대보다도 더 기억에 남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장소일 것이다. 그런 장소의 부재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유포니아의 연주는 훌륭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악기를 시작한 지 2년. 클래식 음악을 들은 기간도 그 정도. 연주의 질을 논할 만큼의 안목이 생겼다고는 아직 자부할 수 없었지만, 2년 전 그저 무심히 연주를 바라보아야 했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무언가 다른 바가 있었다. 이날 유포니아의 연주는 나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오케스트라마다 문화가 다른 것이겠지. 아마도 유포니아는 처음부터 연주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만을 뽑기 때문에, 개인들이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 정도의 연주를 해내는 모양이로구나.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단 지원서를 제출했다. 이미 적지 않은 나이. 그러나 나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력. 유포니아는 2년 전의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저 공상의 대상일 뿐일까. 그러나 나는 그것을 직접 확인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오케스트라 동아리가 오디션을 통해 신입을 선발하는 것은 어쩌면 꼭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디션이 없는, 그러면서도 성공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오케스트라를 먼저 경험한 나에게는, 이 오디션의 존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오디션을 통한 선발은 실력 있는 단원의 유입을 담보하긴 하지만, 반드시 열정과 의지가 있는 단원의 유입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실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와 유포니아의 문화와 전통이 엄연히 다른 만큼,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디션은 미리 준비한 자유곡 1곡, 즉석에서 공개되는 초견곡 1곡의 연주를 통해 연주력을 검증하는 단계와 면접관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지원자의 성격을 파악하는 구술 면접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자유곡으로 파가니니의 기타와 바이올린을 위한 이중주곡 중에서 쉬운 악장 하나를 골랐다. 원래 친구와 합주를 하려고 찾은 곡인데, 덜 알려져 신선하면서 어렵지 않은 곡이라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최악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오디션을 본 후 며칠이 지나 유포니아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죄송합니다만 바이올린 파트에는 불합격 하셨습니다. 대신 호른을 불어볼 의향은 없으신가요?”

오디션의 벽. 그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던 내가 다시 오케스트라 생활을 그저 공상으로 여기게끔 만들기에 충분하리만큼 높은 것이었다. 다른 악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제의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호른은 제게 맞는 악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유포니아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군요. 아쉽습니다.”

8.

2007년 10월부터 나는 신촌에 있는 음악 학원에 등록하여 바이올린 레슨을 재개했다. 일본 시절부터 쉬지 않고 달려와 들끓은 열정은 쉽게 식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고독한 연습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늘 학원을 찾아가 하루 두 시간 정도 연습을 했다. 유포니아와 인연이 없는 것 같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당시의 내 학년과 실력을 고려할 때, 또 다시 유포니아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오케스트라에 대한 나의 애정과 의지와 성실함과 진지함이 실력의 한계 앞에 평가 받지 못 한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분하기도 했다.

다시 1년. 뚜렷한 목표도 없지만, 10년 동안 레슨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약속만은 지키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오케스트라 입단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연습을 포기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나 2008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학기 시작과 함께 조기 졸업 신청을 위해 학적과 사무실을 찾았다. 조기 졸업을 위해 나는 닥치는 대로 전공 수업을 들었고, 방학에도 계절 학기를 들었다. 덕분에 4점대 이상이었던 학점은 3점대로 주저앉았지만, 그래도 조기 졸업 가능 학점은 유지하면서 3학기 만에 필요한 전공 학점을 모두 이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졸업 요건에 고급 과목을 몇 학점 이상 이수해야 한다는 제한에 걸렸다. 불과 6학점이 부족해, 나는 조기 졸업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대학을 한 학기 더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남은 학교생활이 반년에서 1년으로 늘어났다.

며칠 후, 나는 유포니아에 다시 입단 지원서를 냈다. 어쩌면 이런 것이 내가 생각했던 ‘언제 나를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심지어 레슨 선생님에게도 비밀로 하고, 오디션 준비를 했다. 스즈키 교재에 수록된 헨델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 한 악장을 골라 악보를 복사하고, 문구점에서 검은색 색지와 풀을 사서 정성스럽게 악보를 정리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며 마지막 시도였다.

며칠 후 합격 통보 전화를 받았다.

[다음에 계속]

2010/04/05 06:00 2010/04/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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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 입국 첫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무거운 짐들은 공항 안의 택배 회사를 찾아 당일 배송 서비스로 부치고, 기숙사 주소와 약도가 그려진 안내장 한 장과 바이올린을 들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서는 대담하게 택시를 탔다. 일본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어의 억양에는 아무래도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얼마 후 당도한 오사카 대학의 국제학생 기숙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름한 건물이어서 첫 인상은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관리실로 들어가 일본어로 내 소개를 하려는데, 상대방이 갑자기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국제학생 기숙사인 만큼 관리실을 지키는 사람들도 유학생들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108호 A. 내가 1년 동안 생활하게 될 방으로 안내되었다. 좁은 방 안에 책상, 책꽂이, 옷장, 냉장고, 침대, 에어컨 등 시설이 빼곡히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허전해 보였다. 관리인이 돌아가고, 나는 침대에 홀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외국에서 홀로 시작하는 유학생활. 내가 바랐던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건만, 가슴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억누를 길이 없었다.

며칠 후, 오사카 대학에서 나의 지도 교수로 지정된 교수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1년 동안 공부할 캠퍼스에 가 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면담을 끝내고, 나는 캠퍼스 안을 산책하며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금관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소리의 근원에 다가갈수록, 금관악기뿐만 아니라 목관악기, 현악기 등 다양한 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끄러운 소음은 어떤 허름한 건물의 1층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구의 유리문에는 “초심자도 환영. 사양하지 말고 들어오세요.”라고 적힌 빛바랜 종이가 붙어있었다. 그곳은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습실이었던 것이다.

10월. 학기가 시작되었다. 간혹 한국인 유학생 선배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조심스럽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보통 그런 것에는 무심한 사람들이어서, ‘항상 시끄럽다’거나 ‘조금 소리가 들을만해지면 또 신입생들이 들어와 시끄럽다’란 얘기들뿐이었다. 10월 6일. 아마도 그날은 추석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작정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찾아갔다. 문을 열려는데, 마침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한 사람이 너무나 멋지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어서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고,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 혹시 입단 신청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악기를 내려놓고 물었다. “무슨 악기로 지원하시려고요?”

“바이올린이요.”

온통 어지러운 연습실 안에는, 대충 책꽂이라든가 책상 따위로 각 파트의 구역을 나눠놓고 있었다. 나는 바이올린 구역으로 안내되었다. 즉석에서 일종의 입단 테스트가 치러졌다. 입단 테스트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오케스트라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식이어서, 연주를 못 한다고 입단을 거부당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해 보려는 것이었다. 한 단원이 내게 악기를 빌려주고, 단지 1년 정도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나의 말을 참고해 적당히 쉬운 곡들이 실린 악보집 하나를 건네줬다. 그 안에서 나는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레슨 받았던 곡을 찾아내어 연주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한동안 얼굴이 화끈거려 좀처럼 고개를 똑바로 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단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날 나는 추석날 밤의 보름달이 뽐내는 아름다운 달빛을 흐뭇하게 즐기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추석을 맞아 한밤중에 한국인들끼리 모여 연 가벼운 주연(酒宴)에서, 나는 내가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밝혔고, 사람들의 성화에 바이올린을 꺼내 또 얼토당토않은 연주 실력을 피로했다. 그렇게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나의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5.

입단 둘째 날, 나는 악기를 들고 연습실로 찾아가 정식으로 입단 원서를 작성했다. 바이올린 파트 사람들과 인사도 나눴다. 그러나 내 악기 지판에 붙어있는 운지 테이프가 부끄러워, 나는 이 날은 끝끝내 악기를 꺼내보지 못 했다. 눈치껏 살펴보았으나 지판에 테이프를 붙여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 지판의 테이프를 떼어버렸다. 그리고 음정을 잡아보려 했지만, 항상 눈으로 손 짚을 자리를 확인하던 습관 때문에 영 어색하고 음정이 정확하지가 않았다. 무작정 오케스트라에 지원은 했지만, 점점 마음은 초조해져만 가고 있었다.

2학기 신입 모집은 거의 하지 않는 일본의 동아리. 여름 방학이 지나 오케스트라에 들어온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환영식 같은 것도 물론 없었고, 동아리 안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내가 단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해주는 것은, 3000엔의 단원 회비와 얼마 후 떠나게 될 합숙 훈련비를 내야한다는 회계의 전달 사항뿐이었다. 나는 아주 고독하게 오케스트라 생활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연습실로 가서 보면대 위에 악보를 펼쳐놓고, 저녁 8시 학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연습을 했다. 주로 호만이나 스즈키 교재에 실린 것들을 지루하게 반복해서 연주했다. 며칠 후 ‘아미야’란 단원이 내게 악보를 건넸다. 합숙 훈련을 가면, 오케스트라 1년차들끼리 모여 연주할 곡이라고 했다. 생각이 있으면 연주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일단 ‘예스’라고 답해버렸다. 그리고 살펴본 악보는, 내 수준에서 도저히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악보는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 제2 바이올린 파트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비로소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11월 초, 오사카 대학의 축제가 한창일 때, 오케스트라는 정기 연주회 대비 합숙 훈련을 떠났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합숙 훈련을 본격적인 연습의 시발점으로 본다. 물론 실력 미달의 신입 단원인 나는, 정기 연주회 참여 대상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견습 단원이라고 할까. 합숙 때 나는 비로소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소개되었고, 저녁 술자리에서 드디어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사용을 고집하던 경어(존댓말)를 버렸다.

합숙 훈련 중에 나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습 과정을 지켜보았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널찍한 방안의 냉랭한 공기도 단원들이 연습만 시작하면 금방 달아올랐다. 현과 목관과 금관과 타악기가 때로는 각자, 때로는 함께 소리를 낸다. 뭔가 어그러지고 맞지 않는 느낌이 들 때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엔가 하나의 소리로 모아진다. 음악 감상의 경력도, 연주 경력도 짧은 내게 그 모습은 하나의 경이였다.

실력 미달의 신입인 나는 아직 정기 연주회에 참여할 수 없어, 몇 명의 다른 초심자들과 함께 ‘피델리오’ 연습에 매진했다. 이 연주는 오케스트라 1년차들이 모여서 합숙 기간에 한 번 재미로 연주해 보는 의미밖에는 없는 것이었지만,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과 생애 처음으로 앙상블을 맞추는 소중한 첫 경험이었다.

아미야는 성심껏 지도를 해주었지만, 실력의 한계를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극복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리듬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처음 깨쳤다. 혼자서 연습할 때 늘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은 음정이었다. 그러나 앙상블을 맞출 때는 리듬을 틀리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16분 음표와 4분 음표, 온음표의 음가, 그리고 부점이나 트릴, 꾸밈음의 음가에 대한 이해와 정립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몸으로 익혀야만 했다. 모든 것이 너무 어려웠다. 어려운 부분에서 느려지지 않기, 쉬운 부분에서 빨라지지 않기, 여린 부분에서 크게 연주하지 않기, 포르테에서 작게 연주하지 않기, 쉼표 잘 지키기 등 평소 내가 악기를 연습하며 등한히 했던 모든 것 하나하나가 음악을 만들어 나감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들이었는지를 ‘혼나며’ 배워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합숙 훈련에서 돌아온 후, 나는 바로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발견한 음악 학원에 찾아가 상담을 받고, 레슨을 견학한 뒤 바로 등록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잠깐 도서관에 들렀다가 늘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찾았고, 거의 매일 저녁 8시 문을 닫을 때까지 연습을 했다. 마침 귀갓길 방향이 같았던 ‘고토’와는 매일 함께 하교를 하다 보니 제법 친해졌다. 더군다나 고토와는 바이올린 초보의 애환도 공유하고 있었다. 레슨 받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늘지 않는 실력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해의 겨울을, 오케스트라에 대해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열정으로, 타지(他地)에서도 외롭지 않게 이겨낼 수 있었다.

[다음에 계속]

2010/03/29 06:00 2010/03/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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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5년 8월. 한여름 밤의 습습한 공기를 가르며, 학교 대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대강당에서는 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강당 앞은 연주회를 관람하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입구에서 프로그램 북을 하나 사서 대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자리를 찾기 위해 강당 안을 쓱 둘러보았다. 아직 연주 시작까지 시간이 좀 남은 탓도 있었겠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빈자리가 많았다. 친분 있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관객들의 표정은 그저 여유로울 뿐이었지만, 강당 안에는 흥분과 긴장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저 무대 뒤편에서 연주 시작을 초초하게 기다리는 연주자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었을까.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고서, 프로그램 북을 펄럭였다.

시간이 되고, 연주자들이 입장했다. 나는 그 무리를 눈길로 더듬어 지인(知人)의 얼굴을 찾았다. 무대가 그리 가깝지 않았지만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너를 보러 왔지.’

내가 자발적으로 찾아간 첫 오케스트라 연주회였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날 연주될 곡들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프로그램 북에 적힌 곡 해설은 꼼꼼히 읽어봐도 이해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날 연주된 곡들의 제목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첫 곡은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내가 이 연주회를 보러간 유일한 이유였던 지인(知人)은, 연주 경력이 길지 않았던 때문인지 이 한 곡만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이어서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과 (인터미션이 있은 후에) 슈만의 ‘교향곡 4번’이 연주 될 때는 한층 더 무심히 연주를 지켜보았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머물며, 나는 관조(觀照)했다. 시선은 고정하고 천 갈래 만 갈래의 생각을 상대를 향해 뻗어보았지만 그 본질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 했다.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박수를 쳤고, 연주자들은 뿌듯해 했다. 어떤 연주자는 눈물을 흘렸고, 나는 그것을 비웃었다. 작위(作爲)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흘리는 눈물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이기 위해 흘리는 눈물도 작위다. 그리고 나는 작위를 경멸한다.

내가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 역시 이 해 8월의 일이었다.

2.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음악사 강의를 신청했다. 이 당시에 나는 음악보다는 차라리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림이나 조각이 더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시각적으로 현현(顯現)된 예술품의 미(美)를,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서점에서 아무 미술사 책이나 골라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지(無知) 그리고 무감(無感)의 벽을 넘어서면, 책의 저자들이 그토록 경탄하고 숭배하는 예술품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음악사 강의를 신청한 것은, 미술사와 병행해서 공부하면 예술을 감상하는 총체적인 심미안을 기를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음악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둘 있었다. 두 교수 모두 같은 교과서를 채택했는데, 그 중 한 교수가 해당 교과서의 저자였다. 기왕이면 저자직강을 듣고 싶었으나, 시간표 여건을 고려 해 다른 교수의 강의를 신청했다. ‘윤혜준.’ 나이 40세 정도의 여자 교수였다. 음악사는 수업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고, 시험 문제는 세세하게 출제되는 까다로운 과목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혹시 수업 진행도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교수는 의외로 시원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러나 교수의 시원스런 성격이 음악사 공부의 모든 난제를 해결 해 줄 수는 없었다. 수업은 오늘날에는 그 음악 원형의 파편조차 알 길이 없는 고대 그리스의 음악 이론부터 시작하여 반주도 없고 박자도 없고 조성은 모호하고 심지어 가사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중세의 성가(聖歌)를 배우는 데에만 거의 한 달의 시간을 할애했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점차 옅어졌고, 수업 시간을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삼는 빈도가 늘어났다. 쪽지 시험 같은 것을 보기도 했는데, 대충 책의 내용을 암기하고 보면 점수는 잘 나왔지만, 결국 음악을 글로만 배우게 되었구나 싶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과가 있었던 터라 피곤해서, 오후에 음악사 수업을 들어가서는 또 금방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졸았을까. 귓가에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혹은 CF에서 들어본 적이 있음직한 음악이었다. 고개를 들어보았다. 빔 프로젝터가 하얀 스크린 위에 영상을 쏘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텅 빈 성당에 홀로 앉아 첼로를 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너무나도 담백한 연주. 그러나 풍부한 소리. 성당을 하나의 거대한 울림통으로 삼아 연주를 하는 듯 했다.

로스트로포비치. ‘거장’이라는 칭송이 어울리는 마지막 연주자. 그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은, 음악사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느낀 음악이었다. 나는 로스트로포비치란 이름도 이날 처음 들었고, 우아한 선율로 시작하는 저 익숙한 첼로 음악이 바흐가 첼로 솔로를 위해 작곡한 6개의 모음곡 중 첫 번째 모음곡의 서곡(프렐류드)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얼마 후 나는 처음으로 음대 도서관을 찾았고, 거기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리코딩을 대여해, 전곡을 들었다. 무지(無知)가 지(知)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후 음악사 수업 시간에 조는 일은 없어졌다.

윤혜준 교수는 자신이 창단했다는 ‘유포니아’라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주회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또 어려운 곡에 도전하고 그것을 소화해내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한지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유포니아에만 특별히 적용되는 관대함 속에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대학생들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이야기는 학생들의 동경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 역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 가능성 없는 공상일 뿐이었다. 유포니아의 존재를 알았을 당시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였으니까. 내 인생은 대학생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와는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담담한 수긍이었지만, 가슴 한 구석에 서글픔을 남겨놓았다.

3.

이듬 해, 나는 일찌감치 2학년 1학기 등록을 하는 대신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동아리 활동을 비롯하여 학교생활 일체를 접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호주와 이탈리아, 그리스를 여행했다. 요리를 배우고, 그림을 배우고, 외출을 하지 않는 날에는 방 안에서 소설을 읽었다. 바이올린 레슨도 계속 받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과 친해져보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시작은 바이올린 음악이었다. 바이올린은 내가 배우고 있는 악기인 만큼 친해지기 쉬웠다. 내가 최초로 구입한 클래식 음반은 헨릭 셰링이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였다. 며칠 동안 이 음반을 계속 들었다. 그렇게 셰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비발디의 사계, 비탈리의 샤콘느,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 소품들. 유명한 곡들 위주로 하나 둘 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을 듣고 나니 사라사테, 비에냐프스키, 비오티 등 이전에 몰랐던 작곡가의 곡들까지 찾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클래식 음악의 벽은 높게 느껴졌다. 특히 교향곡을 듣는 것이 어려웠다. 교향곡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베토벤부터 도전했지만, 단 한 곡도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쉬지 않고 듣지 못 했다. 그는 이런 장대한 교향곡을 무려 9곡이나 작곡했다.

인터넷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 추천 리스트에는 숨 막힐 정도로 많은 곡이 소개되어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라고 쉽게 말해왔지만, 천 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클래식의 세계에는, 내가 밤하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별의 숫자보다도 많은 곡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하나하나의 곡들을 예술품으로 대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음악을 진지하게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에게 음악은 ‘배경’ 정도의 의미 밖에는 없었다. 음악을 틀어놓고 다른 작업을 한다든가, 공부하다 지쳤을 때 신나는 음악으로 기분 전환을 하는 정도의 기능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왜 음악에서 그 이상의 것을 구해야 할까? 음악은 즐거운 것, 즐거워야만 하는 것, 반드시 인간의 감성과 호응하는 것이라 배웠다. 사람들은 모두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과 친한 듯이 보이지만, 평소 우리가 음악에 대해 생각하는 것, 알고 있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음악의 전부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의 지평이, 조금은 넓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2006년 9월, 교환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가져갔다. 10년은 레슨 받기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시작한 바이올린이다. 교환학생을 이유로 배움을 중단하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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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2 06:00 2010/03/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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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명동에 갈 있었는데, 그때 대한음악사에 잠깐 들러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론도’의 악보를 사왔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Rondo for Violin and Orchestra in C-dur, K. 373

이 곡은 단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바이올린이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엄밀히는 ‘협주곡’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보통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하면, 각각 쾨헬 넘버 207, 211, 216, 218, 219가 붙여진 총 5개의 협주곡을 떠올리게 된다. 서로 가까운 숫자들의 나열이라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 5개의 협주곡이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게다가 모차르트의 말년 작품 번호가 600대이니, 200대 초반의 번호가 붙은 곡들이라면 겨우 35년에 불과한 모차르트의 생애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작곡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부터 5번까지는 모차르트가 겨우 19세였던 1775년 4월부터 한두 달 간격으로 완성되어, 같은 해 12월까지 약 9~10개월 만에 모두 작곡이 완료되었다. 협주곡 1번의 작곡 시기가 1775년 4월이 아니라 1773년 4월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상당히 신빙성이 있지만, 2번부터 5번이 1775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모두 작곡된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토록 짧은 시간동안에 작곡되었음에도 협주곡 3, 4, 5번은 바이올린 협주곡 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며, 오늘날 수많은 전공생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는 ‘교재’이자, 프로 연주자들이 사랑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어있다. 이를 보면 정말이지 모차르트에겐 작곡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조차 필요치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이야 여기서 새삼스럽게 떠들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한 가지는 어째서 5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한 것이 한 시기에 집중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더불어 1775년 이전이나 이후에는 정말 모차르트가 쓴 바이올린 협주곡이 단 한 곡도 없는 것일까?

전자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언젠가 내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시작하게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후자의 의문점을 해결 해 보도록 하자.

우선 1775년 이전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없을까? 1933년이었던가,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였던 마리우스 카사드쉬라는 사람이 ‘모차르트의 사라진 바이올린 협주곡을 발견했다’며 세상에 악보 하나를 공개했다. 그것이 ‘아델라이데 협주곡’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협주곡으로, 카사드쉬의 주장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10살 때쯤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곡은 세상에 발표된 직후부터 줄곧 위작 논란에 시달렸고, 결국 현재는 이 곡이 카사드쉬의 위작이라는 것으로 잠정 결정이 난 상태이다.

그렇다면 1775년 이후에 작곡한 협주곡은? 사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6번과 7번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이 줄곧 1775년 이후에 작곡된 모차르트의 협주곡이라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재는 이 두 작품도 모차르트의 작품이 아니라 위작이라는 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위작으로 여겨지는 아델라이데 콘체르토와 6번, 7번 협주곡을 제외하면, 3악장 구성으로 완벽하게 쓰인 협주곡은 더 이상 없다. 아마도 모차르트는 1775년 불과 몇 달 사이에 정열을 쏟아 부어 5개의 협주곡을 작곡한 뒤로는, 더 이상 이 장르에 미련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전 악장을 갖춘 완전한 협주곡이 아닌, 단악장으로 된 것들이라면 1775년 이후에 작곡된 것도 몇 개가 있다. K 261, 269, 373이다. 사실 이 곡들은 독립된 악곡으로 작곡된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가 자신이 이미 작곡 해 놓은 협주곡들의 일부 악장을 대체할 목적으로 작곡한 것이다. K261번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다지오’란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본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의 2악장을 대체할 목적으로 작곡되었다. K269번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론도’인데, 이것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의 3악장을 대체하기 위해 작곡했다.

오늘 소개하는 K373번은 조금 특이하다. 이 곡은 단악장짜리 곡이지만 모차르트가 자신이 작곡한 협주곡의 한 악장을 대체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작곡 시기는 1781년 4월로 되어 있다. 이 곡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해 온다. 모차르트가 빈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친분이 있는 귀족(혹은 대주교의 아버지?) 저택에서 음악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 연주회에서는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브루네티와 대주교 궁정 오케스트라가 협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연주할 협주곡의 3악장에 문제가 있었다.

일설에는 3악장이 통째로 없어졌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애당초 그런 곡이 선곡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곡에 대해 까다로워 작곡가들에게 수정 권고도 서슴없이 했던 안토니오 브루네티가 3악장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사실 모차르트의 K261이나 K269도 브루네티의 권고에 따라 작곡하게 된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무튼 결국 3악장을 새로 작곡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모차르트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곡은 소위 말하는 ‘땜빵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작곡된 C-Major의 론도는, 경쾌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명곡이다. 비록 길이는 짧고 구성도 간결하지만, 오케스트라 반주 위로 떠오르는 솔로 바이올린의 유려한 주제 선율은 일품이다.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모차르트는 역시 모차르트다.

악보는 피아노 반주보가 딸려서 가격이 약 2만 5천원정도 한다.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은 겨우 4페이지(양면 인쇄로 1장!)의 솔로 악보인데, 억울하단 느낌도 든다. 악보에는 손가락 번호가 꼼꼼히 쓰여 있어 매우 친절 해 보이지만, 따라 짚어보면 결코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어렵게 만들어놨어.

아무튼 언젠가는 멋지게 연주 해 보고 싶은 곡. 누군가 피아노 반주를 해줘야 할 텐데…….

2009/09/03 04:41 2009/09/03 0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