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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피 재키브

내가 요즘 가장 주목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유독 한국에서 그의 미들 네임을 꼭 표기하는 것은, 그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에게 ‘피’라는 이름을 물려준 사람이 한국 수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피천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천득의 수필에는 그의 딸 서영이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스테판 재키브는 바로 그 ‘서영이’의 아들이다. 사람들은 피천득의 수필에서 느껴지는 그 따스함을 스테판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선율 속에서 찾으려 하는 듯하다. 문학과 음악은 언연히 다르지만, 한국이 자랑스러워하는 문인의 감성이 그 외손자에게로 이어져서 이제 그가 세계인의 마음을 움켜쥐는 음악을 들려주기를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피천득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애호와 이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관심은 별 관계가 없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이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장면을 보았고, 그에게 청중을 집중시키는 재능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의 리사이틀 소식이 들렸을 때, 주저 않고 표를 샀다. 그 리사이틀에서 그는 브람스의 FAE 소나타와 3번 소나타, 그리고 베토벤 5번과 생상스의 카프리스를 연주했다. 브람스 소나타 전곡 녹음을 마친 후인만큼, 그의 연주는 여유로우며 확신에 차 있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들뜨거나 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중후하다고 느껴질 만큼 침착하게 연주했다. 내공이 있다고나 할까. 생상스의 카프리스는, 아마도 테크닉적으로도 전혀 밀릴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곡이었던 것 같다. 브람스도 생상스도 좋았지만, 청중을 가장 매료시킨 것은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쇼팽의 녹턴 20번이었다. 이 연주자가, 청중의 심장을 서서히,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움켜쥐었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다시 피가 돌도록 놓아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완벽한 연주였다.

피천득과 닮은 점? 글쎄. 돌이켜보면 피천득의 수필이 마냥 따스한 정감이 넘쳐흐르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수필은 가장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것이 사람의 눈 아니던가. 그 담담한 필체로 본 것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할 때, 높은 곳에서 뚝 떨어지는 것 같은 서늘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스테판 재키브가 때론 감성이 넘쳐흐르는 연주를 하지만, 그는 그토록 젊은 나이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해내고 있는 것이다. 브람스를 잘 연주하는 젊은이라니, 생각해보면 소름끼치는 구석이 있다.

리처드 용재 오닐

리처드 용재 오닐. 그는 이미 비올라계의 슈퍼스타이며,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인 중의 한 명이다. 나는 그의 연주회를 직접 보러 간 일이 없다. 다만 딱 한 번, 무라지 카오리의 기타 연주회를 보러 갔을 때, 게스트로 등장하여 무라지 카오리와 그 날의 메인곡이었던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한 것을 들은 적은 있다. 솔직히 그와 무라지 카오리의 연주가 잘 어우러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연주회의 주인공은 무라지 카오리였지만, 이 곡을 연주할 때 만큼은 리처드 용재 오닐 쪽이 훨씬 여유롭고 확신에 차 보였으며, 리드해 나가는 느낌이었다.

순박해 보이는 인상, 다소 어눌한 말투(아마 이건 한국어가 서툰 데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협주곡이나 소나타 같은 대곡의 녹음 보다는 소품집으로 인기 몰이를 한 탓도 있어서 그가 광고하는 커피 향만큼이나 부드럽고 유들유들한 이미지를 풍기는 그이지만, 나는 그의 연주가 마냥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것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도 단호하고 정열적이며 가차 없는 연주력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모차르트,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협주곡이라는 장르는 고전파 시대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서 초인적인 기교를 자랑하는 솔리스트들과 비현실적 열정을 불사르고 싶어 했던 작곡가들이 만난 낭만파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고전파 시대부터 낭만파, 이후 국민악파 시대까지 많은 협주곡들이 작곡되었지만, ‘이중 협주곡’이라는 형식의 곡은 그리 자주 작곡되지 않았다. 이런 형식은 오히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에서 발견되는데, 여러 악기군에 돌아가며 솔로 부분을 연주하도록 하는 콘체르토 그로소가 그런 양식이다. 콘체르토 그로소 형식 안에서 솔로 부분을 연주하는 그룹을 솔로 그룹 혹은 콘체르티노라고 부른다. 이들은 오케스트라 반주를 할 동안 손을 놓고 쉬는 게 아니라, 함께 합주를 하다가 자기의 솔로 부분이 있을 때에만 솔리스트로 변신을 한다.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에서도 이런 콘체르토 그로소 양식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원래 악보상에는 협주자도 솔로 파트 외의 부분에서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합주하도록 되어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조합은, 이중 협주곡 중에서도 그 예를 찾기가 힘든 희귀한 조합이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바이올린족의 악기 중에서 서로 가장 가까운 친족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바이올린과 첼로의 대비만큼 드라마틱한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차르트는 왜 하필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조합을 택했을까. 모차르트가 이 곡을 작곡한 해는 1779년. 이 시기는 모차르트가 1777년부터 시작한 유럽 여행의 끝무렵이었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만하임 궁정 오케스트라도 방문했는데, 당시 만하임 오케스트라는 새로운 연주 테크닉을 선도하는,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오케스트라였다. 즉각적인 영감을 워낙 순식간에 곡으로 구체화시켜버리는 모차르트이니만큼, 이 기간의 여행을 통해 새삼 비올라의 매력에 눈을 뜬 것일 수도 있다.

3악장 구성이며 연주 시간이 30분에 이르는 대곡이다. 1악장과 3악장은 모차르트 특유의 경쾌함이 묻어나지만, 2악장은 처절하리만큼 애처롭고 쓸쓸하다. 1악장에서는 두 솔로 악기에 완전히 균등하게 비중이 분배되었다. 하나가 달려가면 다른 하나가 쫓는 숨바꼭질 같은 느낌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따라 잡으면, 이번에는 좀 전과는 또 다른 호흡, 다른 보폭으로 새롭게 뜀박질을 시작한다. 시종 즐거운 분위기에서 놀이하듯 곡은 흘러간다.

2악장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1악장이 마냥 즐거운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면, 2악장은 잔혹한 운명 앞에 놓인 두 남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바이올린은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것 같고, 비올라는 슬픔을 간신히 억누른 채 떨리는 목소리로 타이르는 것 같다. 이 2악장의 슬픈 대화를, 스테판 재키브와 리처드 용재 오닐이 과연 어떻게 표현 해 줄지, 기대된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하면 베를린 필을, ‘오스트리아’하면 빈 필을 떠올린다. 음악의 본고장 유럽이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각 나라의 왕이며 제후들은 각자의 궁정 오케스트라를 거느렸고, 수많은 작곡가와 전문 연주자들을 배출했다. 독일의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어디 베를린 필뿐이겠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고, ‘지존의 존재’를 바라는 법이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영국의 최고 오케스트라는? LSO인가? LPO인가? RPO인가? 아니면 BBC? 당최 구분도 가지 않는 이름들이다. LSO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LPO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다. 덤으로 RPO는 요즘 위상이 많이 추락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말하고, BBC는 물론 방송국 BBC의 교향악단이다(KBS나 NHK 교향악단을 생각하면 된다).

20세기에 비틀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 음악에 거의 기여한 바가 없다는 자괴감에 젖어있던 영국은, 역설적으로 유럽 대륙 음악의 가장 열성적인 수요자였다. 그런 만큼 영국 내에는 굴지의 오케스트라들이 많지만, 그 어느 하나도 베를린 필이나 빈 필처럼 세계인을 압도할 명성을 지니고 있지 못 하다는 것은(한 마디로 ‘고만고만’하다는 것은) 조금 서글픈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오케스트라의 대중적 인지도나 잡지에 오르내리는 순위표는 호사가들이나 집착하고 좋아하는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의 오케스트라들은 깊은 역사를 지녔고,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잘 계승해 오고 있다(LPO는 다소 파격의 길을 걷고 있긴 하다). 문제는 그들의 유명세가 아니다. 지휘자의 이름도 아니다. 그들 공연의 티켓 값도 아니다. 오직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만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며 또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오케스트라를 평가하는 유일무이한 기준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어떤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하룻밤에 20만원 돈을 지불해가며 듣기에는 아깝게 느껴질 것이다. 나 역시 비싼 티켓 값이 황홀한 감동을 선사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끔 기만적인 감동을 부르짖으며 연주회장을 빠져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아무리 돈의 위력이 막강하더라도 감동을 억지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티켓 값이 비싸든 싸든, 그건 하나의 가능성을 구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LPO가 좋은 오케스트라인지 어떤지, 나는 알 수 없다. 설령 그 명성을 믿는다 하더라도, 연주회 날 정작 감동적인 연주를 선사할지 어떨지는 또 알 수 없는 일이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몇 번의 무대에 섰고, 꽤 여러 곡과 만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회라면 역시 첫 연주회를 꼽을 수밖에 없겠지만, 가장 즐거웠던 연주회를 꼽자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한 마지막 연주회가 아닐까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 한심할 정도로 들이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 악기 연주 실력이 늘지 않는데, 그래도 마지막 연주회 때는 첫 연주회 때보다야 실력이 향상 된 상태였다. 부분부분 스스로도 연주하는 기쁨을 조금씩 느끼며 참여했다.

한 번이라도 연주를 해 본 곡은, 언제 들어도 남다르게 들리는 법이다. 그게 음악의 재미겠지만, 알 면 알수록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멋진 연주를 기대해 본다.

2010/09/14 01:07 2010/09/14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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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명동에 갈 있었는데, 그때 대한음악사에 잠깐 들러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론도’의 악보를 사왔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Rondo for Violin and Orchestra in C-dur, K. 373

이 곡은 단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바이올린이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엄밀히는 ‘협주곡’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보통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하면, 각각 쾨헬 넘버 207, 211, 216, 218, 219가 붙여진 총 5개의 협주곡을 떠올리게 된다. 서로 가까운 숫자들의 나열이라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 5개의 협주곡이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게다가 모차르트의 말년 작품 번호가 600대이니, 200대 초반의 번호가 붙은 곡들이라면 겨우 35년에 불과한 모차르트의 생애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작곡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부터 5번까지는 모차르트가 겨우 19세였던 1775년 4월부터 한두 달 간격으로 완성되어, 같은 해 12월까지 약 9~10개월 만에 모두 작곡이 완료되었다. 협주곡 1번의 작곡 시기가 1775년 4월이 아니라 1773년 4월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상당히 신빙성이 있지만, 2번부터 5번이 1775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모두 작곡된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토록 짧은 시간동안에 작곡되었음에도 협주곡 3, 4, 5번은 바이올린 협주곡 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며, 오늘날 수많은 전공생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는 ‘교재’이자, 프로 연주자들이 사랑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어있다. 이를 보면 정말이지 모차르트에겐 작곡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조차 필요치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이야 여기서 새삼스럽게 떠들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한 가지는 어째서 5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한 것이 한 시기에 집중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더불어 1775년 이전이나 이후에는 정말 모차르트가 쓴 바이올린 협주곡이 단 한 곡도 없는 것일까?

전자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언젠가 내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시작하게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후자의 의문점을 해결 해 보도록 하자.

우선 1775년 이전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없을까? 1933년이었던가,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였던 마리우스 카사드쉬라는 사람이 ‘모차르트의 사라진 바이올린 협주곡을 발견했다’며 세상에 악보 하나를 공개했다. 그것이 ‘아델라이데 협주곡’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협주곡으로, 카사드쉬의 주장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10살 때쯤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곡은 세상에 발표된 직후부터 줄곧 위작 논란에 시달렸고, 결국 현재는 이 곡이 카사드쉬의 위작이라는 것으로 잠정 결정이 난 상태이다.

그렇다면 1775년 이후에 작곡한 협주곡은? 사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6번과 7번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이 줄곧 1775년 이후에 작곡된 모차르트의 협주곡이라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재는 이 두 작품도 모차르트의 작품이 아니라 위작이라는 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위작으로 여겨지는 아델라이데 콘체르토와 6번, 7번 협주곡을 제외하면, 3악장 구성으로 완벽하게 쓰인 협주곡은 더 이상 없다. 아마도 모차르트는 1775년 불과 몇 달 사이에 정열을 쏟아 부어 5개의 협주곡을 작곡한 뒤로는, 더 이상 이 장르에 미련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전 악장을 갖춘 완전한 협주곡이 아닌, 단악장으로 된 것들이라면 1775년 이후에 작곡된 것도 몇 개가 있다. K 261, 269, 373이다. 사실 이 곡들은 독립된 악곡으로 작곡된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가 자신이 이미 작곡 해 놓은 협주곡들의 일부 악장을 대체할 목적으로 작곡한 것이다. K261번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다지오’란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본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의 2악장을 대체할 목적으로 작곡되었다. K269번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론도’인데, 이것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의 3악장을 대체하기 위해 작곡했다.

오늘 소개하는 K373번은 조금 특이하다. 이 곡은 단악장짜리 곡이지만 모차르트가 자신이 작곡한 협주곡의 한 악장을 대체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작곡 시기는 1781년 4월로 되어 있다. 이 곡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해 온다. 모차르트가 빈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친분이 있는 귀족(혹은 대주교의 아버지?) 저택에서 음악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 연주회에서는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브루네티와 대주교 궁정 오케스트라가 협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연주할 협주곡의 3악장에 문제가 있었다.

일설에는 3악장이 통째로 없어졌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애당초 그런 곡이 선곡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곡에 대해 까다로워 작곡가들에게 수정 권고도 서슴없이 했던 안토니오 브루네티가 3악장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사실 모차르트의 K261이나 K269도 브루네티의 권고에 따라 작곡하게 된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무튼 결국 3악장을 새로 작곡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모차르트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곡은 소위 말하는 ‘땜빵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작곡된 C-Major의 론도는, 경쾌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명곡이다. 비록 길이는 짧고 구성도 간결하지만, 오케스트라 반주 위로 떠오르는 솔로 바이올린의 유려한 주제 선율은 일품이다.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모차르트는 역시 모차르트다.

악보는 피아노 반주보가 딸려서 가격이 약 2만 5천원정도 한다.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은 겨우 4페이지(양면 인쇄로 1장!)의 솔로 악보인데, 억울하단 느낌도 든다. 악보에는 손가락 번호가 꼼꼼히 쓰여 있어 매우 친절 해 보이지만, 따라 짚어보면 결코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어렵게 만들어놨어.

아무튼 언젠가는 멋지게 연주 해 보고 싶은 곡. 누군가 피아노 반주를 해줘야 할 텐데…….

2009/09/03 04:41 2009/09/03 0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