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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을 만큼 치밀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의 하루는 아침 6시, 알람 소리를 들으며 기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나면 컴퓨터를 켜고 적당한 음악을 재생시킨다. 그리고 현관에 붙어있는 조그만 부엌으로 가 두 팔을 걷어붙인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프라이팬을 달궈 간밤에 해동 해 놓은 고기나 생선을 구을 준비를 한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한 끼 분량을 도시락 통에 옮겨 담는다. 밥이 다 되기를 기다리는 사이 옷을 갈아입는다. 간밤에 널어놓은 운동복도 챙긴다. 대충 나갈 채비를 마쳤으면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30분 정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밥이 다 되었다는 신호음이 들리면 뜸이 들도록 몇 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도시락 싸기를 마무리한다. 이제 출근 준비가 끝났다. 7시 10분쯤 방을 나선다.

일과

출근을 하면 근무복으로 갈아입는다. 내 책상 위에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써온 독서대를 가져다 놓았다. 책장을 고정하는 지지대 나사가 헐거워져서 원래 나사가 있던 자리 옆에 새로 구멍을 뚫어 나사를 옮겨 박았을 정도로 이제 제법 세월이 느껴지는 독서대다. 요즘 일과 시간에는 이 독서대 위에 주로 주자의 ‘대학장구’가 올라간다. 한글은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 한문으로만 쓰인 책이다. 일과 시간 중에 틈틈이 문장을 베끼며 구조를 익히고 뜻을 새긴다. 종종 책을 중국어 어학책으로 바꾸고 중국어 문장을 외우기도 한다.

도서관

5시에 퇴근을 하면 간단히 저녁을 먹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한 시간 정도는 필요한 공부를 하고, 한 시간 정도는 아무 책이나 내키는 대로 골라잡고 읽는다. 8시쯤 도서관을 나선다.

바이올린

뉴질랜드 여행 후에도 한 주 더 레슨을 쉬었다. 연습에는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복귀했지만, 브루흐를 연습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생상스의 ‘백조’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차이코스프키의 ‘칸초네타(협주곡 2악장)’ 같은 소품들을 주로 연습했다. 이번 주에 오랜만에 레슨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여행의 여파가 좀 느껴진다는 핀잔을 들었다. 다음 주에는 브루흐 연습에 더욱 매진해야겠다. 요즘에는 9시 50분쯤 연습을 마무리한다.

운동

최소 6시간의 수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운동은 10시 10분부터 11시 10분까지 딱 1시간만 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운동을 하다보면 시간이 좀 오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잽과 스트레이트 시에 어깨에 잔뜩 들어가던 힘이 어느 정도 빠지고 나니, 관장님께서 이제는 훅과 바디도 열심히 연습해야 할 때라고 충고를 해 주었다.

서예

매주 목요일에는 공주의 한문 교실을 찾아 한문과 서예를 배우고 있다. 주자의 대학장구를 텍스트로 선정했는데, 나는 벌써 대학의 본문을 5장까지 외웠건만 진도는 ‘대학장구서(주자가 대학을 새로 편집하면서 붙여놓은 서문)’에 머무르고 있다. 다음 주에는 본문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한자로 쓰인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정말 희열이 느껴지는 일이다. 지식의 경계가 넓어지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제 비로소 나는 까막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내 텍스트에는 토가 달려있지 않다. 나는 문장의 의미만 파악할 수 있으면 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데(한문도 완전한 문장이다. 우리가 영어 문장에 토를 달아 읽지 않듯, 한문 문장에도 토는 필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선생님께서는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도 토는 매우 중요하다고 믿고 계신 것 같다. 아무튼 선생님께서 문장을 읽어주시고 순서대로 해석하며 뜻을 설명 해 주신다. 종종 나에게 문장을 읽고 해석 해 보라고 하시는데, 나는 예습을 착실히 해가는 학생이라서 한자를 못 읽거나 문장의 뜻을 전혀 엉뚱하게 해석하는 참담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토를 틀리거나 문장의 큰 뜻을 파악하는 데 별로 지장이 없어 보이는 몇 개의 한자들을 정확히 해석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가령 以, 所 같은 애매한 한자들) 선생님께서는 놓치지 않고 지적을 하신다.

대학 수업이 끝나면 다음은 글쓰기 연습이다. 지난 목요일에 구양순체 초급 교본을 받아 처음으로 ‘한 일(一)’자를 써보았다. 선생님께서 쓰신 글씨는 정말 아름다운 ‘한 일’이었는데, 내가 쓰는 한 일자는 꼭 닭다리 뼈다귀의 형상이다. 펜글씨도 제대로 못 쓰는 천하 악필인 내가 붓글씨라니! 바이올린 활을 처음 쥐었을 때와 같은 막막함이 느껴졌다. 바이올린이야 멋도 모르고 시작했으니 어찌어찌하여 6년을 넘게 해오고 있으나 앞으로 또 붓을 잡고서 그 지난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망스럽기도 하다.

오페라

지난 금요일에는 바이올린 선생님이 소속되어있는 연주 단체가 연주하는 오페라를 보러갔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연주회를 보러가는 일이 좀처럼 없는데, 이번에는 어쩌다보니 두 사람과 함께 오페라를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이 모두 군인인데, 그 중 한 명은 나의 한 기수 선배이고 나에게 공주의 한문 교실을 소개해준 사람이다. 사형(師兄)이라고나 할까. 이 공연을 무려 두 달 전에 예매 해 두었다고 한다. 과연 이 선배는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공연장 객석 맨 앞줄의 정중앙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반향(反響) 없이 직접 들려오는 소리가 그리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단다. 나는 선생님께 받은 티켓으로 적당히 뒤에 자리를 잡고 공연을 관람했다.

이 날 공연된 작품은 도니제티의 ‘돈 파스콸레’로, 지난번에 본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와 스토리는 정반대지만 분위기는 매우 비슷한 작품이었다. 거대한 콘서트 홀이 아닌 아담한 앙상블 홀을 무대로, 배우를 딱 4명만 캐스팅하여 챔버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조촐하게 공연되었다. 엑스트라가 없어서 아리아나 중창 중간중간의 디테일들은 지휘자의 설명으로 대신했는데, 지휘자의 언변이 부족하여 몰입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이런 소규모의 살롱 오페라는 매우 참신하지만, 좀 더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디테일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유능한 ‘이야기꾼’의 존재가 필요할 것 같다. 마치 ‘판소리’처럼, 직접 배우들이 연기로 보여주지 않더라도 구연자의 생생한 이야기만으로 그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듯 표현할 수 있게끔 말이다.

허술한 구석이 많긴 했지만 나름 재밌게 보았다. 특히 돈 파스콸레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정말 일품이었다. 그 궁상맞아 보이다가도 애처로워 보이는 연기를 참 맛깔나게 했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 세 사람은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을 마시며 잠시 소감을 나눴다. 중간에 바이올린 선생님이 카페로 찾아와 감상하러 와줘 감사하다며 와플을 사주었다. 공짜 티켓에 서비스까지. 연주하고 남는 게 뭐 있을까 싶다.

2012/04/29 02:21 2012/04/29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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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스 포에버(Callas Forever) (2002년 작품, 2007년 한국 개봉)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Franco Zeffirelli)
출연: 화니 아르당(Fanny Ardant),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

며칠 전 우연히 TV에서 방영하기에 보게 된 영화.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세련되지 못 한 영상과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이야기 진행에 채널을 돌려버릴 뻔도 했지만, ‘마리아 칼라스’라는 그 이름 하나 때문에 끝까지 보았다.

음반(recode)의 역사는 100년 남짓이다. 1902년에 녹음된 카루소의 음반이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된 이후로부터 정확히 한 세기 동안이 클래식 음반의 흥망성쇠가 망라된 시대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클래식 음반 산업의 분명한 쇠퇴를 목격하고 있다.

음악은 불멸할 것이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고,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때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경지에서 출발하는 출중한 연주자들도 계속 배출될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 음반 산업이 사장(死藏)되는 것을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이제는 노쇠한 거장들이 젊은 연주자들에게 거침없이 쏟아내는 찬사는 차라리 애처롭게 느껴진다. 앨범의 속지는 점차 화보(畵報)처럼 변해간다. 베토벤 교향곡 녹음은 시중에 수백 종이 나와 있다. 클래식 애호가의 자식은 부모로부터 베토벤 5번 녹음을 열 장쯤 물려받을 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앨범 컬렉션에 11번째 녹음을 추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한 시대의 쇠퇴기에 이르러 비로소 역사는 정리될 수 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무언가 쇠락해가는 쓸쓸한 시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위안거리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우리에겐 역사가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사실 죽은 자에 대한 숭앙, 영웅화와 신격화, 이런 것도 하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할 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아무튼 클래식 음반의 역사는 완결되었다. 이제 이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진정한 신화(神話)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카라얀이 그렇고,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그러하며,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가 그렇다. 이들이 과연 가장 뛰어난 지휘자, 성악가, 연주자들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었다.”고.

마리아 칼라스 역시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승자’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1922년에 태어났고 1942년에 데뷔했다. 1949년에 첫 앨범을 냈고, 1965년에 은퇴해 그 후로 일체의 음악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음반을 내며 활동한 시기는 채 20년이 되지 않지만, 리코딩의 역사에 금자탑을 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앨범은 현재까지 약 3000만장 정도가 팔렸는데, 성악가 중에서 마리아 칼라스보다 더 많은 음반을 팔아치운 사람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유일하며, 여자 성악가 중에서는 마리아 칼라스에 견줄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

‘칼라스 포에버’의 배경은 1977년. 마리아 칼라스가 은퇴한 때로부터 12년이 흐른 시점. 이야기는 음반 제작자인 래리가 은퇴한 칼라스에게 새로운 음반 제작을 제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음색도 쇠락하고 만 칼라스는 극구 거절하지만, 래리는 새 시대에 걸맞은 ‘오페라 비디오’ 제작을 제안하며, 노래 문제는 과거에 그녀가 녹음한 앨범에서 음원을 가져와 ‘립싱크’로 찍어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러면서 래리는 그녀의 예술적 열망을 은근히 부추기는 노련한 설득의 기술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픽션이다. 역사적으로 1977년은 칼라스가 화려하게 복귀에 성공한 해가 아니라, 그녀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영화의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는 한 때 칼라스와 함께 오페라 연출 작업 한 적이 있는 만큼 그녀와는 친분이 깊고, 사실 누구보다도 칼라스의 재능을 아꼈던 사람이다. 이 영화는 철저히 프랑코 제피렐리의 시각에서 마리아 칼라스를 재해석하고 추모하는 하나의 추증작이다.

영화 속에서 칼라스는 래리의 설득으로 결국 복귀를 결심한다. 복귀작은 그 어떤 오페라보다도 여주인공의 정열이 돋보이는 비제의 ‘카르멘.’ 너무 오래 무대와 떨어져 있었던 칼라스에게는 립싱크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정열적인 삶을 산 여인 카르멘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칼라스는 점차 과거의 열정을 되찾는다. 그녀는 점점 연출에 관여하고 싶어 하고, 안무에 관심을 쏟고, 출연진과 연출자들을 다그치며 과거의 영화를 재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작품 속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잘생긴 청년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까지 느끼며, 칼라스는 50이 넘은 자신의 나이를 잠시 잊는다.

카르멘의 촬영은 대성공으로 끝난다. 카르멘의 공개를 앞두고 래리는 발 빠르게 칼라스와의 다음 작품 구상에 나서지만, 칼라스는 래리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라 트라비아타를 찍자는 래리에게 칼라스는 말한다. “하지 않겠어.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토스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푸치니의 토스카. 마리아 칼라스가 1953년 이 오페라를 처음 녹음한 음반을 내놓은 후, 그 음반은 불멸의 명반이 되었으며, 오페라 토스카의 영원한 결정반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리고 1965년, 은퇴 직전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마리아 칼라스가 맡은 배역이 또한 토스카였다. 마리아 칼라스와 토스카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칼라스는 이번에는 립싱크가 아니라 직접 자신이 노래도 다시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가짜가 아닌 진짜로, 엔터테이너가 아닌 예술가로서 대중 앞에 당당히 서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미 노쇠해버린 그녀의 목소리는 칼라스에게 그런 새로운 기회를 안겨줄 수 없었다. 칼라스는 결심을 한다.

“부탁 한 가지가 있어. 당신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야. 카르멘 영상을 폐기 해 줘.” 이번 작품 제작에 50%의 지분을 투자한 래리로서는 정말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결국 래리는 ‘진실한 예술가’로 남고자 한 칼라스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한다.

자, 마리아 칼라스가 연기한 ‘카르멘’이 어떠했는지, 거짓 아닌 그녀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보자.



사실 칼라스의 음성은 사람들이 흔히 ‘미성(美聲)’이라 부르는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목소리에 단순한 음악적 기교 이상의 어떤 인생의 깊이를 담아내는 진정한 ‘연극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은 대부분 순탄한 인생과는 거리가 멀다. 카르멘도 그러하거니와 토스카도 그렇다.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가족도 음악도 버리다시피 했지만, 결국 그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인생은 어차피 불완전하다. 오페라는 이 불완전한 삶에 대한 모사다. 마리아 칼라스의 약간의 불완전성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인생의 불완전성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영화 마지막, 칼라스는 평범하게 한 사람의 여자로서 살았다면 훨씬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그저 ‘가지 않은 길’을 동경하는 넋두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커리어의 정점에서 은퇴하고 진정 한 사람의 여자로서 한 남자의 사랑을 바랐던 칼라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대사는, 아무리 픽션이라 하더라도 흘려들을 수 없는 무게감을 지니고 우리의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사람, 래리 켈리. 그는 탁월한 선구안과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프로듀서이며, 예술가들의 까다로움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의 소유자이다. 거기에 교묘한 설득의 기술까지 갖추고 있다.

사실 이 래리 켈리란 인물은 마리아 칼라스와는 달리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가공의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인물을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자신을 투영하여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믿는 듯하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칼라스의 예술적 재능을 아꼈고, 그녀의 은퇴를 누구보다도 아쉬워했으며, 비교적 이른 칼라스의 죽음에 누구보다도 애통함을 느꼈던 사람이 바로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영화 속 래리는 칼라스에게 복귀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녀가 다시 한 번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도록 돕는다. 결정적으로는 진실한 예술가로 남기로 한 칼라스의 바람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칼라스 포에버’의 최고의 조력자로 그려진다.

사실 나는 래리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여러모로 래리라는 캐릭터와는 상반되는, 실존한 음반 제작자 월터 레그다. 월터 레그는 EMI의 음반 프로듀서였다. 그는 예술가들의 재능,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에는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하 직원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티스트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엘범의 ‘창조자’라고 여겼던 그는, 어떤 점에서는 영화 속의 래리처럼 배짱이 있고 오만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매우 호감형 외모에 때때로 근사하고 달콤한 말도 늘어놓을 줄 아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게이’였던 래리와는 달리 월터 레그는 비교적 통통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성격은 훨씬 더 보수적인데다가 한층 더 오만했다. 그는 동료가 친근감의 표시로 자신의 어깨를 툭 치는 가벼운 접촉조차 참아내지 못 했다. 월터 레그는 보수적이고 엄격한 사내 분위기로 유명했던 EMI에서도 그 정점에 선 인물의 하나였다. 여러모로 래리 켈리의 캐릭터는 EMI보다는 차라리 데카에 가깝다.

레그는 일찌감치 마리아 칼라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1953년 그녀와 함께 토스카를 녹음했으며, 이 앨범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이 팔리는 토스카 앨범이 되었다. 이후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의 커리어 동안 오직 레그와만 함께 작업 했다.

레그의 오만함과 그의 독자적 행보를 견디다 못 한 EMI는 그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 앨범이 제작된 1964년이었다.

우리는 종종 앨범의 역사를 생각 할 때에 예술가들에게만 너무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음반 제작사나 프로듀서들의 역할을 간과하고 만다. 사실 위대한 음반들은 프로듀서들의 예민한 촉각과 불굴의 의지로 제작되었다. 또 그 이면에는, 아티스트들을 하나의 신화로 포장하는 제작사의 교묘한 홍보 전략도 숨어있고 말이다.

레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단언하건데 예술의 영역에서 위원회라는 것은 전혀 쓸모가 없다. 필요한 것은 카라얀, 커쇼,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이다.”라고. 레그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레그와 카라얀. 이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 있지만, 카메라의 초점은 카라얀에게 맞춰져 있다. 세상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비슷하다.>

영화 자체의 구성만 놓고 보면 그리 높이 평가하기 어렵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굴곡진 인생과 음반사에 남겨놓은 그녀의 업적을 추모하고, 또 아티스트 뒤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한 세기 동안 리코딩의 역사를 이끌었던 프로듀서들의 존재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한 번쯤 볼만한 영화라고 하겠다.

2009/08/30 06:04 2009/08/30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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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騎士)이자 가수인 탄호이저는 천성이 오만하며 절제보다는 탐락을 미덕으로 여기는 자다. 용모가 수려하고 노래 솜씨가 뛰어나서 그를 흠모하는 아가씨들이 많았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이 방자한 청년에게 걱정스런 시선과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탄호이저 역시 순수니 절제니 신앙이니 하는 고리타분한 가치들을 전통의 미덕이라며 고수하고 있는 이 촌구석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는 진심으로 이 따분한 마을은 자신이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여겼다.

결국 탄호이저는 길을 떠났다. 관능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열정에 있는 그대로 도취되기 위해, 이윽고 환희의 마력에 휩싸여 영원한 쾌락을 누리기 위해. 그리하여 그가 도착한 곳은 베누스베르크, 즉 ‘비너스의 도시’였다. 술에 취한 사티로스와 목양신들이 바쿠스 신의 여사제들을 거느리고 흥청망청 향락을 벌이는 무릉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보다 더 매력적이며, 꿀보다도 더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 비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잘생기고 누구보다도 노래 솜씨가 뛰어나며 관능에의 욕망으로 충만한 이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탄호이저는 비너스의 마음을 사, 그녀가 지배하는 쾌락의 정원에서 신과도 같은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탄호이저가 하프를 타며 노래를 시작하면 어느 새 비너스는 그의 등 뒤로 다가와 흰 팔로 탄호이저의 늠름한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부드러운 가슴을 등 뒤에 맞대며 귓가에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탄호이저는 정념이 솟구치고 피가 끓어오르며 하프를 타던 손을 멈추고 열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비너스는 이 세상의 모든 미를 합한 것보다도 아름다웠고, 이 세상 모든 사랑의 기교를 몸소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일찍이 꿈꿨던 모든 것이 이루어진 비너스의 도시에서, 그러나 탄호이저는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늘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요정들은 탄호이저의 노래 소리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비너스의 빛나는 얼굴도 더 이상 고향 마을 처자들의 소박한 용모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관능에의 진한 욕구가 식자, 침대 위에서의 향락도 더 이상 그를 사로잡지 못 했다. 그러자 탄호이저에게는 갑자기 비너스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솟구쳤다. 마치 자신이 비너스의 포로가 되어, 잘못된 향락의 길로 빠진 피해자처럼 생각되었다. 가슴 한편에서 새로운 삶, 무절제와 탐락을 벗어던지고 보다 의식이 있고 신사적인 삶에 대한 열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탄호이저의 눈은 새로운 의지로 반짝이는 듯했다.

떠날 때가 되었다. 탄호이저는 비너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자 비너스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탄호이저를 저주했다. “배신자! 당신을 붙잡지는 않겠어. 그러나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곧 당신의 파멸이 될 거야. 결코 평화를 찾지 못 할 사람. 결코 용서를 얻지 못 할 그대. 그러나 치유를 원한다면, 그때는 내 품에 돌아오게 되겠지.” 그러자 탄호이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나는 당신에게서 평화와 안식을 찾지는 않을 거요. 나의 구원은 성모 마리아에게 있으니까!”

베누스베르크에서 빠져나오자,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같았다.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새들의 지저귐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축복하는 소리로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자못 신사적인 태도로 말을 몰았다.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내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 삶을 살리라. 참된 사랑을 찾고, 참된 신앙을 가지리라!

이윽고 탄호이저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탄호이저의 마음 한 구석은 무거워졌다. 한때 그토록 거만하게 굴었던 나를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들을 경멸하고 오만한 태도로 마을을 떠났는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가다니! 마을 근처에 이르자 몇몇 사람들이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과거에 오만방자했던 탄호이저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그러나 탄호이저가 신사적이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인사를 하자, 마을 사람들은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그들은 탄호이저가 오랜 시간 넓은 세계를 여행하며 드디어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재능 있는 젊은이가 성숙해서 돌아온 것을 크게 반겼다. 탄호이저는 마음 한 구석에서 죄책감을 느꼈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에 이내 그 죄책감을 벗어버렸다. 그는 정말 자신이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성숙한 인간,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 지난날 탄호이저에게 그토록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던 그녀가 아직도 그를 못 잊고 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는 바르트부르크의 노래의 전당에서 오래전에 떠나간 탄호이저를 아직도 그리워하며 회상에 잠겨있었다. 볼프람의 안내를 받고 노래의 전당으로 간 탄호이저는 엘리자베트와 재회하고, 그녀에게로 자신을 이끈 기적을 찬양하며 이 조신한 아가씨의 마음을 다시 휘어잡기 위해 달콤한 말들을 쏟아냈다.

바르트부르크의 영주는 탄호이저의 귀환 소식을 듣고 그를 환대하는 의미에서 노래 경연 대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경연 대회를 통해 탄호이저가 그동안 어떤 경험을 했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탄호이저는 흔쾌히 경연 대회의 참가를 수락했다.

이윽고 노래 경연 대회가 시작되었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가 노래의 주제로 던져지자, 이 정숙한 도시 바르트부르크의 사람들은 저마다 진실 되고 고귀하며, 정신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자코 듣고 있던 탄호이저는 점점 이 순진한 사람들의 생각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사랑의 본질이라고? 이 자리에서 나보다 그것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누가 뭐래도 나는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의 사랑의 독차지하였던 사람이다! 정신과 영혼의 사랑?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맑은 샘? 그 정절을 지키는 지순함? 내가 이 사람들에게 진짜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어야겠다!

“샘이 있다면, 나 불타는 갈증을 식히기 위해 그 샘으로 기꺼이 입술을 축이리. 샘이 마르지 않는 것은 마치 나의 갈망이 꺼질 줄 모르는 듯, 영원히 내 그리움이 불타도록 영원히 나 그 샘에서 활기를 찾겠소.”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탄호이저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는 믿음에 균열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래도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는 셈 치고, 진실함의 미덕을 가르치는 노래로 탄호이저에게 교훈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탄호이저는 이를 비웃으며 외쳤다. “우리의 육신에는 즐거운 향락이 어울려! 그리고 사랑은 그 향락 속에만 있지!”

그러자 귀부인들은 탄호이저의 음탕한 생각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다 이내 황급히 자리를 피했고, 마을의 신심 깊은 기사들은 격분하여 탄호이저를 추방하려고 들었다. 그때서야 탄호이저는 자기가 그만 자제심을 잃고 어떤 위험을 초래하였는지를 깨닫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기사들의 거친 포승이 그의 몸을 휘감으려는 순간, 그 앞으로 한 여인이 몸을 내던졌다. 영주의 조카인 엘리자베트였다. 엘리자베트는 기사들 앞에 무릎 꿇고서 눈물로 호소했다. “나의 소원은 이 분의 구원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감히 이 사람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엘리자베트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탄호이저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고통스런 참회의 길을 떠나는 마지막 기회를 부여 해 달라고 탄원했다.

엘리자베트의 헌신에 탄호이저는 죄책감을 느꼈다. 결국 자신이 돌아와서는 안 될 곳에 돌아왔음을 깨달았고, 변했다고 믿은 자신이 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삶의 의지로 믿었던 열정은 결국 향락에 대한 권태로움의 반대급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떠나겠소, 순례자들과 함께. 천사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로마로!” 탄호이저는 순례자들의 무리와 함께 로마로 향하는 고통스런 순례길에 올랐다.

그 뒤로 또 긴 시간이 흘렀다. 구원을 위해서라지만 탄호이저를 고생스러운 순례길에 보낸 엘리자베트는 날마다 고통스러워하며 예배당에서 탄호이저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이교의 신인 비너스와 향락에 빠져 젊음을 낭비하고, 신앙으로부터 등을 돌린 탄호이저가 구원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나날이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이 야위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던 순례자들의 무리가 바르트부르크로 돌아왔다. 엘리자베트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뛰어나가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았지만, 그 안에서 탄호이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절망했다.

엘리자베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성모 마리아에게 이제 그만 자신을 거두어 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볼프람이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그녀의 집으로 데려다 주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볼프람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홀로 바위산을 향해 걸어간다.

볼프람은 엘리자베트에게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음을 알지만,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홀로 고개를 떨어뜨린다. 볼프람은 저녁별에게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엘리자베트를 결코 잊지 못 하는 자신의 인사를 저녁별이 대신 전해주기를. 이제 가냘프게 흔들리는 그녀의 생명이 꺼지고 나면,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한편 탄호이저는 순례자들의 무리와 함께 고생고생하며 겨우 로마에 당도했다.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전해 받고 지상에서 그 권세를 대신 행사하는, 지상 교회의 수장 교황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교황은 베누스베르크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 향락에 물든 생활을 하며 신을 져버린 탄호이저는 낡은 지팡이에 새싹이 돋지 않는 한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이라며 저주를 내렸다. 탄호이저는 절망에 빠진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다른 순례자들과 떨어져 홀로 괴로움을 곱씹었다. 이제 그에게 돌아갈 곳은 베누스베르크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어느 밤, 베누스베르크를 향해 가다가 고향 마을 인근을 지나게 된 탄호이저는 한 남자의 노래 소리에 이끌려 다가간다. 그는 볼프람이었다. 볼프람은 탄호이저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 했다. 탄호이저는 다 헤진 옷을 걸치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한데다가 몹시 야위어 있었다. 그 옛날 자신감과 생기가 넘치던 아름다운 청년의 면면은 사라져버리고, 겨우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겹게 서 있는 초라한 사나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탄호이저는 볼프람에게 베누스베르크로 가는 길을 묻는다. 어느 때고 치유가 필요해지면 결국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비너스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탄호이저는 스스로를 향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탄호이저의 체념을 눈치 챈 비너스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탄호이저는 모든 구원의 희망을 버리고 비너스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비너스는 이제야 말로 탄호이저의 영혼을 취해 영원히 자기 곁에 두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탄호이저의 낯빛은 이미 시체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지옥의 쾌락에…….” 탄호이저는 절규했다. 이때 볼프람이 그를 막아섰다. “전능하신 주여! 당신의 종을 구하소서!” 비너스는 거듭 탄호이저를 재촉했다. “비켜나시오, 내게서 멀리 떨어지시오!” 탄호이저는 볼프람을 향해 위협적으로 말했다. “한 단어가…….” 볼프람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을 구할 것이요.” “아니, 나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소. 비키시오, 볼프람!” “어서 내게로 와요, 탄호이저, 당신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 비너스가 팔을 벌려 탄호이저를 맞이하려 했다. “탄호이저, 한 천사가 당신을 위해 희생했소.” 볼프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천사가 곧 당신 위에 나타나 축복할 거요.” 그러나 탄호이저는 거의 비너스 품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윽고 볼프람이 외쳤다. “엘리자베트요!” 볼프람의 눈에서도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탄호이저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엘리자베트…….” 그때였다. 마을에서 장례 행렬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애통함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비너스는 절규하며 사라졌다. 볼프람이 잠시 행렬을 멈추게 하고 탄호이저를 관 가까이에 데려갔다. 새벽의 어스름한 빛 속에, 그러나 새벽별처럼 평화로운 모습으로 엘리자베트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 탄호이저는 쓰러졌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동녘에서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온화한 빛이 한 순례자의 낡은 지팡이를 비추었을 때, 그 위에 돋아난 푸른 새싹에 맺힌 이슬이 반짝였다.

이상이 바그너의 음악극 ‘탄호이저’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바그너는 이 곡을 1843년 테플리체에서 작곡하기 시작하여 1845년에 완성한다. 대본은 하인리히 하이네, 호프만 등의 작품과 독일 전승들을 참고, 짜깁기하여 직접 썼는데 역시 내용은 좀 엉성한 편이다. 갈등 구조가 뜬금없고 해결이 갑작스럽다.

성(聖)과 속(俗)의 대립 구도, 그리고 타락과 회개의 이야기 구조는 서양 예술에서 줄기차게 반복되어 온 하나의 패턴이다. 비너스는 속된 사랑을, 엘리자베트는 성스러운 사랑을 상징하며, 타락한 삶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상승의 이야기 구조는 본 오페라의 주인공인 탄호이저의 삶 속에 매우 ‘극적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뻔한 얘기는 그만 하자. 바그너의 음악극 속 주인공은 탄호이저이지만, 내 이야기 속 주인공은 탄호이저가 아니다. 재능이 넘치고 끝까지 방종하여 정신 못 차리다가 여인의 희생으로 구원 받는 행운의 사나이는, 이 블로그에서 주인공으로 거론될 자격이 없다. 21세기에도 ‘왜 여자들은 나쁜 남자에게 끌리나’ 같은 주제가 여전히 술자리 이야깃거리로 거론되고, 이를 다룬 심리학 서적이나 심지어 거지같은 소설도 줄기차게 출판되는 판에, ‘엘리자베트’를 주인공으로 꼽을 이유도 없다.

오히려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면 엘리자베트를 초월하는 진상 중의 진상, 그러나 정작 사람들로부터 주목도 제대로 못 받아 존재감마저 미미한 미련퉁이 남자, ‘볼프람 폰 에셴바흐’야 말로 이 블로그에서는 주인공으로 대접 받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자 그럼 위의 줄거리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이 한심남의 스토리를 좀 자세히 들여다보자. 알고 보면 볼프람, 이 남자도 노래에 소질이 좀 있다. 탄호이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노래 경연 대회에서 첫 타자로 노래를 뽑아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을 정도다. 그런데 성품이 지나치게 올곧다. 여인들을 보고 반할 수는 있지만, 차마 그들의 순수를 조금이라도 흐트러뜨리는 짓은 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탄호이저처럼 갈증이 나면 샘물을 들이키기는커녕, 이래서야 샘물을 퍼서 가져다준대도 입을 못 댈 사람이다.

볼프람은 엘리자베트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었다. 탄호이저의 노래에 푹 빠져있던 엘리자베트가, 탄호이저가 떠나가 버린 뒤 상심에 잠겨있는데도 볼프람은 그 주위를 맴돌며 애만 태울 뿐 엘리자베트를 어찌 해보지 못 한다. 남의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어진 선을 과감하게 넘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볼프람에게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어느 날 탄호이저가 돌아온다. 지난날 탄호이저의 거만한 태도를 기억하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계심을 품을 때, 가장 먼저 탄호이저의 개심을 믿고 그를 환영한 사람이 다름 아닌 볼프람이었다. 그것은 볼프람이 탄호이저의 본심을 꿰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볼프람이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엘리자베트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이었으니까!

볼프람은 앞장서서 탄호이저를 엘리자베트에게로 데려간다. 이 장면에서 볼프람은, 배경이 되는 벽면에 서서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윽고 두 사람이 감격의 재회를 하자, 자신에게는 희망의 빛이 사라졌다며 절망한다. 이런 미련퉁이! 이런 답답한 인간!

‘그녀만 행복하다면…….’은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만큼이나 역사가 깊고 해명이 불가능한 멍텅구리 순진남들의 심리다. 결국 볼프람, 너는 엘리자베트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어!

그러나 볼프람은, 평범한 순정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상을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는다. 탄호이저가 순례지에서 돌아오지 않자 절망에 빠진 엘리자베트가 죽어가며 자신의 희생으로 탄호이저의 죄를 대속(代贖)하기를 비는 모습을 보고서, 한편에서 볼프람은 그녀의 가련한 숙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바위산으로 홀로 올라가는 엘리자베트를 차마 붙잡지도 못 하고 그녀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떠오른 저녁별을 붙잡고 하소연한다.

이 하소연이 저 유명한 아리아 ‘저녁별의 노래’가 되었다. 엘리자베트가 사랑한 사람은 탄호이저였다. 엘리자베트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도 탄호이저, 그리고 엘리자베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사람도 역시 탄호이저였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를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볼프람이다. 물론 이야기 속의 인물이니까 그랬겠지만, 볼프람은 자신이 결코 탄호이저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볼프람은 자신의 역할을 엘리자베트의 조력자로 한정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다른 남자를 위해 희생하기로 한 결심까지 받아들이고, 그 숙명을 완수하는 것을 돕는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서도 그 미운 탄호이저가 비너스의 품으로 안기려 드는 것을 전력을 다해 막는다. 현대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 장면이 다루어졌다면 이때 볼프람은 탄호이저의 뺨을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긴 뒤, 땅 위에 엎어진 탄호이저를 깔고 앉아 멱살을 잡고 외쳤을 것이다. “정신 차려! 너 때문에 엘리자베트는 죽었단 말이야. 나의 엘리자베트가…….” 눈물이 뚝뚝.

오페라 계의 진정한 루저(looser) 볼프람. 종종 여인네들은 너무 쉽게 ‘나도 이런 사랑 한 번 받아 봤으면’하고 말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오페라 안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당하기만 하는 이 슬픈 사랑의 숙명은 도저히 구제 받을 길이 없다!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영원한 시간을 두고 맴도는 것처럼, 조금만 멀어져도 가슴에 서리가 내리고 조금만 가까워져도 속까지 시커멓게 태워버리는 이 바보 남자들의 가련함이라니.

오페라 탄호이저의 숱한 명곡들을 뒤로 하고, 이 세상 짝사랑으로 가슴앓이 하는 모든 순정남들을 생각하며 ‘저녁별의 노래’를 띄워본다.


Wie Todesahnung, Damm'rung deckt die Lande,
umhullt das Tal mit schwarzlichem Gewande;
der Seele, die nach jenen Hoh'n verlangt,
vor ihrem Flug durch Nacht und Grausen bangt!
Da scheinest du, o lieblichster der Sterne,
dein sanftes Licht entsendest du der Ferne
die nacht'ge Damm'rung teilt dein lieber Strahl,
und Freundlich zeigst du den Weg aus dem Tal.

O du mein holder Abendstern,
wohl grußt' ich immer dich so gern;
vom Herzen, das sie nie verriet,
gruße sie wenn sie vorbei dir zieht,
wenn sie entschwebt dem Tal der Erden,
ein sel'ger Engel dort zu werden.

죽음의 예감처럼 어둠은 땅에 내려
검은 옷자락으로 골짜기를 덮네
저 높은 곳을 희구하는 영혼도
어둠과 공포를 향한 비행이 두렵다
그때 네가 나타나는구나, 아 사랑스런 별
부드러운 빛이 멀리서부터 다가와
그 사랑스런 빛이 어둠을 꿰둟고
계곡의 길을 은은히 밝힌다

아, 나의 다정한 저녁별,
너에게 나 언제나 기쁘게 인사한다
나의 그녀가 너의 곁을 지나갈 때에
그녀를 끝까지 따르는 나의 인사를 전해다오
천국의 천사가 되기 위하여
그녀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천국의 천사가 되기 위하여
그녀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2009/08/10 03:17 2009/08/10 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