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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레슨 재개했다. 원래는 요즘 영어와 중국어 학원을 다니고 있는 강남역 인근에서 음악 학원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근처에 주택단지도 없고 대학도 없는 강남역 주변에는 실용 음악 학원만 즐비하고,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학원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방문 레슨을 하는 선생님을 구했다. 역시 방문 레슨이라 페이는 좀 세다. 그래도 앞으로 기껏해야 5개월 정도 레슨 받을 거니까 감수하기로 했다.

한 달 만의 레슨 재개에, 선생님까지 바뀌었으니 이것저것 고칠 게 많다.

진단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왼손 -

Good:

- 왼손의 손목이 밖으로 꺾이거나 넥에 바짝 달라붙지 않고 모양새가 잘 잡혀있어서 합격점.

- 스스로 늘 나의 최대 결점이라고 생각해왔던, 혹은 나에겐 영원히 장착 불가능한 게 아닐까 여겼던 비브라토에 대한 것인데, 선생님 말에 따르면 의외로 팔 비브라토를 잘 구사하고 있다고. 손가락 관절도 유연해서 비브라토 구사하는 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다만…….

Bad:

- 활을 바꾸거나 멈출 때 왼손의 비브라토가 멈춰버리는 것. 이건 힘 빼기나 관절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겠지. 또 하나, 3포지션 이상 올라가면 손목이 악기 쪽으로 붙는다. 그러면 팔 비브라토를 넣을 수 없음. 아, 왜 내가 비브라토를 잘 못 넣는지 이제야 알았어.

- 운지를 힘없이 하는 것. 운지만으로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꼭꼭 눌러주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또 설령 틀린 음을 짚더라도 한 번에 또렷한 소리가 나도록 확신을 갖고 운지 해야지, 바른 음정 찾아가느라 적당히 뭉게는 짓은 하지 말 것.

- 손 모양이나 손목 각도 등은 대체로 좋은데, 엄지손가락이 약간 헤드 쪽으로 너무 붙는 경향이 있음.

- 포지션 이동 시 쉬프팅을 매끄럽게. 이건 뭐 평생의 과제 아닌가.

- 오른손 -

Good:

- 아니, 잠깐. 오른손은 뭐 칭찬 받은 게 없는 것 같은데. 보통 성인들이 활 쥘 때 새끼손가락을 뻣뻣하게 펴거나 엄지손가락에 과하게 힘을 넣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란 얘길 들었으나... 어차피 활 그립은 바꿨음.

Bad:

- 일단 활 그립. 내가 쥐는 법이 너무 올드 스타일이라고……. 활 쥐는 위치가 훨씬 올라갔다. 엄지와 약지를 제외한 세 손가락은 모두 첫 마디까지 사용해서 활을 단단히 걸어 쥘 것. 선생이 바뀔 때마다 그립이 바뀐다. 나 참…….

- 오늘 가장 여러 번 지적 받은 것인데, 활을 쓸 때 거친 소리가 날까봐 너무 소심하게 보잉하지 말고, 악기를 충분히 울린다는 생각으로 깊게 깊게 활을 쓸 것. 내 악기의 음량에 세삼 놀랬다.

흐리말리로 일단 스케일 체크. 셰브직은 일단 보류하고, 카이저를 좀 깊이 파보기로 했다. 곡으로는 9월까지 배우고 있던 아델라이데 콘체르토를 보류하고, 하이든 콘체르토 2번과 모차르트 콘체르토 2번을 들어가기로. 또 악보를 사야 되는군.

뭐 전체적인 평가는, 성인 돼서 시작한 것 치고 자세라든가 유연성이 괜찮다는 것. 지금까지 제대로 배워 온 것 같다나. 그러나 역시 아마추어 특성상 곡 진도에 비해 부족한 에튀드 진도 등으로 볼 때 테크닉 적으로 연습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는 의견도.

자, 나에 대한 평가는 이정도로 마치고, 선생님에 대한 인상을 말해볼까.

초등학교 3학년 딸이 있다는 아줌마. 내가 단지 전화번호만 받고 자세한 소개는 듣지 못 했으니 간단히 소개 좀 해달라고 매우 에둘러 프로필을 요구했건만, 출신 학교 같은 중요한 정보는 밝히지 않았다. 당연히 레슨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학교 간판이 아니라 교육 역량이지만, 그래도 ‘일거리’를 구하는데 자기 약력을 상세히 밝히는 것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솔직히 전문 연주자로서의 길을 걷지 않은 이상, 대입 준비 시기와 대학 시절이 자기 음악적 역량을 기를 거의 유일한 시기였을 텐데, 출신 학교를 밝히지 않는다는 건 좀 아닌 듯. 대학 간판 따지는 속물이 아닌 이상에야 선생이 무슨 대학 나왔든 뭔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염연히 내가 서비스를 구입하고 돈을 지불하는 고용주인데, 프로필 정도는 알아야 되는 거 아냐?

그 다음. 지도는 매우 꼼꼼했다. 그러나 어떤 선생이든 첫 시간에는 매우 꼼꼼하게 지도하기 마련이니까, 감격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앞으로도 꾸준히 이 정도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첫 레슨 내용에 대해서는 썩 만족스러웠다고 할 수 있겠다.

가능하면 시간 약속은 잘 지켜주는 게 좋다. 뭐 사실 여기에 대해선 나도 워낙 너그러워서 레슨 시간을 미루든 당기든 날짜를 바꾸든 별로 신경 쓰지는 않지만, 약속을 잘 지켜주면 고맙지. 첫 전화 통화할 때 20분 후에 전화 주겠다고 하고는 1시간 20분 후에 전화를 걸어와서 좀 걱정하긴 했지만, 오늘 첫 레슨 때는 약속 시간 15분 전쯤 집 앞에 도착해서, 약속 시간 5분 전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앞으로 좀 더 지켜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뭐 일단 이 정도다. 앞으로 계속 겪어봐야지. 즐겁게 레슨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2009/10/22 04:08 2009/10/22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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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음악/공연



자주 시청하는 Arte TV의 광고를 통해 알게 된 바흐 페스티벌. 지난 토요일에는 바흐 페스티벌 공연 중 하나인 ‘바흐를 위하여’를 보고 왔다. 소프라노 임선혜가 바흐의 칸타타를 노래했고, 메튜 홀스가 지휘하는 레트로스펙트 앙상블(Retrospect Ensemble)이 연주를 했다.

레트로스펙트 앙상블의 전신은 1980년에 창단된 영국의 고음악 연주단체 킹스 콘소트(Kings Consort). 20년 넘게 이 팀을 이끌어온 로버트 킹이 2007년에 물러나고, 2009년에는 이름까지 레트로스펙트 앙상블로 바꿨다고 한다.

고음악 연주단체 답게 악기도 바로크 시대 악기를 사용한다. 하프시코드(쳄발로)와 바로크 바이올린, 바로크 오보에와 바로크 바순 등…….

장소는 세종문화회관 체임버 홀. 자리는 맨 뒷 열 좌측에서 두 번째 자리. 사실 티켓링크 쪽에 더 좋은 자리가 여럿 남아 있었는데, 티켓링크의 그 팝업 플래쉬 예약 시스템이 내 컴퓨터에서는 지랄 맞게 느려서 좌절. 티켓 한 장 예약하는 데 거의 30분쯤 걸렸다. 겨우겨우 끝마치고 결제 하려는데 무슨 보안 프로그램 안 깔렸다면서 액티브액스 떠주시고 처음부터 다시. 욕을 바가지로 퍼부은 다음 인터파크에서 예매해버렸다.

연주 프로그램은

칸타타 <바로 그 안식일 저녁에> BWV 42 중 신포니아

칸타타 <내게 주신 복에 만족하나이다> BWV 84

<오보에 다모레와 현을 위한 협주곡 A 장조>, BWV 1055

-인터미션-

<오케스트라 모음곡 1번 C장조> BWV 1066

칸타타 <이제 사라져라, 슬픔의 그림자여> BWV 202

사실 오케스트라 모음곡 1번 하나 바라보고 간 연주회였다. 오보에 협주곡은 제목만 오보에 협주곡이지, 원래 악보는 소실되어서 주로 쳄발로 협주로 연주된다. 그런데 이 날은 정말 오보에 협주로 연주를 하더라. 하지만 솔직히 오보에의 연주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 가장 발전한 악기가 관악기라는 것을 절감할 만큼, 바로크 오보에의 소리는 현대 오보에의 그 청아한 소리 대신 어딘가 짓눌린 듯한 갑갑한 소리가 났다. 악기의 한계를 제쳐두고라도 연주자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났다고 볼 수도 없었다. 몇 가지 눈에 띄는 실수가 있었던 것. 엉뚱한 것 가지고 트집 잡을 생각은 없지만, 자기 쉬는 부분에서 다리를 꼬고 앉는 거만한 태도를 보일 정도의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바로크 시대의 오보에. 현대의 오보에와는 생김새부터가 많이 다르다.>

BWV 42 신포니아는 이날의 기악 음악 중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곡이었다. 하기야 성악곡 분야에 대해서는 통 무지한 나이니, 들어본 적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만. 참고로 덧붙이자면, 바로크 시대에 ‘신포니아’라고 하면 오페라나 칸타타 같은 성악극의 시작 부분이나 중간에 삽입되는 기악 음악을 의미했다. 요즘 말로 옮기면 ‘서곡’이나 ‘간주곡’ 정도가 될까. 곡은 좀 심심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곡이니까, 낯선 것도 있고.

그래도 오케스트라 모음곡 1번은 상큼했다. 또 지휘와 연주를 같이 한 것을 처음 봤는데, 이것도 인상 깊었다. 건반 악기 연주자들에 한해서 이렇게 지휘와 연주를 같이 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고음악 연주단체에서는 상당히 일반적이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지휘와 연주를 동시에 하는 것을 ?き振り(히키후리)라고 한다. ?く는 피아노 등을 ‘치다’란 의미이고, 振る는 지휘봉을 ‘흔들다’라는 의미에서 ‘지휘하다’의 뜻으로 통한다. 그러니까 합쳐서 ‘치며 지휘하기’가 된다. 영어나 한국어에 이런 표현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관객을 등지고 쳄발로 앞에 앉아서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한편, 지휘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번 연주회의 수확이라면 역시 소프라노 임선혜의 칸타타였다. 성악은 별로 즐기지 않아서 모두가 생소한 곡들이었지만, 과연 명불허전이라 음색이 고울 뿐만 아니라 기교도 완벽해서 처음 듣는 곡들임에도 감명을 받았다.

이날은 연주 실황이 라디오로 방송 되었는지, 객석 뒤편에 설치된 데스크에서 진행자가 연주 사이사이에 계속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라.

연주회는 주로 큰 홀로 다녔고, 체임버 뮤직을 실황으로 즐길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이런 분위기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이런 연주회까지 찾아 올 정도 관객들이니 매너도 좋았고 말이다.

100% 만족한 연주회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좋은 기분 전환이 되었다.

2009/10/19 03:55 2009/10/19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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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서재/文選

기원전 237년은 훗날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최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영정이 진(秦)나라 왕위에 오른 지 10년째를 맞이한 해였다. 훗날의 위업으로 역사상 시황제(始皇帝)라 일컬어지는 인물이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적극적인 정복 사업을 벌이기는커녕 섭정 여불위의 손아귀에서 이제 막 벗어나 겨우 친정(親政)을 시작하는 단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정이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 그는 겨우 13세의 소년에 불과했고, 반면 여불위는 영정의 아버지인 영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시절부터 그를 도와, 영자초가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장양왕) 이미 승상으로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해온 노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영정은 즉위 후 10년간을 여불위의 그늘 아래서 숨을 죽이며 보냈다. 그러나 영정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불비불명(不飛不鳴)하며 10년의 세월 동안 서서히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기원전 238년, 여불위의 수하였던 노애의 반란을 계기로 기회를 잡은 영정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여불위를 압박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 여불위가 자결함으로써 비로소 영정의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었다.

거의 시기를 같이 하여 진나라를 뒤흔든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위수 지역 북쪽에 관개수로를 설치하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위수는 남북으로 기다랗게 자리한 진나라의 허리를 관통하고 있는 강이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이 위수에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함양의 북동쪽으로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지역은 땅이 매우 넓지만 물이 부족하여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인공 운하를 설치하여 물을 끌어오면 별 쓸모가 없는 황무지가 단숨에 곡창 지대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한(韓)나라 출신으로 토목 기술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정국(鄭國)이란 인물이었다. 진나라에서 이 진언이 채택이 되어, 정국이 운하 건설의 총책임자로 선정되었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정국이 사실은 한나라가 파견한 첩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국 시대의 나라들 중 가장 세력이 약했
던 한나라는, 반대로 가장 세력이 강대했던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언제 진나라의 병사가 파도처럼 밀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나라 조정은 선수를 치기로 했다. 물론 힘으로 겨뤄서는 승산이 없다. 힘으로 안 된다면 꾀로 승부를 걸어볼 수밖에 없다. 한나라의 속셈은, 진나라에 전대미문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스스로 국력을 소진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어설픈 감언이설로 이런 대공사를 일으키게 할 수는 없다. 정말 진나라에 이익이 되는 것처럼 완벽하게 꾸밀 필요가 있다. 한나라도 국가의 명운을 걸고 펼치는 작전인 만큼 신중을 기해서 완벽에 가까운 제안을 만들어낸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가짜 제안에 그쳤어야 할 것이 오히려 너무 완벽한 계획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 운하가 완성되었고, 완벽하게 기능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다.

정작 더 신중을 기했어야 할 부분은 비밀의 유지였지만, 실패하고 만다. 정국의 정체가 탄로 났고, 이 일은 진나라를 뒤흔든 일대 스캔들이 되었다. 이때 진나라 조정의 왕족들이며 진나라 토박이 귀족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타국 출신의 관료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였다.

기원전 237년은 전국시대의 말기에 해당한다. 주나라가 주도하는 봉건 질서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진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보통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사회적으로는 100개도 넘는 제후국들이 난립하여 서로 패권을 다투느라 한시도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혼란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왕성한 지적 활동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립한 수많은 제후국들은 저마다 부국강병을 꾀하기 위해 많은 인재들이 필요했고, 이런 수요가 신분의 차이를 막론하고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천한 신분이면서도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 자가 있었고, 타국 출신이면서도 군대를 통솔하는 장군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 시기에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새파랗게 어린 증삼으로부터 자신의 가르침을 ‘충서(忠恕)’라는 단 두 글자로 요약 당해버린 공자도 춘추시대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를 나와 여러 국가를 떠돌며 일자리를 구했다.

이런 시대였던 만큼, 외국 출신의 인사가 국가의 중요한 책임을 맡아보는 자리에 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진나라는 외국 인재 등용에 열심이었던 것 같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진나라는 비록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는 있어도 중국 대륙의 중심이 아니라 서쪽으로 치우친 변방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진나라가 중국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상당히 소외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실제로 당시 진나라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 용맹하고 호전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열등한 야만족의 인상이 짙게 풍긴다. 진나라의 건국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진나라는 은나라 주왕을 섬기던 신하 악래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고 한다. 은나라의 주왕은 폭정으로 주나라에게 반란의 빌미를 제공한 폭군이었고, 악래는 그 주왕과 죽이 잘 맞은 간신이었던 모양이다. 주나라는 은나라 정복 후 설령 주왕의 친족이라 하더라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제후로 봉했을 정도로 처분에 관대했지만, 악래는 처형했다. 그런 악래의 후손들이 변방에 세운 나라라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까, 당시 중국 대륙 중앙에 위치한 국가들이 진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은 곧 뛰어난 인재를 배출할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국민들의 기질이 용맹하다고 해도, 이것을 잘 통합하고 이끌 지도자가 없어서는 패자(覇者)가 될 수 없다. 진나라가 외국 인재 등용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납득이 갈 뿐만 아니라, 훌륭한 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무리 국경의 의미가 오늘날과 같지 않은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외국 인재의 등용을 모두가 달갑게 여긴 것은 아니다. 외국 인사를 관료로 임명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오늘날에는 심지어 험한 일을 도맡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조차 눈을 흘기는 것이 인심이다. 따지고 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나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게 그들을 배척하는 본심이지만, 항상 대의명분은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식으로 귀결된다.

또한 높은 문화 수준으로 동질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중국 중앙부의 국가들과는 달리, 진나라 토박이들은 열등의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외국 출신의 인사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정국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순수 진나라 토박이들은 이것이 외국 출신의 인사들을 추방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회복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진나라 왕 영정은 이제 겨우 여불위를 물리치고 친정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시작부터 정치적 시험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향후 영정의 국가 운영 방침을 결정하는 중대한 사안이기도 했다. 당시 영정의 나이는 고작 이십대 초반. 그의 결정에 따라 향후 수십 년 진나라의 정책 노선이 달라질 터였다.

역시 젊었던 탓인지, 영정도 혈기왕성했다. 외국 인사들을 추방하고 진나라 사람들끼리 똘똘 뭉치자는 의견에 솔깃했다. 지난 10년간 자신을 억눌렀던 여불위도 실은 한나라 출신이었다고 하니까, 그로 인해 더욱 타국 출신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영정은 결심을 한다. 곧 축객령(逐客令)이 내려졌다. 객(客)이라고 하면 오늘날에는 ‘손님’의 의미로 이해되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객(客)들을 좇아내라(逐)라는 령이라고 해서 통칭 축객령이라고 한다.

이웃 나라를 위해 첩자 노릇을 하던 정국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것은 당연하지만,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라고는 하나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진나라 조정을 섬겨왔던 많은 인재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성취를 잃고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이사(李斯) 역시 그런 난처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사(李斯)는 원래 초나라 사람이다. 소년 시절에 뒷간의 쥐와 곳간의 쥐의 태도가 다른 것을 보고 환경의 중요성을 통찰했다고 하니까,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사가 초나라에 머물러서는 뒷간의 쥐 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일찌감치 진나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고는 과연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여 순조롭게 승진했다. 축객령이 내려질 당시 이사는 객경(客卿)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경(卿)은 공경대부(公卿大夫)로 통칭되는 중국 고유의 직위 제도 안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다. 경(卿) 앞에 객(客)자가 붙은 것은 외국 출신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위치가 높은 만큼 표적이 되기도 쉽다. 이사는 당장에라도 추방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사가 왕에게 글을 한 편 써 올린다. 축객령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명을 물릴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것이 ‘축객령에 간(諫)한 글’이라 하여 ‘간축객서(諫逐客書)’라 불리는 유명한 글이다. 여기 그 전문을 소개한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진나라 관리들이 외객의 추방을 결의하였다고 하는데, 신의 생각으로 이는 당치도 않은 결정입니다. 옛날 목공(穆公)은 어진 선비를 구하여 유여를 서쪽의 융(戎)에서 취했고, 백리해를 동쪽의 완(宛)에서 얻었으며 착숙을 송나라에서 맞이했고 비표, 공손지를 진(晉)나라에서 찾았습니다. 이 다섯 사람의 모국은 진나라가 아니었지만 목공은 그들을 등용하여 20개국을 병합하고 마침내 서융(西戎)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또 효공(孝公)이 상앙의 법을 채용하여 풍속을 개혁함으로써 백성은 번영하고, 나라는 부강하게 되고, 백관은 즐거이 봉사하고 제후는 친히 복종하고, 초(楚), 위(魏)의 군사를 깨뜨려 넓힌 토지가 천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군사가 강한 것입니다. 혜왕(惠王)은 장의의 계획을 써서 삼천(三川)의 땅을 둘러 빼고, 서쪽으로 파(巴), 촉(蜀)의 땅을 합하고, 북쪽으로 상군(上郡)을 치고, 남으로 한중을 취하여 여러 오랑캐를 아우르고, 언(?), 영(?)을 제압하고, 동은 성고의 험난한 곳을 의지하여 기름진 토지를 뺏고, 마침내 6국의 합종을 해체하여 진나라에 복종케 하였습니다. 그 공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왕(昭王)은 범수를 얻어 그 계략에 의하여 양후(穰候)를 폐하고 화양군을 추방함으로써 공실을 굳세게 하고, 사가의 번창하는 길을 막고, 제후의 땅을 잠식하여 진나라의 제업을 이룩하였습니다. 이 네 분의 군주는 모두 외객을 등용하여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외객이라 하여 반드시 진나라를 배반한다는 것은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이란 말입니까? 만약 이 네 분의 군주가 일찍이 외객을 물리쳐 받지 않고 어진 선비를 등용하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부귀함을 거두지 못 하고 진나라의 굳센 명성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폐하는 곤륜산(崑崙山)의 유명한 옥을 손에 넣었고, 수후주(隨侯珠)와 화씨벽(華氏璧)을 지니고 계시고, 명월주(明月珠)로 몸을 치장하고, 태하의 명검을 차고, 성리의 좋은 말을 타며, 취봉(翠鳳)의 깃털을 세우고, 악어가죽으로 만든 북을 설치해 놓으셨습니다. 이들 여러 가지 보배는 어느 하나도 진나라에서 난 물건이 아닌데 폐하께서 이런 물건을 귀중히 생각하는 것은 어쩐 일이십니까? 만약 진나라에서 나는 물건만을 쓰신다고 하면 야광의 벽옥은 조정에 장식할 수 없고, 뿔과 상아로 만든 기물은 완상할 수 없으며, 정(鄭), 위(衛)의 미녀는 후궁으로 들일 수 없고, 결제 같은 준마도 마구간에 넘칠 수 없으며, 강남의 금, 은도 쓰임새에 충당할 수가 없고, 서촉의 단청도 채색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후궁을 장식하고, 궁내의 쓰임새를 충당하고, 심정을 즐겁게 하고, 이목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진나라 산물이 아니면 쓸 수가 없다고 한다면, 완의 주옥으로 만든 비녀, 구슬을 붙인 귀고리, 아호(阿縞)의 비단옷, 금수의 장식은 대왕의 앞에 올릴 수가 없으며, 토속 그대로 아취를 더한 조나라 미인 역시 지금처럼 폐하를 모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독을 치고, 항아리를 두드리고, 쟁을 퉁기고, 무릎을 치며 노래 불러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참으로 진나라의 음악이며 정(鄭), 위(衛), 상간(桑閒), 소(昭), 우(虞), 무(武), 상(象)은 이국의 음악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진나라에서는 물독과 항아리를 두드리는 대신 소와 무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이 곧 마음을 즐겁게 하고 눈으로 보기에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인물을 취하는 것은 이와 다르게 논설의 가부와 행위의 곡직을 말하지 않고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제외하여 외국 사람을 추방하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진나라가 존중하는 것은 여색과 음악뿐이며 인물은 경멸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일어서서 해내(海內)의 제후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신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고, 나라가 크면 사람이 많고, 군대가 굳세면 병졸이 용감하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같이 태산은 한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기에(泰山不辭土壤) 그토록 크며, 바다는 한 가닥의 가는 물줄기도 가리지 않아(河海不擇細流) 그토록 깊어진 것입니다. 임금 역시 한 인간일지라도 물리치지 않기 때문에 덕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의 땅에는 사방의 구별이 없고, 임금의 백성에는 이국의 차별이 없고, 네 계절이 조화하여 그 아름다움이 충만하고 귀신도 성인의 시대를 칭송하여 복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삼황과 오제로 하여금 적이 없게 했던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민을 버리고 적국을 이롭게 하며, 빈객을 물리치고 제후를 도와 천하의 선비를 뒷걸음질 치게 하여 서쪽으로 향하게 아니하며, 발을 묶어 진나라로 들여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원수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 됩니다. 진나라에서 나는 물건이 아니고도 보배로 삼을 것이 많으며, 진나라에서 난 선비가 아니고도 충성을 바치는 자가 많습니다. 이제 외객을 추방하여 적의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줄여서 원수에게 이롭게 하고, 국내에서는 스스로 모자라는 것을 견디고, 국외에서는 열국의 원한을 사면, 어떻게 나라의 편안을 바라며 어떻게 소원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타국 출신의 인사들이 진나라 조정에 진심을 다해 충성할 리가 없다, 결국 자기 출신 나라의 이익이 결부되면 배신을 할 게 분명하니까 미리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논리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주장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물리치기가 더 어렵다. 아무리 정연한 논리를 세워 반박하더라도 듣는 쪽에서 귀를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이사(李斯)의 글은 과연 명문이다. 논리적으로도 흠잡을 구석이 없다. 그러나 이 글이 진정 명문으로 꼽히는 까닭은, 이 글이 단지 완벽한 논리만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강하게 호소하는 어떤 기백이 서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진나라 토박이들의 옹졸한 생떼로 들뜬 왕의 가슴을,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웅장한 기상으로 달궈놓는 것이다. 이사는 글에서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표현도 서슴지 않지만, 요순시대 이야기를 꺼내며 왕이 앞으로 이룩해야 할 위업이 어떤 것인지를 넌지시 암시한다. 요순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그것은 중국 대륙이 완전히 통일되어 하나의 왕 아래 질서를 갖추고 국가의 구분 없이 모든 백성이 화목을 누렸던 이상의 시대가 아닌가? 장차 그런 시대를 다시 열어야 할 분이 지금 이 나라 사람 저 나라 사람 운운하는 것은 너무 쩨쩨한 것 아닌가? 이사가 글 서두에 구구절절 늘어놓은 과거의 예는 단지 과거의 예일 뿐이다. 그런 케케묵은 이야기들은 사실 무시해도 좋다. 하지만 장차 진나라가 중국 대륙의 태산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한 줌의 흙이라도 마다하지 말아야 할 시기에, 오히려 산을 스스로 허물 작정인가?

결국 축객령은 폐지되었다. 이사가 계속 중용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번 스캔들을 일으킨 장본인인 정국조차 첩자 노릇을 관두고 공사에 최선을 다해 운하를 완벽하게 완성시킨다는 조건 하에 처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직위도 그대로 두었다. 이후에 정국은 자기 목숨을 걸고 한 약속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일국의 일개 첩자로 이름을 남기기보다는 운하의 완성자로 이름을 남기고 싶은 토목 전문가로서의 자존심 때문인지, 정말 운하를 완벽하게 완성했다. 정국의 이름을 따 정국거라고 불린 이 운하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어, 고대 중국의 뛰어난 건축 기술의 증명이 되었다.


<오늘날 새로 정비된 정국거의 모습>

이사의 호소가 이제 막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접어든 야심찬 젊은이의 가슴을 새로운 기백으로 채우고 시선을 미래로 돌리게 만든 것이다. 어차피 조만간 자신이 대륙을 통일하면 진나라, 초나라, 한나라의 구분도 없다. 이사의 글을 읽고, 영정은 벌써 여기에 생각이 미쳤는지도 모른다.

정국이 완성한 운하로 황무지는 옥토로 변모했다. 이 옥토의 생산물이 진나라가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사 등 외국 인재들을 두루 활용한 것도 종전과 다름이 없었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중국 대륙을 통일했고, 영정은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게 되었다. 대륙 변방의 가장 야만한 나라 중 하나였지만, 외국의 것을 배척하지 않고 잘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에 마지막에는 오히려 다른 나라들을 모두 제압하고 패자(覇者)가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젊어서는 포용력이 있고 진취적인 기백이 넘쳤던 영정이, 통일 이후에는 그런 장점을 모두 잃고 만다. 너무 젊어서부터 두드러지면 쇠퇴도 빠른 것일까. 진나라는 이사나 정국 같은 타국 출신의 책사, 기술자들을 등용함으로써 패업을 이룬 나라다. 그런데 통일 이후에는 밖으로는 오랑캐 대책으로 만리장성을 쌓아 국력을 소모시키고, 안으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대표되는 사상 탄압 정책으로 다양성의 씨를 말려버렸다. 결국 진나라는 통일을 이룩한 지 15년 만에 너무나도 허망하게 망하고 말았다. 외국인 기술자를 등용하여 만든 운하는 국력을 신장시켰지만, 외침을 막으려고 세운 성벽은 오히려 국가가 망하는 원인이 되어버렸으니 이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오늘날 여전히 우리, 우리의 것, 국가, 민족을 외치는 것을 진정한 애국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간축객서의 태산불사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辭土壤 河海不擇細流)란 구절과 더불어 이런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2009/10/15 04:54 2009/10/15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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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년 만에 다시 찍은 책상 위 모습.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나의 오디오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한다. 아니, 사실 오디오 시스템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다. 이게 내 책상이자, 오디오 시스템의 실체. 보다시피 재생기기는 노트북이다. LG의 Xnote LS45 모델. 2005년도 9월 무렵에 구입했으니까, 벌써 4년 이상 된 녀석이다. 그래도 구입 당시에 성능 조금은 받쳐주는 걸로 고른 덕에, 아직까지는 별 무리 없이 돌리고 있다. 하기야 내가 고사양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요, 그래픽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니, 컴퓨터 사양 탈일은 별로 없다.

스펙을 보면 사운드 칩 사양이 HD sound 24bit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Sandra로 정보를 보면…….


Maximum Standard Sampling Bits: 16-bit!!!

아무튼 오늘의 이야기 주제는 사실 노트북이 아니고 스피커다. 부드러운 곡선 처리가 된 투명한 바디와 그 바디를 투과하여 은은히 비추는 블루 라이트가 포인트인 이 미려한 자태의 스피커는 바로 harman/cardon의 Soundstick2이다.

구입 시기는 작년 11월 하순쯤. 10월 중순부터 구입하려고 가게 여러 곳에 전화 문의를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국내 시장에 일시적으로 물건이 사라져서 구입까지 몇 주를 기다려야 했다. 스피커가 도착한 첫 날, 음악만 8시간 정도 들었던 것 같다.

Soundstick2를 고른 이유는 단 한 가지, 빼어난 디자인이다. 어느 날 우연히 이 스피커를 보게 된 이후부터는 다른 스피커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성능에 대한 고려는 애초에 2순위로 밀려나버렸지만, harman/cardon은 저 유명한 JBL의 모회사이며, 독일 유수의 카 메이커들이 생산하는 자동차의 오디오 시스템을 담당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소리 면에서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음악 감상 목적에 2.1 채널은 허세에 불과하다는 등의 기능적인 논의는 가볍게 묵살시킬 만큼, 이 스피커의 외관이 선사하는 심미적 만족도는 절대적이었다. 더 나은 소리를 위해서라면 우퍼를 바닥에 내려놓아야겠지만, 아직까지 소리의 질에서 심미적 만족을 구할 정도의 내공을 갖지 못 한 나는 외관의 아름다움을 계속 즐기기 위해 구태여 우퍼를 책상 위에 놓고 있다.

이따금 방안 가득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이 스피커가 그런 용도에 적합한가는 논외로 치고, 때로 음악은 그렇게 들어야 한다. 또 음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고급 음향설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기 보다는, 약간의 부족함을 상상력으로 메우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 연주회를 다니며 생음악도 들어봐야 악기의 본래 소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직접 연주를 해 본다면 금상첨화다. 그런 경험이 감상을 완성한다. 물론 고급 오디오 시스템은 구경도 못 해본 나니까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나처럼 컴퓨터를 재생기기로 쓰는 개인 사용자들에게 Soundstick2는 디자인 면에서나 성능 면에서나 최고의 만족도를 선사하는 명품 스피커임에 틀림없다. 그저 책상 위를 차지하고 있는 당당한 모습만 보더라도 흐뭇해지는 기특한 녀석이다.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쓰는 글이 아니니까, 스피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 찾아보면 전문적인 리뷰 같은 것들도 얼마든지 나오니까 관심 있으면 직접 검색 해 보시길.

음, 다음에는 이 스피커보다 함께한 지 훨씬 오래되었고, Soundstick2를 들여놓은 이후에도 여전히 자주 사용하고 있는 오래된 동반자 AKG의 K240 Monitor 헤드폰(사진 좌하단에 보이는 커다란 헤드폰!)에 대해, 심심하면 써보도록 하겠다.

2009/10/13 04:43 2009/10/13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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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제123기 공군사관후보생으로 선발되어 지난 2009년 9월 14일자로 입영했던 나는, 입소 5일 만에 훈련소에서 쫓겨나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 다사다난했던 지난날들을 정리한다. 참고로 훈련소 생활 5일간의 일기는 실제로 훈련소 생활 짬짬이 쓴 것.

2009년 9월 14일 입소


2009년 9월 15일 정밀신검


2009년 9월 16일 체력검정 그리고 불길한 조짐


2009년 9월 17일 성병이 아니냐고?


2009년 9월 18일 그리고 쫓겨나다


2009년 9월 29일 병원 진찰


 

그후



이상이 내가 입소 5일 만에 훈련소에서 쫓겨나 여전히 사회에서 비비적거리며 생활하게 된 경위이다. 현재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내 동생은 이 소식을 접하고 “부럽다, 오빠한테는 자꾸 맘껏 쉴 시간이 주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처음에 훈련소에서 쫓겨 날 때는 당황스럽고, 머리를 깎으러 목욕장으로 들어가는 후보생들이 부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사회로 다시 나와 며칠간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주변에 연락도 못 취하고 멍하니 지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적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생 말처럼 마음의 짐 없이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이번 겨울에 중국 여행을 가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낡은 영어 실력을 다시 연마하기 위해 회화 학원에도 등록했다. 내년에는 아마 오케스트라 연주도 한 번 더 서지 않을까 싶다. 독서할 시간도 많아서 벌써 몇 권의 책을 읽었다. 바이올린 레슨은 아직 쉬고 있지만, 조만간 선생이 구해지면 집에서 레슨을 받을 생각이다. 사진 찍는 것에도 흥미가 생겨서 앞으로는 기회가 될 때마다 사진기를 가지고 돌아다닐 생각이다. 집에 있을 시간이 많으니까 이것저것 요리도 해볼까 한다. 전자저울 같은 것을 사서 제빵에도 도전해 보려고 생각 중이다.

무엇보다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검사 결과, 나는 몸에 그토록 소홀했음에도 아직 건강하다. 그러니 이 건강을 잘 지키기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할 생각이다. 입대가 6개월 늦춰졌고, 그만큼 제대 후 인생 6개월을 손해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인생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 앞에서 자르나 뒤에서 자르나 매한가지다. 27세의 6개월은 손해 봤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젊은 23세의 6개월을 얻었으니 아쉬워 할 것은 없다.

다시 한 번 후회 없이 놀고, 앞으로 블로그에 좋은 글들을 많이 남기겠다. 그렇다, 이 시간은 정말 ‘글을 쓰기 위해’ 주어진 시간인 것 같다. 대학 생활 동안 너무 좋은 책들을 많이 읽었다. 꾸준한 독서를 통해 쌓은 지식들을 차분히 정리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늘 아쉬웠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지적 성장으로 충만하고, 심정적으로 안락하며 즐거운 생활을 보내겠다.

2009/10/11 03:47 2009/10/11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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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북아프리카 엘 알라메인 전선, 종군 목사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찬송가를 듣고 있는 영국군 장병들.

<음악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입대한다. 첫 휴가는 두 달 뒤이고, 임관은 내년 1월 1일.
가져갈 수 있는 책이라곤 종교 서적밖에 안 된다고 그래서, 일본어 성경책 하나 가져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코란도 사둘 걸 그랬다.

그럼, 다음 포스팅은 두 달 뒤에.

2009/09/14 06:11 2009/09/14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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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군 입대를 앞두고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운운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들려주었던 이야기. 이제는 나를 위해 되새겨야 할 때인 것 같다.



시오노 나나미 <침묵하는 소수 中 "어느 모범수의 탈옥기" 전문>

17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로마에 주세페 피냐타라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직업은 추기경 비서였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는 거주하고 있는 추기경 수도 많으니, 이런 사람들을 보좌해주는 비서직은 당시 가진 재산이 별로 없는 지식인으로서는 귀족 집안의 가정교사와 더불어 일반적인 직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피냐타는 이제 비서가 아니다. 20대부터 모시던 추기경이 죽은 것이다. 게다가 죽을 때 그가 남겨준 연금은 검소하게 생활하면 일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한 정도였으니, 새 주인을 찾아나설 필요도 없었다. 지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유복한 가브리엘레 백작이 청하는 대로 그 집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것이 지금 그에게는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혈육이라고는 이전의 그와 같은 직업을 택한 아우 한 사람이 독일에 있을 뿐이다.

백작의 만찬 모임에서는 철학이나 역사, 과학이 주된 화제였다. 종교에 관해서는 이 집안의 전속 참회 청문수도사인 올리버가 말을 꺼내지 않는 한, 누구도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반동종교개혁의 폭풍은 한 세기 전만 해도 자유로운 르네상스를 누리고 있던 이곳 로마조차도 숨막힐 듯한 세계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피냐타가 체포당한 것은 평온하지만 지적인 자극으로 충만한 생활이 2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백작의 집을 나와 어두운 샛길을 가야 하는 두려움도 잊은 채, 착 가라앉은 여름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느긋한 걸음으로 귀가하고 있을 때였다. 남자들 몇이 그를 뒤에서 덮치더니 머리 위로 망토를 뒤집어 씌워 꼼짝 못하게 하고는 마차에 던져 태웠다. 망토가 벗겨진 것은 마차가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선 후였다. 달빛에 비친 정원을 본 피냐타의 가슴은 얼어붙는 듯했다. 그곳은 추기경 비서를 지낼 무렵 일 때문에 오곤 했지만, 그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지던 다름 아닌 이단재판소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하 감옥 속으로 그를 발로 차 던져버렸다. 취조하지도 않은 채……. 얼굴을 내보이는 인간이라고는 죄수를 마치 짐승 대하듯 난폭하게 다루는 간수밖에 없었으나, 그는 간수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피냐타는 창틈으로 새어드는 실낱같은 빛을 바라보며 하루가 저물 때마다 감옥 벽에 석회 조각으로 표시를 해나갔다.

그가 불려나간 것은 꼭 한 달이 지나서였다. 덩그러니 넓은 방에는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 수도사들이 벽을 뒤로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제 취조가 시작되었다. 심문은 참으로 교묘했다. 그래도 그는 책잡히지 않도록 바짝 긴장하여 끝까지 발뺌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부터는 고문이 시작되었다. 최조 때는 혼자였으나, 고문을 당할 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다. 헌 서럼아 한 사람이 고문당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지켜보아야 했다. 그제야 가브리엘레 백작의 만찬 모임 구성원 가운데 올리버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 전부가 붙잡혀 온 것을 알게 되었다. 피냐타는 겨우 한 달 전만 해도 생기에 찬 지적 대화를 즐기던 사람들이 지금 와서는 육체보다도 정신적인 타격이 더욱 커, 고문이 필요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초췌해진 것을 암담한 기분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단재판소에서 살아 나간 사람은 없다는 소문을 떠올리고는 공포감에 빠져들었다. 이단재판소는 죄가 재판되는 곳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곳이었다.

심문과 고문이 되풀이되는 것도 겨우 끝나고 이제 판결만 남았으나 그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 동안 그는 감방이 바뀌어 지하에서 같은 건물의 3층으로 이감되었다. 그곳은 내부 정원을 향해 철책이 쳐 있으나, 작으나마 창이 나 있어 바깥 공기를 충분히 들이마실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저녁 미사에 나가는 것도 허락되어 미사 때면 다른 죄수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독방 신세로서는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다. 이단재판소의 수도사들은 친절한 면도 있었다. 한 주에 한 번 죄수들과 대화할 때, 그들은 언제나 희망을 갖도록 다독거려주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절망스러운 말을 하기도 했다. 감방에 갇힌 사람들은 이런 말에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안절부절못하며 보내야 했다.

피냐타가 초연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희망은 희망대로 남겨두면서 혹시 그것이 실현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여 탈옥할 의지를 굳히고 있었다. 고문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회복되자 좁은 감방 속에서도 근육 단련을 잊지 않았고, 미사에 나갈 때도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탓에 머리가 둔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식사용 조그만 탁자 위에 석회 조각으로 쳄발로 건반을 그린 다음, 알고 있는 곡이란 곡은 몽땅 쳐보곤 했다. 글을 읽거나 쓰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사가 있던 어느 날, 수리하던 목수가 흘리고 간 듯한 못 하나가 우연히 눈에 띄어 그는 그것을 몰래 주워 숨겨놓았다. 또한 판결이 내려진 죄인들은 소일거리로 짚 세공품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 순회수도사에게 자기도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미결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며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다. 그럼 하다못해 목탄과 종이라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순회수도사는 울고불고하거나 아니면 협박하는 다른 죄수들에 비해 언제나 평정을 잃지 않는 피냐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지, 그건 규칙 위반이라고 말했지만 그 다음 주에는 물품들을 마련해주었다. 피냐타는 그것을 가지고 미사 때마다 보아온 바사리의 <성모자상>을 생각해내어 본떠 그렸다. 선과 농담만을 구사한 데생이었는데도 순회수도사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나 보다. 수도사는 이 데생을 짚 세공으로 재현하여 수녀원에 기증하겠다는 피냐타의 의향을 받아들였고, 본인도 힘써보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원하는 양만큼의 짚과 실, 바늘 그리고 가위와 풀을 받게 된 것은 그로부터 2개월이 흘러서였다. 짚 세공에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유모가 하던 것을 보아온 덕분에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이제 그 데생을 보아가면서 작업을 시작하면 되었다.

형태가 대충 잡혀갈 무렵, 피냐타는 흰색을 포함해 여러 색 물감을 청했다. 순회할 때마다 형태가 점점 정교해져가는 것을 보고 감탄하던 수도사는 싫은 내색도 없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가 원하는 물건 가운데 흰색 물감과 실이 필요 이상으로 많았지만, 수도사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데생용 목탄을 깎을 손칼이 필요하다는 피냐타의 요구를 들어주기까지 했다. 손칼도 가위도 무슨 일을 저지르기에는 너무 작은 것이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색깔을 입히는 작업도 끝나고 원화보다는 작았지만 수녀들이 매우 기뻐할 만큼 잘된 짚 세공품이 완성되었다. 18개월이 흘러서였다.

또 식사 때마다 나오는 작은 사기 병에 든 샐러드용 식초를 의심 받지 않을 만큼 모으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커다란 물항아리를 채울 정도가 되었다. 다행히 감방 청소는 죄수 스스로 직접 해야 한다는 게 규칙이었다. 작품이 완성된 뒤에도 그는 담뱃값이나 자잘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쉬지 않았다. 손칼과 가위를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기다리던 판결이 내려진 것은 체포당한 날로부터 3년이 지나서였다. 더욱이 전 교황이 죽고 새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즉위했으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은사(恩赦)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헛일이었다. 가브리엘레 일당이라고 분류된 사람들 모두에게 종신형이 내려진 것이다. 단지 백작만은 출감되어 어느 귀족 집에 보호인지 감시인지로 맡겨졌으나 그는 그 상태로는 안심할 수 없었던지 그곳을 탈출하여 베네치아로 망명했다. 피냐타는 그 소문을 한참이 지나서야 들었다.

피냐타가 판결에 좌절하여 다른 동료들과 함께 절망에 빠졌던 것도 이틀뿐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는 순회하러 온 수도사에게 오랫동안 앓고 있던 척추병이 고문과 감옥 생활 탓으로 도진 것 같다며 의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의사 앞에서 아픈 척하기는 간단했다. 의사는 마을 어디서나 흔히 구할 수 있는 철심이 든 코르셋을 구해주었다.

미사에 가던 피냐타는 또 우연히 건물 수리 공사장 하나를 목격했다. 이 건물의 바깥벽 두께는 2미터도 훨씬 넘었다. 그러나 방 천장이 활 모양이어서, 그 가운데 가장 움푹한 부분을 파내면 80센티미터도 못 미쳐 그 윗방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가 갇혀 있는 층은 모두 안쪽으로 창이 나 있지만, 그 위층에 있는 수도사들의 방은 철책 없는 창이 바깥쪽으로 나 있다는 것을 짚 세공일 덕택에 친해진 수도사로부터 들어두었다.

그렇지만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피냐타의 방은 모퉁이에 있었기에 양 옆에 있는 독방까지는 비교적 거리가 있었고, 두꺼운 벽이니 소리가 샐 염려 또한 적었다. 그러나 그 위층은 달랐다. 피냐타는 윗방에 사는 수도사가 예수회 고위층이라 간부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월요일과 수요일, 목요일 밤에 방을 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 했다.

피냐타는 2개월에 걸쳐 통계를 작성했다. 그리하여 이 건물 안에서 열리는 월요일 회의와 교황 앞에서 열리는 목요일 회의 때는 수도사가 한밤이 되기 전에 돌아오지만, 로마 시내의 예수회 본부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는 수요일은 언제나 자정이 지나서야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낮에 작업한다는 것은 그가 언제 감옥에 돌아올지 모르니 위험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침대와 책상과 의자를 겹쳐 세우고 그 위로 올라서면 보아둔 천장의 그 지점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다. 가위와 손칼, 그리고 못은 회찰한 벽을 긁어 깎는 도구로 바뀐다. 첫 벽돌을 빼기는 힘들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생각보다 쉬웠다. 특히 벽돌과 벽돌 사이를 굳히는 역할을 하는 석회층에 식초를 발라두면 다음 작업 때에는 그것을 깎아 빼기도 쉬울 뿐 아니라, 긁어낼 때 나는 소리도 작아진다. 벽돌을 뺄 때는 코르셋에서 빼낸 철삿줄을 썼다. 예정된 작업이 끝나면 틈이 난 구멍에 데생용 종이를 발라 그 끝을 흰색 물감으로 칠해두면 표가 나지 않았다. 빼낸 벽돌은 화장실에 갈 때 몰래 숨겨가서 그 속에 버렸다. 작업을 시작한 지 1년 후, 그는 바짝 야위었지만 잔뜩 움츠리면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을 윗방으로 트기까지 이제 벽돌 한 장만을 남기게 되었다.

피냐타는 수요일 저녁을 기다렸다. 그날은 낮부터 남요를 찢어 밧줄을 만들었다. 적어도 25미터는 필요했다. 이제 마지막 순회가 끝나자마자 그는 담요를 두루마기처럼 마름질했다. 탈옥 후 양치기로 변장하기 위해서다. 또 수건 두 장을 겹쳐 꿰매어 주머니도 만들었다. 그 속에는 손칼, 가위, 철심을 넣었다. 남은 일은 이제 마지막 벽돌 한 장을 빼내는 것뿐이다.

구멍이 뚫리자 피냐타는 우선 필요한 물건을 위로 올려둔 다음, 벽돌 모서리를 잡고 위로 기어올라갔다. 거친 벽돌 표면에 몸이 스쳐 쓰라렸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곧장 창문으로 달려가 창틀에 밧줄을 맨 다음, 그것을 타고 드디어 땅 위에 내려섰다.

주위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밖에서 지내기 좋아하는 로마 토박이들도 허구한 날 신음밖에 들리지 않는 이단재판소 근처를 지나가는 게 퍽이나 싫었을 것이다. 피냐타는 계획대로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날이 샐 때까지는 성벽 가까운 야채밭에 숨어 있고, 성문이 열리면 근교의 농민들 무리 틈에 숨어 도망할 작정이었다. 로마 성문은 어느 곳이나 페스트라도 유행하면 모를까 감시가 결코 허술하지 않다는 것은 로마 토박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피냐타가 비로서 베개를 높이하여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나 가까스로 베네치아 땅을 밟은 날 밤이었다.

지금도 베네치아 고문서관에 남아 있는 보고서 가운데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로마에 풀어둔 첩자가 보내온 이런 글이 남아 있다. 1693년 11월 11일자다.

“어제 예의 가브리엘레 일당으로 옥중에 있던 주세페 피냐타가 이단재판소 탈출에 성공, 오늘 아침 로마는 온통 이 소문으로 떠들썩하다. 일당 중 두 사람은 이미 옥에서 광사(狂死). 탈출에 성공한 마흔네 살의 이 사나이는 더할 나위 없는 모범수였다고…….”

2009/09/13 19:41 2009/09/1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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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베켓(1906~1989)


부조리(不條理)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이 단어를 자주 사회의 어떤 구조적 모순, 특히 사회의 불평등성이나 비도덕성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인간 사회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다는 우리의 통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실의 증거들이 바로 우리가 ‘부조리의 파편’이라 여기는 것들이다.

흔히 사람은 법과 질서를 준수하고 자기 양심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도록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하며, 게으름보다는 부지런함이 바람직하고, 막대한 부(富)보다는 훌륭한 인품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줄곧 제기되었으나, 여기에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의문 한 가지가 늘 따라붙었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느냐?”이다.

여기에도 물론 많은 답변들이 나왔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회가 사람들의 선의와 선행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줄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피력했고, 어떤 사람은 개인의 행위가 신이나 역사에 의해 심판 될 것이라는 숭고한 종교적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의 가치 판단이 결국 ‘자기만족’에 달렸음을 넌지시 내비치기도 했다.

묻건대, 사회의 부조리를 외치는 사람들은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것은 하나의 신념이다. 현실 사회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모범적인 삶의 방식, 인생의 목적 같은 것을 제시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도덕책을 통해 습득하게 된 ‘상식’이 현실 사회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회가 ‘부조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가 도덕책이 그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부정의’하기 때문일 뿐이다.

‘부조리’란 본래 배리(背理)의 동의어로, 논리적으로 이치(理致)에 맞지 않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사실 부조리란 단어는 우리의 신념에 비추어 어그러진 사회의 모습에 던지는 푸념의 용어로 사용될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물음, 즉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단어인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카뮈, 새뮤얼 베켓은 부조리 문학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삶의 부조리한 속성은 보통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이나 무력함,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불가능성 등으로 이해된다. 소설 속의 상황들은 근본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난제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질문은 어떤 논리적인 해법을 완벽하게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카프카의 ‘변신’ 속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레고르가 ‘벌레’에서 다시 ‘사람’으로 변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혹은 측량사 자격으로 마을을 찾아온 K가 성에 들어가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살인죄를 저지르고 법정에 선 뫼르소에게는 대체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법인 것일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고도’는 ‘해답’인가?

얼마 전 우연히 ‘세비지스 The Savages’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 주인공 웬디는 39살 극작가다. 남편은 없고, 애인은 늙은 유부남. 변변한 성공작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어느 날 갑자기 20년 전 사랑하는 여자를 좇아 자식들과 인연을 끊고 사라졌던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입원중이라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 병간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힘겨운 상황 속에서, 8번째 응모한 구겐하임 장학 재단으로부터는 또다시 탈락 소식이 날아든다.

보통 헐리우드 영화에는 명확한 문제제기와 그에 따른 해법이 존재한다.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도망치는 처지라면 그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해법이다. 세상이 위기에 빠졌다면 그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하면 되고, 짝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한다면 사랑을 이루는 것이 분명한 문제의 해법이다.

영화 ‘세비지스’에는 누구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그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사랑을 좇아 자식들까지 내버리고 떠나간 아버지이건만, 결국 치매 노인이 되어 자신이 버린 자식들의 간병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웬디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대체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버지의 회복 혹은 임종, 불륜 관계의 청산, 극작가로서의 출세, 안정적 가정의 구축 같은 것들이 ‘인생’의 해법들일까?

문제의 핵심은 ‘life goes on’, 즉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동화 속 주인공의 삶은 왕자와의 행복한 결혼식 장면에서 끝나지만, 인간의 인생은 책이 덮인 다음에도 이어진다. 인간은 ‘실존’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시시포스는 영원토록 비탈길에서 바위를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가 굴리는 바위는 영원히 정상에 안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는 행위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가? 그것은 바위를 비탈의 정상에 올려놓는 불가능한 임무의 완수인가? 혹은 바위를 굴리는 그 자체인가?

새뮤얼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마치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는 것처럼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무대는 장소를 특정할 수 없는 어느 시골길을 배경으로 한다. 이 두 부랑자는 ‘고도’를 기다리며 부질없는 대화를 나누고,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한다. ‘고도’는 이 둘에게 어쩌면 절대적 구원이요,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정작 두 사람은 고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그를 만나면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 한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도’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이 의미 없어 보이는 삶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도는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나무를 보며 목을 메달 생각을 한다. 만일 이들이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극한의 좌절 혹은 분노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수긍이며, ‘바위를 미는 행위의 중지’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감정이 부추긴 죽음’이 아니라, ‘정신이 선택한 죽음’인 것이다.

부조리 문학은 확실히 읽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며, 우리의 실존의 근거를 뒤흔듦으로 하여 존재의 불안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부조리 문학의 배경에도 ‘논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부조리 문학의 토대는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 혹은 ‘실존이 곧 본질이다.’를 뒤집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주장, 그 뿐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란 주장은, 인간의 존재가 엄연한 사실인데 비하여 그 존재의 목적은 특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우린 이 세상에 목적 없이 태어났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주장은 전혀 우리들, 그러니까 동양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서양인들에게는 커다란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것이 서구인들이 목적론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서양 철학자들이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인과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론적인 것이다. 인과론적인 견해는 오늘날 자연과학자들의 견해와 비슷하다. 즉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인과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의 보편화로,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반면 목적론적인 견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이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현상의 ‘목적’이 바로 실존과 본질 중 ‘본질’에 해당한다. 눈(目)의 본질은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은 ‘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날개의 본질은 비행(飛行)이다. 그러므로 날개는 ‘날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고 어쩌면 매우 비과학적인 얘기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 최고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목적론적인 사고가 서구 문명을 지배했다. 중세 1천 년간, 유럽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삶의 본질은 전능한 신에 의해서 디자인 되어, 그 완벽한 계획 위에 인간의 실존이 주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근대 유럽인들이 느낀 존재의 불안은, 중세 1천 년간 이어졌던 강한 종교적 확신의 증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의 문제 제기는, ‘실존’과 ‘본질’ 혹은 ‘존재’와 ‘목적’이 엄연히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동양의 고전 철학에서는 애당초 ‘목적인’이 되는 초월자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았다. 목적이 존재를 유발한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실존’과 ‘본질’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일도 없다. 어쩌면 부조리 문학이 많은 아시아권 독자들에게 ‘갑갑한 현실’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못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2009/09/11 05:39 2009/09/11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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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마지막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 날이었다. 학원가는 길에 잠깐 백화점에 들러서 선생님 드릴 선물을 골랐다. ‘설화수’의 아이크림. 잔주름과 다크서클 없애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런 것에 관심 기울일 나이이니까, 괜찮은 선물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하 식품 매장에서 치즈 케이크도 하나 샀다. 학원에는 여러 선생님들이 있으니까, 나눠 드시라는 뜻에서.

3시 10분 정도에 레슨이 시작되었다. 우선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모차르트 론도 악보를 보여드리고 몇 군데 손가락 번호를 새로 정했고, 까다로운 리듬을 한 번씩 연습했다. 그리고 다시 원래 연습하고 있던 아델라이데 콘체르토로 돌아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차례 훑었다.

이렇게 끝났다. 일기장을 뒤져보니, 이 학원에서 첫 레슨을 받은 날에 쓴 글이 있다. 첫 레슨을 받은 날은 2007년 10월 4일. 그러니까 이번 선생님에게서 레슨을 받은 게 꼬박 2년이다. 과거 일기에는 ‘선생님’ 대신 ‘강사’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내가 얼마나 타인에 대해 냉정하고 방어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지금도 학원을 처음 찾았을 때가 기억이 난다.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 학원을 찾아볼 여유도 없이 개강을 맞이했다. 연대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지원해서 합격하면 단원들에게 물어서 학원이나 레슨 선생님을 소개 받을 생각을 했었는데, 결국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1년 뒤 입단해서 단원들의 사정을 살펴보니, 바이올린 파트 사람들 중 레슨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어차피 혼자 알아 볼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아무튼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인터넷을 뒤져가며 정보를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학교 근처에 있는 이 학원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개강 한 달째를 맞이할 무렵, 불쑥 학원에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원장 선생님은 당장 수강 신청서를 들이밀 기세였지만, 난 레슨 선생님을 직접 만나보기 전에는 등록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도 생각나는데, 레슨 선생님을 직접 만나보겠다고 학원 복도 의자에 앉아 버트란드 러셀의 ‘Conquest of Happiness’를 읽으며 30분 넘게 기다렸더랬다.

결국 바이올린 선생님과 만나고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현재 음악 활동은 하고 있는지, 교육 방식은 어떤지 등을 나름 꼼꼼하게 질문하고서야 수강 신청서를 작성했더랬다. 사실 우리나라 정서상, 출신 학교 같은 걸 물어보는 것이 실례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이런 것들을 따져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또 기본적으로 신뢰가 바탕 되어야 사제 관계도 좋지 않겠는가.

선생님은 레슨 시간을 변경하는 일이 제법 있기는 했지만, 지도 자체는 성실했다. 나도 워낙 성실한 학생이어서 레슨 시간에는 대체로 수업에만 집중 했지만, 간혹 가다가 수업 중에 서로 즐거운 수다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선생님이 참여하는 연주회 무대를 보러 간 일이 있다. 재밌는 건, 선생님이 몸담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첼로 수석이 유포니아 선배라는 것이다. 앞으로 연주회를 보러 가게 되면 인사를 드릴 사람이 있으니 즐거울 것이다.

학원 등록 후, 유포니아에 입단하기 전까지 약 1년 동안은, 평일이면 거의 거르지 않고 학원에 가서 최소 1시간씩은 바이올린 연습을 했다. 내 성실함에는 선생님들도 탄복할 정도였다. 그렇게 키운 실력으로 학원 발표회 무대에도 섰고, 내개 한 번 탈락의 쓰라림을 안겨준 유포니아에도 배짱을 가지고 재도전하여 결국 합격을 할 수 있었다.

학원 원장 선생님은 상당히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마지막에는 악수를 하며 ‘건승’을 기원 해 주었다. 임관 후 서울 쪽에 배치가 되면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내가 바이올린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4년이 조금 넘었다. 그 4년의 시간 중 2년을 함께 했으니, 이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다.

또 일기장을 뒤져본다. 2007년 8월 2일, 일본에서 마지막 레슨을 받은 날 쓴 글이다. 말미에 이렇게 적혀있다.

<레슨이 끝난 뒤, 사장님 부부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했다. 사장님은, 아직 출국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한 번 더 들르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아사이 선생님에게도 직접 작별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시간을 내서 아사이 선생님이 출강하는 수요일에 한 번 더 들르기로 하고, 나는 학원을 빠져나왔다.

하늘은 아직도 환했다. 처음 레슨을 받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학원을 나설 때면 이미 어둑어둑했었는데 말이다. 레슨 받으러 가면서도 찬바람 맞아 손 굳게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갑을 끼고는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이올린 짊어진 어깨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만큼 시간이 흘렸다. 문득 깨닫고 보면 이렇게 놀랄 만큼 환경이 바뀌었는데, 그 변화의 과정은 느리고 자연스러웠다. 나도 내 안에 쌓아 올린 시간만큼 변화했을까. 그만큼 성숙해졌을까. 바이올린 실력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나는 삶을 음미하는 자로서의, 그 인간됨의 무게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모르겠다. 역시 스스로를 관찰하는 것은, 주위 환경을 관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다만 즐거웠다는 것 밖에는,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난 2년간 내가 얼마나 더 성숙해졌는지, 그 시간이 내 인생을 얼마나 더 가치 있게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자연스런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고, 음악을 더 즐길 줄 알게 되었다. 삶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데에 조금 더 능숙해진 것 같다.

이제 입대를 하면, 훈련을 받는 4개월 동안은 레슨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이래 최장의 휴식 기간이다. 더군다나 혼자 연습할 수 있는 시간도 거의 없어, 체감하는 공백 기간은 더욱 길 것이다. 어쩌면 바이올린 시작 이래 최대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별 걱정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바이올린을 그만 둔다는 것은 이미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처럼, 악기를 다시 집어 들었을 때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 들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그마저도 자연스럽다. 내가 악기 케이스를 다시 여는 것 자체로…….

2009/09/10 02:53 2009/09/10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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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니아 총회에 다녀왔다. 총회는 의례적으로 연주회 직후에 열린다. 총회 참석 대상은 연주회 참여자 전원이며, 개회 정족수는 정원의 절반. 그러니까 연주회에 참여한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참석해야만 총회를 열 수가 있다. 사실 동아리 총회가 이런 까다로운 조건들을 철저히 지킬 줄은 몰랐는데, 정확히 지키더라.

나는 개회 시간인 7시보다 30분가량 늦게 회의 장소에 도착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도착함으로써 개회 정족수를 채워 바로 총회가 시작되었다.

첫 순서는 유포니아의 예산 집행 및 결산 보고. 오케스트라 동아리의 자금 운용 규모가 얼마인지 사실 궁금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도 상당히 큰 액수. 단체의 돈 관리라는 것이 아무리 작은 액수라 하더라도 여러모로 힘들게 마련이다. 그런데 유포니아의 저 막대한 예산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일은 얼마나 수고롭겠는가. 새삼 회계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총회의 메인이벤트는 차기 총무 및 회계의 선출. 유포니아 회칙 상 총무 및 회계는 한 학기 동안의 임기를 마친 뒤 자동적으로 회장 및 부회장으로 승격되기 때문에, 총무 및 회계 선거는 곧 회장 및 부회장 선거다.

총무와 회계는 선거로 뽑고, 유포니아 내의 여러 행정 임원들 및 각 악기 파트의 파트장들은 전 임기의 임원들이 임의 내정하였다. 내정자 대부분이 08학번 학생들로, 유포니아는 바야흐로 08 학번들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다.

총무 및 회계 선거에 대해 약간 더 부언하자면, 총무 후보로는 모두 세 명이 나서서 제법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그 중 한 후보는 세 차례의 고사 끝에 네 번의 추천을 받고서야 겨우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재밌는 것은 세 후보 모두 바이올린 파트 소속의 남학생들이었다는 것. 관례적으로 총무직에는 남학생, 회계직에는 여학생이 선출된다.

첫 투표에서는 과반의 득표를 기록한 후보가 없어 재투표까지 실시해야 했고, 결국 한 사람이 5표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다. 회계 선거는 한 사람이 단독 출마하여 찬반 투표 끝에 당선되었다.

한 조직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책임을 떠맡는 것이다. 실로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역량과 여건을 떠나서 용기, 혹은 객기로라도 그것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것은 청년에게 허락된 특권이 아닐까. 사실 나도 1학년 때 당시 몸담고 있던 동아리 회장 선거에 출마 한 적이 있다. 나 스스로는 전혀 생각도 않고 있었지만, 회장님의 부탁을 받아서 어렵게 결정하고 나간 자리였다. 그러나 결과는 복학을 한 대선배에게 당선이 돌아간 것이었고, 회장과 부회장은 성별이 다른 것이 좋다는 암묵적인 룰에 따라 나는 부회장직에서도 자동적으로 배제되었다.

당시를 돌이켜 생각 해 보면, 물론 나에겐 회장직이나 임원직을 떠나서 동아리 활동 자체에 이미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사건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까닭으로, 그나마 맡고 있던 임원직은 후임에게 인수인계하고, 다른 어떤 직책이나 역할에 대한 제의도 고사한 채 동아리를 떠났지만, 한편으로는 조직의 리더로서 조직의 미래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그려보았던 복안들이 쓸모없게 된 것에 대해 조금은 허탈해 한 면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사람의 욕심을 존중한다. 욕심은 도전과 성취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덤비는’ 사람들의 유별난 의욕에 대해서도, 나는 긍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사실 ‘욕심’은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는 자연스런 본능이 아닌가. 욕심을 억누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조선의 가치가 여전히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이런 욕심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용기 있는 행위로 칭찬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반장 선거나 전교 회장 선거, 대학에 들어와서는 동아리 회장 선거까지 거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출마했으며, 그 중 거의 대부분의 선거에서 낙선한 경험이 있는 나는 이제 내성이 생겨서 선가라는 것이 한 번 욕심을 부려볼 만한 것이고 떨어지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여전히 출마라는 것이 일대의 고민이고, 낙선이 상당한 상처가 되기도 할 것이다.

군대 문제로 발목 잡히지만 않았더라면, 낙선을 각오 하고서라도 한 번 출마를 해봄직 했겠지만, 나는 이제 창창한 후배들이 동아리의 벅찬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하는 장면을 한 구석에서 카메라에 담는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낙선자와 함께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그 덧없어 보이는 도전의 가치에 대한 역시 덧없는 칭송을, 잔을 비울 때마다 되풀이 한 것이다.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시다,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고속도로를 타고 왔는데, 미터기 요금에 톨비가 합산되는 건지 어떤 건지도 나는 모르고, 또 새벽에 장거리를 타고 왔으니 3만원 가까이 나온 요금에 만원을 더 얹어 지불했다. 이거야 뭐 신촌에서 모텔 방 잡아 자는 게 나을 번도 했군.

내일, 정확히는 오늘 오후, 바이올린 마지막 레슨이다.

2009/09/08 05:26 2009/09/08 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