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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아프리카로...

2009/06/12 04:09 2009/06/12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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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 (1862~1918)

Suite bergamasque No.3 'Claire de lune(달빛)'


언젠가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면, 쳐보고 싶은 곡은 사실 베토벤이나 쇼팽보다는 드뷔시일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쉬울 것 같아서인 것도 있고.

너무나 유명한 이 곡은, 드뷔시가 1890년에 작곡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의 일부이다. 'Claire de lune'는 문자 그대로 '달빛'이란 뜻인데, 같은 의미의 한자어인 '월광'이라고도 부르나, 베토벤의 저 유명한 '월광 소나타'와 구분 짓기 위해서 사람들이 일부러 '달빛'이라 부르는 것 같다. 곡의 부드럽고 소박한 정서를 볼 때, '달빛'이라는 수수한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고.

흔히 '드뷔시'를 인상주의 작곡가라고 부른다. 미술사의 용어들을 그대로 가져다가 음악사에 적용시키는 것은 많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도무지 미술사상의 '인상주의'와 음악사상의 '인상주의'의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다(전통의 거부, 새로운 기법의 창안이라고 하는 과정상의 공통점을 논외로 치면). 공교롭게도 모네와 드뷔시는 성이 '클로드'로 같은데, 모네에 대해서는 '모네의 눈'을 칭송했지만, 드뷔시에 대해서는 대체 무얼 칭송할 수 있단 말인가? '드뷔시의 귀?'

사람들은 종종 '감각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을 착각하는 듯하다. 모네의 그림은 분명 모네의 마음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모네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드뷔시의 음악은? 애초에 음악을 통해 시각을 자극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얘기다. 무언가 눈에 보일듯 말듯 아른아른하게 작곡을 해 놓았다고 해서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인다면, 그건 좀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2009/06/10 03:48 2009/06/10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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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 11월에,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4학년생 멤버들이 모여 4回生オ?ケ(4학년 오케스트라)를 한다고 한다. 2006년 10월, 나는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입단했다. 그곳은 내 음악 생활의 원점 같은 곳이다. 입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오케스트라 전체 합숙 훈련에 따라가게 되었다. 이 오케스트라는 입단을 하더라도 실력에 따라 첫 한 두 학기 내에는 연주에 서지 못 할 수도 있다. 나는 실력 미달에, 그나마도 학기 중간에 불쑥 나타난 존재라 당연히 연주회 참가 대상이 아니었다. 바이올린 파트의 고토, 츠카모토, 테라노 등을 비롯하여 1학년생들 중 꽤 많은 수가 그렇게 연주회 참가 대상이 아니면서도 합숙 훈련에 따라가는 처지였는데, 이 합숙 훈련이라는 것이 철저히 정기 연주회를 대비한 훈련이라, 연주회에 서지 않는 사람들은 훈련 기간 내내 무료하다. 무료함도 달랠 겸, 그리고 초심자들은 실력 향상도 도모할 겸, 캠프 때는 1학년들만으로 이루어진 ‘1학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그리 어렵지 않은 곡을 연주했다.

그때 연주했던 곡이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과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서곡이었다. 당시 나는 도저히 두 곡을 모두 준비할 실력이 안 되어서,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 연주에만 참여했다.

이 1학년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고 이어진 것이 바로 4학년 오케스트라였다. 이제 졸업을 앞둔 4학년생들로만 이루어진 미니 오케스트라. 과연 지난 수 년 오케스트라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멤버들이라 1학년 오케스트라와는 풍기는 오라부터가 달랐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1학년 오케스트라들 사이에서는 거의 전설의 멤버였던 오자와, 히가시, 마츠바라 등 선배들도 아마 이때 연주에 참여했을 거다.

이것도 벌써 3년 전 이야기이다. 3년 전 1학년 오케스트라를 했던 이들, 4학년 오케스트라의 멋진 연주를 감탄하며 바라봤던 이들이, 이제는 4학년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이런 것인가 보다.

고토는, 혹시 가능하면 11월에 일본에 와서 함께 연주하지 않겠느냐고 제의 해 줬지만, 일이 예정대로 술술 풀리면, 난 그때쯤 입대하여 한창 훈련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일단 입영하면, 중간에 탈영이라도 해서 일본으로 밀항하지 않는 한 연주는 어림없는 얘기다. 사관후보생 선발 시험에 낙방하거든, 그때는 주저 없이 가겠지만 말이다.

나는 과거를 추억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아니다. 언제나 과거 보다는 현재가 중요하고, 추억에 잠기기보다는 미래에 대해 꿈꾸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는, 이따금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그리운 존재다. 내 음악 생활의 원점이자, 어쩌면 지금까지도 오케스트라를 지속하고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이끄는 에너지의 원천일 것이다.

과거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나도, 일본에서의 시절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때는 참 좋은 시간이었다.

2009/06/09 04:49 2009/06/09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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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딘의 현악사중주 2번 1악장. 지난 향상 연주회 때 어떤 팀이 연주해서 알게 된 곡이다.

만일 곡의 아름다움을, '선율에 어린 정서의 아름다움'이란 잣대로 평가한다면, 러시아 작곡가들의 곡들이 단연 으뜸을 차지할 것이다.

'미려(美麗)하다.' 연주는 보로딘 현악사중주단.
2009/06/07 05:25 2009/06/07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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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니아의 가을 정기 연주회를 향한 3개월의 여정이 시작됐다. 지난 번 향상 음악회가 끝난 자리에서, 가을 정기 연주회의 메인 곡이 발표되었다.

베토벤 교향곡 제7번.

지난 연주회 때 말러 1번을 연주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고 있노라면 거기에는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느껴진다.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대체로 특정 악장이나 초반에 어떤 음울함, 절망 같은 것이 짙게 배어있지만, 반드시 어느 순간 그것을 극복하고 환희를 향해 나아간다. 그 예정된 클라이맥스를 향해 고집스럽게 나아가는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끝없이 오만하고 자신감에 넘쳤던 베토벤의 인생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반면 말러의 음악에서는 그런 확신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말러 1번은, 절망과 희망이 수차례 교차하며, 천국의 정경과 지옥의 참경을 번갈아 가며 보여준다. 그리고 이 곡은 분명 ‘승리의 팡파르’를 울리며, 절망과 비애를 떨쳐내고 환희 속에서 마감한다. 그러나 그런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번민과 부침 속에서, 연주자도 청중도 그 종국을 가늠할 수 없다. 이 나약하고 가냘픈 영혼이 끝내 구원을 얻게 될 것인지! 평생을 광기와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죄책감 속에서 좇기 듯 살아야 했던 말러의 음악이, 의지와 확신으로 넘쳐났던 베토벤의 음악과 달리 회의와 번민, 갈등으로 가득하면서 그러나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한 줄기 희망을 그러안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베토벤의 음악은 기분이 좋다. 그리고 명쾌하다. 그의 음악에는 우리 모두를 이끌고 가는 어떤 힘이 있다. 대학 생활의 마지막, 유포니아에서 얻은 두 번의 연주 기회에 말러를 만나고 또 베토벤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베토벤 7번은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의 오프닝 곡이자 가장 중요한 메인 곡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클래식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다. 이 곡은, 드라마의 마지막 편에서 S 오케스트라의 멤버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터닝 포인트로 삼고 연주하는 곡이다.

개인적으로는 내 대학 생활을 정리하는 마지막 연주회이니, 내게도 끝이자 시작인 곡이 될 것이다.

연습은 오후 2시부터 시작하여 거의 저녁 6시까지 이어졌다. 첫 연습임에도 불구하고 전 악장을 모두 연주했다. 나는 제2 바이올린인데, 박자 세기가 어렵다. 그러나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음치이며 박치인 내가 지난 3년 9개월 동안 바이올린을 연습하며 그나마 음정은 그럭저럭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박자와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할 때인 듯하다.

한 가지 걱정이라면, 기말고사 이후 본격적으로 연습이 시작될 때에 나는 대학 시절의 마지막을 장식할 이집트 여행을 다녀오느라 연습에 많이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여행 전에라도 미리미리 연습을 해 두어야겠다.

오늘, 비록 첫 연습이라 호흡은 엉망이었지만, 그나마 소리가 좀 맞았던 2악장을 연주할 때에는 소름이 돋는 듯했다. 이 생생한 감동을 가지고, 연주회 날까지 연습에 매진하겠다.

2009/06/07 03:28 2009/06/07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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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스즈키는 그만 하고, 곡 들어가죠. 다음 시간에 모차르트 아델라이데 콘체르토랑 비오티 23번 악보 사오세요.”

긴 시간이었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지 3년 9개월. 드디어 ‘스즈키 교본’을 졸업했다. 뭐 말이 졸업이지, 전 10권의 교재 중 7권까지만 했고, 그나마 7권까지의 곡들을 모두 제대로 켤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니까.

스즈키 교본으로 보는 나의 바이올린 레슨 연대기


스즈키 교본들 그리고...

2009/06/02 02:54 2009/06/02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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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생신이라 대구에 다녀왔다. 가족은 토요일에 미리 내려가고, 나는 동아리 행사 때문에 일요일 아침에 내려가 점심만 함께 하고 다시 올라왔다. KTX 덕분에 전국이 한나절 생활권이 된 것은 분명 해 보인다. 다만 비좁고 딱딱한 좌석, 심지어 주행 방향과 반대로 놓인 역방향석 등을 보면, 대체 왜 KTX를 이따위로 디자인했는지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KTX에 역방향석을 설치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좌석 수를 늘리기 위해서다. 보통 전차의 좌석에는, 언제든 전차가 진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도록 회전 장치가 부착되어 있다. 그런데 의자를 회전시키려면 의자와 의자 사이에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아마 KTX의 도입자들은 그 공간이 너무 아깝게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장차 외국인들이 한국의 KTX를 이용함에, 대체 왜 역방향석이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표 더 많이 팔려고’라는 치졸한 경제적 구실을 이유로 댈 수밖에 없을 테니 얼마나 씁쓸한가. 이 나라의 윗사람들은 도무지 심미적 감수성이라는 게 없다. 게다가 요즘은 KTX가 거의 매 10분마다 있다. 이렇게 차가 자주 있는데, 그깟 실내 좌석 수 몇 개 더 늘리는 게 그렇게 중요했을까 싶다. 이제 좀 치졸한 경제 논리에서 벗어나서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외할머니께서는 지난 2월에 심근 경색증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으셨다. 다행히 외삼촌이 신속하게 병원으로 모시고 갔고, 재빨리 수술을 받아서 지금은 쾌차하셨지만, 그 당시엔 걱정을 많이 했다. 엄마는 연락을 받자마자 부랴부랴 대구로 내려갔지만, 나는 오케스트라 캠프와 할아버지를 모시고 떠나는 일본 여행 일정이 연이어 있어서, 전화 통화만 하고 직접 가보지는 못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욱 내려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외할머니께서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신 듯했다.

호텔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금호강이 바라다 보이는 카페에서 디저트를 즐긴 후,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이제 6월이다.

2009/06/01 02:33 2009/06/01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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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니아 향상 음악회가 열렸다. 단원들끼리 소규모로 그룹을 이뤄 평소 연주하기 힘든 실내악곡에 도전하는 자리다. 무슨 곡을 연주하든, 연습을 얼마나 하든, 자율에 맡겨지기 때문에 개중에는 정말 음악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하는 그룹도 있고, 단순히 친목 도모 차원에서 도전하는 그룹도 있다.

향상 음악회 참가를 망설이다가, 마지막 기회이니 그냥 놓쳐버리기에는 아까워서 동아리 내의 업무 그룹 중 하나인 ‘정보국(주로 동아리 홈페이지와 서버 관련 일을 담당하지만, 평단원들이 할 일은 거의 없다)’ 향상 팀의 초대에 덜컥 응해버렸다.

곡은 전에 밝힌 바 있듯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 라장조. 난 무엇이든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응하는 성격의 인간이 아니라서, 기왕 하기로 한 것이니만큼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 장교 시험을 코앞에 두고도 이번 한 주는 매일 학교에 나가 주로 바이올린 연습만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상블을 맞춘다는 것이, 내게는 영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저 메트로놈을 켜놓고 혼자 연습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손가락 굴리는 걸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의지하여 ‘합주’하는 것은, 오케스트라 연주에 두 번이나 참여하고서도 아직 어렵게만 느껴진다.

아무튼 내 성실성과는 별개로, 정보국 팀은 사실 ‘친목 도모’라는 목표에 충실해서, 음악의 완성도에는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곡 자체도 난이도는 매우 쉬운 편에 속했고, 우리는 몇 차례 모이지도 않았다. 연주자 전원이 모인 것은 연주 전 날이 유일할 정도. 그런데 참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향상 음악회에는 ‘시상’이 있다. 보통 유포니아의 선배 두, 세분을 심사위원으로 모셔 연주 평가를 받는데, 연주가 다 끝나면 이 분들이 연주에 대한 평과 함께 좋은 연주를 한 팀들에게 시상을 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번에 심사위원으로 모신 분 중 한 분이, 바로 유포니아의 창립자인 윤혜준 선배였다. 사실 이 분에 대한 호칭이 지금도 조심스럽고 어색한데, 나는 1학년 때 이 분의 음악사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윤혜준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자신이 창단했다는 ‘유포니아’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나는 연세대학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유포니아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당시 나는 막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무렵이었으므로, 감히 오케스트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지만, 대학생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가슴에 품었던 동경은 아마 오늘의 내가 있게 하는 데 크게 일조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몇 년이 지나 다름 아닌 그 오케스트라에 내가 속하게 되었으니, 사람의 일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윤혜준 선배님을 비롯, 심사위원의 평가로 시상이 거행되었다. 사실 동아리 내부에서 서로 친목을 다지고 즐기며, ‘가능하다면’ 실력 향상도 꾀해보자는 자리인 만큼 상을 받는다는 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고, 별 의미도 없다. 하지만 애나 어른이나, 대학생이나 직장인이나, 사소한 것이든 큰 것이든, 의미가 가벼운 것이든 중한 것이든, 상을 받아서 기분 좋아지지 않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도전 팀들 중에는 간혹 노골적으로 상 욕심을 드러내는 팀도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정보국 향상 팀이 금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금상은 대상 바로 아래 상이다. 심사위원의 평은, 음악적 완성도도 높고 팀워크가 잘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벼락치기 팀이나 다름없었던 정보국 팀이 ‘팀워크’를 논할 자격이나 되나 싶었지만, 주어진 시간과 멤버들의 실력에 적절한 곡을 선정하여 무난한 연주를 해 낸 것이 평가를 받은 것 같다. 물론 난 실력면에서 ‘프리 라이더’에 가까웠다고 생각하지만.

윤혜준 선배님의 ‘앙상블에 대해 생각해 볼 것’들에 대하여 꽤 길게 언급 해 주셨는데, 다 새겨들을 만한 것들이었다. 과연 연주 그룹에 있어 ‘리더’는 존재하는지. 만일 리더가 존재한다면 항상 한 사람이 리더인지, 혹은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리더가 될 수 있는지. 연주에 무게 중심이라는 것이 있는지. 과연 무게 중심은 항상 리더에게 위치하는지.

동양 사상에서 예(禮)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분별을 위해 존재하고, 악(樂)은 사람과 사람을 화합하게 만든다고 여긴다. 그런데 화합하는 방식에도 또한 예(禮)가 존재하는 것 같다. 예를 준수하여, 서로의 역할을 잘 분별하고 옳은 방식으로 기여를 해야만 진정 화합하는 악(樂)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번 향상에 참여함으로써 남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알게 된다는 이치를, 조금이나마 깨칠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던 것 같다.

2009/05/31 03:52 2009/05/31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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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문 전문

2009/05/29 03:36 2009/05/29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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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에는 한때 밀라노 공국을 지배했던 스포르차 가문의 웅장한 성채가 있다. 포(砲) 이전 전쟁의 유물인 이 성은, 어중간한 기백은 압도해버리는 높은 성벽이 인상적이다. 벽돌로 탄탄하게 쌓아올린 성벽 둘레에는 해자(垓字)가 깊게 파여 있다. 그 성채 앞에 서서 나는 생각했다. 대체 이러한 성채는 왜 만든 것일까?

성벽의 목적은 당연히 방어이다. 그러나 웅장한 성채라고는 해도, 전투를 몇 번 치러낼 수 있을지언정 전쟁을 치러낼 수는 없는 규모다. 성채를 이만큼 확장하고 개축한 스포르차 가문은 프랑스의 공격에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런 ‘하찮은’ 방벽은 전쟁 앞에서는 무력하다.

이러한 성채는 외적, 즉 적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외적을 생각하고 세운 것이 아니라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지배 가문이 내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내부의 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신과 국민이다. 이토록 튼튼해 보이는 성체는 사실 불안한 정치 기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20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약 군주가 외세보다도 신민을 더 두려워한다면, 그는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군주가 외세보다도 신민을 더 두려워해야만 하는 형편에 처한다면, 그 지배자의 미래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다.

‘로마사 논고’ 제2권 24장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통치자)의 사악한 행동은 강제로 백성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나 통치자로서 그가 지닌 경솔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강제로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원인들 중 하나는 그가 백성들을 제압할 수 있는 성채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설령 당신이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어도 약탈당한 백성들에게 무기는 남겨져 있을 것이고 만약 당신이 그들의 무기마저 빼앗는다면 분노가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들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계속해서 다른 나머지 사람들도 해친다면, 마치 히드라의 머리처럼 그들의 머리가 또다시 생겨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군주에게 최선의 요새는 그의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군주론)”라고.



시청 앞 광장은 내가 학교 가는 길에 언제나 지나치는 장소이다. 현 정부 들어서 이 광장이 철옹성으로 변모한 것을 목격한 것만 몇 번이었던가. 저 성벽은 누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일까.

분명 민의(民意)라는 것은 항상 옳지만은 않다. 다수의 판단이란 흐름과도 같은 것이며, 집단 지성이라는 것은 때론 중우(衆愚)에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공포에 질려 절벽으로 뛰어드는 소떼들처럼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해 걸었다.

따라서 치자(治者)는 항상 민의(民意)에 따라서만 통치를 할 수 없다. 때로는 다수의 뜻에 반하여 의지를 관철시키고, 방향을 새로 설정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민은 다스림의 대상이며, 민은 국가 그 자체이다. 민과 싸우는 ‘정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소수의 권익만이 보호되는 성벽의 안쪽, 한 줌의 땅 위에 민은 살지 않는다. 그것을 어찌 나라라 부를 수 있을까? 설령 그 안에 무장한 이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남면(南面)한 채 앉아있는 이가 있다고 한들, 그가 어찌 치자(治者)일 수 있겠는가?

나라 안의 작은 성채는 언제나 사(私)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그 안에서 언제나 사사로운 이익만을 생각하는 무리들이 바로 한비자가 말하는 ‘나라를 좀먹는 벌레의 무리들’인 것이다.

2009/05/28 03:48 2009/05/28 0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