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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공구와 나무 조각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는 비좁은 골방에, 웬 곰 같은 사내가 앉아있었다. 자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는 물음에 레슨 선생님이 소개 해 줬다는데도 반기기보다는 겸연쩍어하는 눈치다. 케이스에서 악기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본다. 브릿지도 만지고, 자도 대본다. 두드려도 본다. 나의 무심함에 치명적인 상처라도 입었을까, 마치 건강검진 결과 기다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괜찮다는 한 마디에 긴장이 풀린다. 활 털도 갈고, 현도 갈 테니 내일 찾으러 오란다. 떠나려니 붙잡고 커피 한 잔 하고 가란다. 서로 말 수 적은 사내 둘이 마주 서서 멀뚱멀뚱 쓰디 쓴 블랙커피를 들이켰다.

둔산3동 둔산남로에는 악기점이 많았다. 대전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싶었다. 제법 능숙한 쇼팽의 ‘왈츠’도 들리고, 영 어설픈 바이올린 연주도 흐르는 주택가 골목을 지나면,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먹자골목이 나온다. 혹시 혼자 들어가 저녁 먹을 만한 가게가 있을까 해서 두리번 거려봤지만, 영 실패다. 후드득 떨어진 빗방울이 머리를 때린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차를 몰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30분이면 오갈 거린데, 저녁 교통 체증에 걸리니 왔다갔다 찻길에서만 1시간 반을 허비했다.

방 근처에 카페가 하나 있다. 5,500원이면 식사에 후식으로 커피까지 준단다. 들어가 보니 카운터는 웬 꼬마가 지키고 있고, 주인인 듯 보이는 아줌마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널찍한 가게 안에, 사람은 그 둘 뿐이다. 8시도 넘었는데, 다행히 식사는 된단다. 메뉴를 펴보니 돈가스에 해물 스파게티. 그래 여기가 흔히 말하는 ‘경양식’ 집인가 보다 하는데, 이어지는 메뉴는 해물볶음밥에 산채비빔밥. 돈가스 하나 시켜놓고 멍하니 기다리자니, 주인아줌마가 아들 나무라는 소리가 들린다. “너 또 음악 껐지!” “안 껐어. 그냥 소리만 줄였어.” 똘똘한 아이다. 그래도 손님이 왔다고 음악을 들려주려나보다. 곧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안 들어본 것 같기도 한 발라드풍의 대중가요가 흘러나온다.

커피는 커다란 머그잔에, 시럽은 남대문 시장 그릇 도매상가에서 내가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했던 앙증맞은 컵에 담겨 나왔다. 원래는 시럽을 잘 안 넣어 마시지만, 오늘은 조금 넣어봤다. 씁쓸한 커피 맛은 여전하지만, 뒤에 살짝 단 맛이 남았다.

음식 맛도 그저 그렇고, 커피 향도 그저 그렇다. 하지만 싸고, 무엇보다 손님이 없어 좋다. 내 방에서 나와 모퉁이 하나만 돌면 전문 커피숍이 있다. 거기는 커피 한 잔 값이 이 집 식사 값이고,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손님이야 있든 말든, 책 읽는 엄마를 위해 음악 소리 낮추는 아들내미가 카운터를 지키는 이 텅 빈 카페에 더 정이 간다.

악기가 없으니 연습도 못 하고, 그렇다고 달리 할 일도 없으니 되도록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나와서도 시간이 남아, 오늘은 좀 일찍 일기를 썼다. 이제 운동이나 다녀와야지.

2011/09/08 21:24 2011/09/08 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