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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이 없기에 떠날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미련이 있어 떠나는 것이다.

2009/09/05 21:30 2009/09/0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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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2009/09/04 12:00 2009/09/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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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9월 4일 금요일 저녁 7시
장소: 연세대학교 대강당

프로그램:

-1부-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
베토벤 삼중 협주곡

-2부-
베토벤 교향곡 7번

2009/09/03 04:57 2009/09/03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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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명동에 갈 있었는데, 그때 대한음악사에 잠깐 들러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론도’의 악보를 사왔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Rondo for Violin and Orchestra in C-dur, K. 373

이 곡은 단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바이올린이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엄밀히는 ‘협주곡’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보통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하면, 각각 쾨헬 넘버 207, 211, 216, 218, 219가 붙여진 총 5개의 협주곡을 떠올리게 된다. 서로 가까운 숫자들의 나열이라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 5개의 협주곡이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게다가 모차르트의 말년 작품 번호가 600대이니, 200대 초반의 번호가 붙은 곡들이라면 겨우 35년에 불과한 모차르트의 생애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작곡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부터 5번까지는 모차르트가 겨우 19세였던 1775년 4월부터 한두 달 간격으로 완성되어, 같은 해 12월까지 약 9~10개월 만에 모두 작곡이 완료되었다. 협주곡 1번의 작곡 시기가 1775년 4월이 아니라 1773년 4월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상당히 신빙성이 있지만, 2번부터 5번이 1775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모두 작곡된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토록 짧은 시간동안에 작곡되었음에도 협주곡 3, 4, 5번은 바이올린 협주곡 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며, 오늘날 수많은 전공생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는 ‘교재’이자, 프로 연주자들이 사랑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어있다. 이를 보면 정말이지 모차르트에겐 작곡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조차 필요치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이야 여기서 새삼스럽게 떠들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한 가지는 어째서 5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한 것이 한 시기에 집중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더불어 1775년 이전이나 이후에는 정말 모차르트가 쓴 바이올린 협주곡이 단 한 곡도 없는 것일까?

전자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언젠가 내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시작하게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후자의 의문점을 해결 해 보도록 하자.

우선 1775년 이전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없을까? 1933년이었던가,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였던 마리우스 카사드쉬라는 사람이 ‘모차르트의 사라진 바이올린 협주곡을 발견했다’며 세상에 악보 하나를 공개했다. 그것이 ‘아델라이데 협주곡’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협주곡으로, 카사드쉬의 주장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10살 때쯤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곡은 세상에 발표된 직후부터 줄곧 위작 논란에 시달렸고, 결국 현재는 이 곡이 카사드쉬의 위작이라는 것으로 잠정 결정이 난 상태이다.

그렇다면 1775년 이후에 작곡한 협주곡은? 사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6번과 7번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이 줄곧 1775년 이후에 작곡된 모차르트의 협주곡이라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재는 이 두 작품도 모차르트의 작품이 아니라 위작이라는 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위작으로 여겨지는 아델라이데 콘체르토와 6번, 7번 협주곡을 제외하면, 3악장 구성으로 완벽하게 쓰인 협주곡은 더 이상 없다. 아마도 모차르트는 1775년 불과 몇 달 사이에 정열을 쏟아 부어 5개의 협주곡을 작곡한 뒤로는, 더 이상 이 장르에 미련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전 악장을 갖춘 완전한 협주곡이 아닌, 단악장으로 된 것들이라면 1775년 이후에 작곡된 것도 몇 개가 있다. K 261, 269, 373이다. 사실 이 곡들은 독립된 악곡으로 작곡된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가 자신이 이미 작곡 해 놓은 협주곡들의 일부 악장을 대체할 목적으로 작곡한 것이다. K261번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다지오’란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본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의 2악장을 대체할 목적으로 작곡되었다. K269번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론도’인데, 이것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의 3악장을 대체하기 위해 작곡했다.

오늘 소개하는 K373번은 조금 특이하다. 이 곡은 단악장짜리 곡이지만 모차르트가 자신이 작곡한 협주곡의 한 악장을 대체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작곡 시기는 1781년 4월로 되어 있다. 이 곡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해 온다. 모차르트가 빈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친분이 있는 귀족(혹은 대주교의 아버지?) 저택에서 음악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 연주회에서는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브루네티와 대주교 궁정 오케스트라가 협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연주할 협주곡의 3악장에 문제가 있었다.

일설에는 3악장이 통째로 없어졌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애당초 그런 곡이 선곡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곡에 대해 까다로워 작곡가들에게 수정 권고도 서슴없이 했던 안토니오 브루네티가 3악장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사실 모차르트의 K261이나 K269도 브루네티의 권고에 따라 작곡하게 된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무튼 결국 3악장을 새로 작곡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모차르트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곡은 소위 말하는 ‘땜빵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작곡된 C-Major의 론도는, 경쾌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명곡이다. 비록 길이는 짧고 구성도 간결하지만, 오케스트라 반주 위로 떠오르는 솔로 바이올린의 유려한 주제 선율은 일품이다.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모차르트는 역시 모차르트다.

악보는 피아노 반주보가 딸려서 가격이 약 2만 5천원정도 한다.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은 겨우 4페이지(양면 인쇄로 1장!)의 솔로 악보인데, 억울하단 느낌도 든다. 악보에는 손가락 번호가 꼼꼼히 쓰여 있어 매우 친절 해 보이지만, 따라 짚어보면 결코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어렵게 만들어놨어.

아무튼 언젠가는 멋지게 연주 해 보고 싶은 곡. 누군가 피아노 반주를 해줘야 할 텐데…….

2009/09/03 04:41 2009/09/03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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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의 증상은 약간의 수면부족, 약한 두통, 만성적 피로, 가벼운 우울증, 권태로움, 무기력. 방학은 어디까지나 임시 처방일 뿐 완전한 치료제가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매 개강과 방학마다 증상의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졸업장’이라는 사망 진단서를 받게 되겠지. 그 이후 부활이 가능할지는 미지수.>

2008학년도 1학기 개강 직후에 쓴 일기에 이렇게 적어 뒀더군. 오늘 그 사망 진단서를 발급 받아다가 모병관에게 등기로 발송했다. 군대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연주회 끝나면 뒤풀이 가서 인공호흡기를 떼고, 부활은 군대에서 하겠다.

개강 첫 날의 학교 풍경은, 겉보기엔 활기찼다.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개개인들은 극심한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실 지난 학기부터 졸업생이나 다름없는 기분으로 지내긴 했지만, 그래도 느낌이 다르다. 캠퍼스는 내게 언제나 낯선 공간이었지만, 한층 더 낯설게 느껴져.

레슨 받았다. 다음 주면 마지막 레슨이다. 이 선생님과도 벌써 2년 가까이 함께했군. 비좁은 방들이 늘어선 삭막한 학원은 그리 정이 가는 장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포니아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후 다시 도전 하여 입단하기까지 1년 간, 학기 중에는 그야말로 매일 같이 드나들던 곳이었지. 비좁은 방에 에어컨과 온풍기가 갖추어져 있어서 여름이든 겨울이든 가리지 않고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사람으로부터도 공간으로부터도, 이렇게 작별하고 떠나가게 되는군.

2009/09/02 03:03 2009/09/0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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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오늘이 개강이라는군...

근데 그게 뭐야?

2009/09/01 04:40 2009/09/0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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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졸업했다. 유포니아 바이올린 파트 사람들과 한 컷. 솔직히 말하자. 나는 중증의 인간 혐오증 환자다. 하지만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나 같은 사람이 ‘동료애’나 ‘우정’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이기심이고 위선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들은 내게 대학 생활 마지막에 최고의 1년을 선물 해 주었다(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최고의 졸업식도). ‘음악을 즐기고 싶다’는 마음만 앞섰지 실력은 턱없이 부족한 내가 정말 음악을 즐기고 싶은 만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순전히 이 ‘동료들’ 덕분이다. 실력상 도저히 멋진 연주로는 보답을 못 하겠고, 그저 성실한 모습을 보이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마음의 짐은 늘 있었고, 지금도 지고 가지만, 이들의 성취를 지켜보면 흐뭇해진다. 예전에 이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따금 대강당 복도에 홀로 남아서 읽기도 힘든 악보를 펼쳐놓고 더듬더듬 켜고 있노라면 마치 거대한 호숫가에 앉아서 돌멩이를 하나씩 집어 던지고 있는 것 같은 막막함과 절망감이 느껴졌노라고. 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연주를 할 때면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나 역시 한 사람의 선원으로서, 여러분들과 함께.

저 꽃다발은 후배 애들(근데 기수로 치면 동기!) 몇 명이 돈을 모아 사준 것인데, 그만 뒤풀이 장소에 놓고 와버렸다. 나답지 않게 취했던 걸까. 꽃은 시드는 것. 그러나 나는 시들지 않는 그 무엇을 얻어가노라고 믿고 싶다.

2008년 8월 28일.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 진짜 졸업식은 9월 4일 연주회 날이다.

2009/08/30 06:40 2009/08/30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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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스 포에버(Callas Forever) (2002년 작품, 2007년 한국 개봉)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Franco Zeffirelli)
출연: 화니 아르당(Fanny Ardant),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

며칠 전 우연히 TV에서 방영하기에 보게 된 영화.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세련되지 못 한 영상과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이야기 진행에 채널을 돌려버릴 뻔도 했지만, ‘마리아 칼라스’라는 그 이름 하나 때문에 끝까지 보았다.

음반(recode)의 역사는 100년 남짓이다. 1902년에 녹음된 카루소의 음반이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된 이후로부터 정확히 한 세기 동안이 클래식 음반의 흥망성쇠가 망라된 시대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클래식 음반 산업의 분명한 쇠퇴를 목격하고 있다.

음악은 불멸할 것이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고,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때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경지에서 출발하는 출중한 연주자들도 계속 배출될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 음반 산업이 사장(死藏)되는 것을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이제는 노쇠한 거장들이 젊은 연주자들에게 거침없이 쏟아내는 찬사는 차라리 애처롭게 느껴진다. 앨범의 속지는 점차 화보(畵報)처럼 변해간다. 베토벤 교향곡 녹음은 시중에 수백 종이 나와 있다. 클래식 애호가의 자식은 부모로부터 베토벤 5번 녹음을 열 장쯤 물려받을 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앨범 컬렉션에 11번째 녹음을 추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한 시대의 쇠퇴기에 이르러 비로소 역사는 정리될 수 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무언가 쇠락해가는 쓸쓸한 시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위안거리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우리에겐 역사가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사실 죽은 자에 대한 숭앙, 영웅화와 신격화, 이런 것도 하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할 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아무튼 클래식 음반의 역사는 완결되었다. 이제 이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진정한 신화(神話)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카라얀이 그렇고,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그러하며,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가 그렇다. 이들이 과연 가장 뛰어난 지휘자, 성악가, 연주자들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었다.”고.

마리아 칼라스 역시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승자’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1922년에 태어났고 1942년에 데뷔했다. 1949년에 첫 앨범을 냈고, 1965년에 은퇴해 그 후로 일체의 음악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음반을 내며 활동한 시기는 채 20년이 되지 않지만, 리코딩의 역사에 금자탑을 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앨범은 현재까지 약 3000만장 정도가 팔렸는데, 성악가 중에서 마리아 칼라스보다 더 많은 음반을 팔아치운 사람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유일하며, 여자 성악가 중에서는 마리아 칼라스에 견줄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

‘칼라스 포에버’의 배경은 1977년. 마리아 칼라스가 은퇴한 때로부터 12년이 흐른 시점. 이야기는 음반 제작자인 래리가 은퇴한 칼라스에게 새로운 음반 제작을 제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음색도 쇠락하고 만 칼라스는 극구 거절하지만, 래리는 새 시대에 걸맞은 ‘오페라 비디오’ 제작을 제안하며, 노래 문제는 과거에 그녀가 녹음한 앨범에서 음원을 가져와 ‘립싱크’로 찍어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러면서 래리는 그녀의 예술적 열망을 은근히 부추기는 노련한 설득의 기술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픽션이다. 역사적으로 1977년은 칼라스가 화려하게 복귀에 성공한 해가 아니라, 그녀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영화의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는 한 때 칼라스와 함께 오페라 연출 작업 한 적이 있는 만큼 그녀와는 친분이 깊고, 사실 누구보다도 칼라스의 재능을 아꼈던 사람이다. 이 영화는 철저히 프랑코 제피렐리의 시각에서 마리아 칼라스를 재해석하고 추모하는 하나의 추증작이다.

영화 속에서 칼라스는 래리의 설득으로 결국 복귀를 결심한다. 복귀작은 그 어떤 오페라보다도 여주인공의 정열이 돋보이는 비제의 ‘카르멘.’ 너무 오래 무대와 떨어져 있었던 칼라스에게는 립싱크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정열적인 삶을 산 여인 카르멘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칼라스는 점차 과거의 열정을 되찾는다. 그녀는 점점 연출에 관여하고 싶어 하고, 안무에 관심을 쏟고, 출연진과 연출자들을 다그치며 과거의 영화를 재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작품 속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잘생긴 청년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까지 느끼며, 칼라스는 50이 넘은 자신의 나이를 잠시 잊는다.

카르멘의 촬영은 대성공으로 끝난다. 카르멘의 공개를 앞두고 래리는 발 빠르게 칼라스와의 다음 작품 구상에 나서지만, 칼라스는 래리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라 트라비아타를 찍자는 래리에게 칼라스는 말한다. “하지 않겠어.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토스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푸치니의 토스카. 마리아 칼라스가 1953년 이 오페라를 처음 녹음한 음반을 내놓은 후, 그 음반은 불멸의 명반이 되었으며, 오페라 토스카의 영원한 결정반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리고 1965년, 은퇴 직전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마리아 칼라스가 맡은 배역이 또한 토스카였다. 마리아 칼라스와 토스카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칼라스는 이번에는 립싱크가 아니라 직접 자신이 노래도 다시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가짜가 아닌 진짜로, 엔터테이너가 아닌 예술가로서 대중 앞에 당당히 서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미 노쇠해버린 그녀의 목소리는 칼라스에게 그런 새로운 기회를 안겨줄 수 없었다. 칼라스는 결심을 한다.

“부탁 한 가지가 있어. 당신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야. 카르멘 영상을 폐기 해 줘.” 이번 작품 제작에 50%의 지분을 투자한 래리로서는 정말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결국 래리는 ‘진실한 예술가’로 남고자 한 칼라스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한다.

자, 마리아 칼라스가 연기한 ‘카르멘’이 어떠했는지, 거짓 아닌 그녀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보자.



사실 칼라스의 음성은 사람들이 흔히 ‘미성(美聲)’이라 부르는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목소리에 단순한 음악적 기교 이상의 어떤 인생의 깊이를 담아내는 진정한 ‘연극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은 대부분 순탄한 인생과는 거리가 멀다. 카르멘도 그러하거니와 토스카도 그렇다.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가족도 음악도 버리다시피 했지만, 결국 그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인생은 어차피 불완전하다. 오페라는 이 불완전한 삶에 대한 모사다. 마리아 칼라스의 약간의 불완전성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인생의 불완전성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영화 마지막, 칼라스는 평범하게 한 사람의 여자로서 살았다면 훨씬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그저 ‘가지 않은 길’을 동경하는 넋두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커리어의 정점에서 은퇴하고 진정 한 사람의 여자로서 한 남자의 사랑을 바랐던 칼라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대사는, 아무리 픽션이라 하더라도 흘려들을 수 없는 무게감을 지니고 우리의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사람, 래리 켈리. 그는 탁월한 선구안과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프로듀서이며, 예술가들의 까다로움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의 소유자이다. 거기에 교묘한 설득의 기술까지 갖추고 있다.

사실 이 래리 켈리란 인물은 마리아 칼라스와는 달리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가공의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인물을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자신을 투영하여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믿는 듯하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칼라스의 예술적 재능을 아꼈고, 그녀의 은퇴를 누구보다도 아쉬워했으며, 비교적 이른 칼라스의 죽음에 누구보다도 애통함을 느꼈던 사람이 바로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영화 속 래리는 칼라스에게 복귀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녀가 다시 한 번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도록 돕는다. 결정적으로는 진실한 예술가로 남기로 한 칼라스의 바람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칼라스 포에버’의 최고의 조력자로 그려진다.

사실 나는 래리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여러모로 래리라는 캐릭터와는 상반되는, 실존한 음반 제작자 월터 레그다. 월터 레그는 EMI의 음반 프로듀서였다. 그는 예술가들의 재능,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에는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하 직원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티스트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엘범의 ‘창조자’라고 여겼던 그는, 어떤 점에서는 영화 속의 래리처럼 배짱이 있고 오만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매우 호감형 외모에 때때로 근사하고 달콤한 말도 늘어놓을 줄 아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게이’였던 래리와는 달리 월터 레그는 비교적 통통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성격은 훨씬 더 보수적인데다가 한층 더 오만했다. 그는 동료가 친근감의 표시로 자신의 어깨를 툭 치는 가벼운 접촉조차 참아내지 못 했다. 월터 레그는 보수적이고 엄격한 사내 분위기로 유명했던 EMI에서도 그 정점에 선 인물의 하나였다. 여러모로 래리 켈리의 캐릭터는 EMI보다는 차라리 데카에 가깝다.

레그는 일찌감치 마리아 칼라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1953년 그녀와 함께 토스카를 녹음했으며, 이 앨범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이 팔리는 토스카 앨범이 되었다. 이후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의 커리어 동안 오직 레그와만 함께 작업 했다.

레그의 오만함과 그의 독자적 행보를 견디다 못 한 EMI는 그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 앨범이 제작된 1964년이었다.

우리는 종종 앨범의 역사를 생각 할 때에 예술가들에게만 너무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음반 제작사나 프로듀서들의 역할을 간과하고 만다. 사실 위대한 음반들은 프로듀서들의 예민한 촉각과 불굴의 의지로 제작되었다. 또 그 이면에는, 아티스트들을 하나의 신화로 포장하는 제작사의 교묘한 홍보 전략도 숨어있고 말이다.

레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단언하건데 예술의 영역에서 위원회라는 것은 전혀 쓸모가 없다. 필요한 것은 카라얀, 커쇼,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이다.”라고. 레그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레그와 카라얀. 이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 있지만, 카메라의 초점은 카라얀에게 맞춰져 있다. 세상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비슷하다.>

영화 자체의 구성만 놓고 보면 그리 높이 평가하기 어렵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굴곡진 인생과 음반사에 남겨놓은 그녀의 업적을 추모하고, 또 아티스트 뒤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한 세기 동안 리코딩의 역사를 이끌었던 프로듀서들의 존재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한 번쯤 볼만한 영화라고 하겠다.

2009/08/30 06:04 2009/08/30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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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2일, 김포시의 ‘고촌교회’에서 열린 ‘청소년 오케스트라 평화 음악회’에 유포니아가 초청되어, 연주를 하고 왔다. 이 교회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다양한 악기를 가르치고 있는데, 장차 사회인이 되어서도 악기 하나쯤 다룰 줄 아는 멋진 어른이 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던가. 표면적으로는 연세대학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인 ‘유포니아’가 이들의 ‘롤 모델’로 적합하다는 이유에서 초청을 받은 것이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교회 목사의 자제가 유포니아의 단원이라는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연주곡은 우리가 9월 4일 연주회를 위해 지난 7월부터 꾸준히 연습 해 온 ‘베토벤 7번’의 전 악장. 초청 팀이라 연주는 맨 마지막에 했다. 리허설 끝나고 늦은 점심을 먹은 다음에는 할 일없이 시간을 보냈는데, 대기실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어린 학생들의 공연도 감상할 수 있었다. 바이올린 팀, 첼로 팀, 플루트 팀 등 교회에서 음악을 배우는 아이들의 공연이 이어진 다음에는, 본 공연이라고 할 수 있는 ‘김포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있었다.

비제 아를르의 여인 중 ‘파란돌’, ‘클래식 메들리’, 드보르작 ‘신세계 교향곡’ 4악장 등을 연주했는데, 스크린을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의 볼륨이 너무 작아서 연주의 질에 대해서는 뭐라 할 수 없었지만, 진지한 자세만큼은 일품. 유포니아 단원들이 출동해서 금관, 퍼커션, 베이스 파트 객원을 뛰기도 했다.

유포니아는 초청팀인 만큼 맨 마지막에 연주를 했다. 소리가 너무 울리는 생소한 환경에,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갑자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게 된 데에 대한 부담이 긴장의 요인으로 작용했는지 초반 앙상블이 좋지 않았다. 1악장 비바체 들어가는 순간에는 내가 다 진땀을 흘렸을 정도. 객석과 정면 승부를 벌여야 하는 목관의 고충을 생각하면, 내가 언제나 묻어갈 수 있는 바이올린 주자라는 사실이 정말 감사하게 느껴진다.

베토벤 연주가 끝난 뒤에는 잠시 인사(人事)의 긴 일장연설이 이어지고, 이어서 김포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아이들이 유포니아와 합류하여 마지막 앙코르 곡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했다.

연주 단체에 있다 보니 이런 생경한 장소에서 연주를 하는 재밌는 경험도 해 본다.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결코 찾아오지 않았을 소중한 기회들이다. 지금까지도 종종 생각나는 즐거운 체험 한 가지가 있는데, 2007년도 오사카 대학 졸업식에서 졸업 축하 연주를 했던 일이다. 내 대학 졸업식도 아니고 바다 건너 일본의 모 대학 졸업식 축하 연주를 하게 되다니, 어디 인생에서 예상 가능한 일이던가. 당시 연주했던 곡은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서곡’이었다. 하긴, 당시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연주’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 그냥 자리만 채웠을 따름이지만, 지금까지도 참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마 고촌 교회에서의 연주도 그런 고마운 추억 한 가지로 남을 것이다.

2009/08/30 06:01 2009/08/3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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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음악/음악감상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이, 벌써 여름은 저만치 물러가고 가을이 가까이 오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브람스에 빠져있다.

 “자유롭지만 고독하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오늘 소개할 곡은 The Variations on a Theme by Haydn Op. 56a(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번호 56a)이다. 이 곡은 1873년 여름에 작곡되어 같은 해 11월에 브람스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편성은 2관 편성.

이 곡은 이미 제목만으로도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 해 주고 있다. 우선 곡의 형식이 ‘변주곡’이라는 것. 이 ‘변주곡’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하다. 그런데 변주곡이 대체 무엇이란 말이지?

본래 변주(變奏)란, 어떤 선율을 여러 가지 작곡, 연주 상의 기법을 사용하여 변화시켜 나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변주’의 방식으로 곡 전체를 구성한 것이 이른바 ‘변주곡’으로, 악곡의 주제 선율을 시종 다양한 기법으로 변주해 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변주곡은 상당히 자유로운 작곡 형식이다. 기본적으로 변형을 할 원형의 멜로디(주제)가 초두에 제시되는 것은 당연한 약속 같은 것이지만, 이후에 어떤 식으로 몇 번 변주가 이루어질 것인가는 전적으로 작곡가의 개성에 달려있다.

이런 변주곡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명곡들로는 하나의 선율을 무려 30번 변주하여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기교를 이용한 변주의 진수를 보여주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 그리고 바로 이 카프리스 24번의 주제 선율을 이용하여 전혀 새롭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관현악판 변주를 들려주는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광시곡’,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등이 있다.

브람스 역시 변주곡 형식의 곡들을 남기고 있는데, 오늘 소개할 ‘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변주곡 역사에서도 각별한 위치를 지닌 곡이다. 대체로 변주곡은 장대한 심포니나 모음곡 같은 비교적 규모가 큰 악곡의 한 악장으로 작곡되는 것이 통례다. 그런데 ‘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변주곡 형식이면서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작곡된 최초의 관현악곡인 것이다.

사실 이 곡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먼저 작곡되고, 오케스트레이션은 나중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버전이 먼저 공개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먼저 작곡된 피아노 버전이 오케스트라 버전에 밀려 작품 번호 56b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다시 한 번 곡의 제목으로 돌아가 또 다른 정보를 탐색 해 보자. 곡 초반 2분가량 제시되는 이 근사한 주제 선율이 어디에서 얻어졌을까? 곡의 제목은, 이 주제 선율이 하이든의 작품에서 가져온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율이 정말 하이든이 작곡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Haydn, Divertimento in B-dur 2nd mov.

하이든의 디베르티멘토 1번으로도 알려진 곡의 2악장이다. ‘Chorale St. Antoni(성 안토니의 성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여기의 멜로디는 분명 브람스가 변주에 사용한 멜로디가 맞다. 그러나 이 곡을 정말 하이든이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오늘날에는 오히려 다른 작곡가의 작품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그러나 설령 이 희유곡을 하이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작곡했다 하더라도, 과연 그 제3의 작곡가가 주제 선율을 작곡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성 안토니의 성가’라는 제목이 그런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지만, 지금까지는 이 부제와 관련하여 주제 선율의 근원을 밝혀줄 어떤 추가적인 정보도 발견되지 않았다.

여전히 미스터리인 아름다운 주제 선율이 제시된 뒤, 이후 이 주제가 총 8번 변주된 다음, 피날레로 마감한다. 8번에 걸쳐 다양한 시대의 기법들로 폭넓은 변주를 들려주는데, 각각의 변주가 모두 개성 넘치고 아름답다. 개인적으로는 정열적이면서도 유려한 1번 변주가 마음에 들지만, 여러분들의 선택은 어떨지?

본래 하나의 곡으로 쉼 없이 연주되는 이 곡을 변주별로 쪼개서 올린 것은, 각 변주간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통째로 된 파일의 용량이 커서 안 올라간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 대충 보니까 파일 크기가 10메가가 넘어가면 업로드가 안 되는 것 같다. 이건 텍스트큐브 자체에 걸려있는 제한인 걸까? 이래서는 용량 6기가의 서버를 사용하는 의미가 없다. 어떻게 수정이 안 되나.

지휘는 토스카니니.

2009/08/30 05:25 2009/08/30 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