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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록 많은 서양인들을 만나보지는 못 했지만, 그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습된 관용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학습된 관용 정신이란 나와 다른 사고방식도 존중하는 이성적인 태도를 말한다. 이웃 나라와의 백년에 걸친 전쟁이나 구교와 신교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가 버린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세계 대전의 골조차도 극복하게 만드는 화합의 힘은, 내 생각을 조리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설득력과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관용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 그건 ‘이슬람’이다. 요즘 서양 특히 유럽의 사람들은 이슬람에 대해 과거 십자군 전쟁 시대 못지않은 증오심 혹은 혐오를 표출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중동 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에 따른 다수의 난민 유입이 원인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유럽 사회는 전체 인구의 약 7%가 이슬람교도이다. 이들 중 대다수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이슬람 국가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이다. 프랑스의 경우 이슬람 인구의 비율이 가파르게 증가하여 두 자리 수를 넘어섰다. 복지 혜택이 풍족한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에도 이슬람 난민들이 물밀듯이 들이치는 형국이다.

국가와 국가의 대립, 구교와 신교의 대립, 슬라브, 노르만, 게르만, 골, 유태인 등의 민족적 대립, 그리고 성적취향의 대립마저 극복할 것처럼 보였던 유럽 사회이지만, 거센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이슬람에 대해서는 격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이것이 테러라는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왜 이슬람은 유럽에서 관대하게 받아들여지지 못 할까. 비록 이슬람이 기독교 문명의 울타리 안에서 통합을 이루어온 유럽 사회의 시각에서 보자면 종교적, 인종적으로 멀리 떨어져있기는 하지만, 수천 년간 교회에서 박해를 받아온 동성애자나 유대인을 사회에서 추방하자는 의견이 여전히 존재한다고는 해도 정치적으로 큰 공감대를 얻지는 못 하는 상황에서, 유독 이슬람에 대해서만은 적개심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분위기인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이 이슬람쪽에 있다고 주장한다. 재밌는 것은, 유럽인들의 입장에 서면 당연하게 들릴 이 주장이, 비유럽권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다. 아시아인인 우리에게도 이슬람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다.

얼마 전, 이란의 여자 축구 대표팀이 국제 경기에 히잡을 쓴 채로 출전했다가 복장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몰수패를 당한 일이 있었다. 전 세계인의 스포츠인 축구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데에 대하여, 보수적인 협회측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국제 경기의 룰을 지키지 않고 끝까지 히잡을 고집하는 이란팀을 이해하지 못 했다. 사실 이런 여자 축구 대표팀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딱하다. 이란은 여전히 극단적인 원리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으며, 국가의 법률은 종교적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성립하고 있다. 만일 이란 여자 축구 대표팀이 국제 경기 규칙을 지키기 위해 히잡을 벗어버렸다면, 경기는 진행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조국으로 돌아갔을 때에 그 팀이 존속하지 못 할 가능성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광신적 남성들의 폭력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우려까지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슬람은 여전히 종교 중심적인 사회다. 즉 사회의 구성원들이 종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불과 두 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사회도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근대의 사상가들은 근대 국가의 법률과 종교상의 교리를 분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근대 국가를 설립시키는 데에 있어서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그대로 떠안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 어떤 철학보다도 강하게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성립하는 합리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중심의 사회에서는 성직자들의 편익을 위해 신자들을 희생시켜도 그것의 불합리성을 지적할 수가 없다. 교리는 위에서 아래로 향할 때는 성직자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되지만, 아래에서 위로 향할 때에는 절대성을 부여 받아 결코 비판될 수 없는 것이다.

루소도 사회계약론에서 국가 전체의 이익과 교회의 이익은 완전히 합치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시민 혁명기의 사상가들은 완전한 이성에 의한 국가를 꿈꾸었기 때문에 종교적 비합리성을 근절시키기 바랐고, 프랑스의 혁명 정부는 유럽 사회를 교회와 단절시키려는 시도도 했다. 그들은 심지어 ‘일요일’을 없애기 위해서 한 주를 열흘로 바꿔버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시도는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 했지만, 오늘날 유럽인들은 여전히 많은 수가 기독교 신자이고, 교회를 나감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가치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교리가 낳은 편견에 사로잡혀서 합리적이지 않은, 그리고 공공의 이익에 합치되지 않는 주장을 제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로 간주 된다. 동성애는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죄악일 수 있지만, 민주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교회는 여전히 피임과 낙태에 대해 반대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그것들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이 인정된다.

유럽에서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보다 축소된 영역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죽은 후의 세계가 아닌, 지금 살아있는 세계에 관한 한 종교보다는 이성적은 토의, 합리적 근거에 기초한 법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권익을 보호하는 민주주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에, 유럽 사회는 관용 정신을 교육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확실히 덜 진보되었다. 이것은 밥을 숟가락으로 먹느냐 손으로 먹느냐 처럼 문화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논할 대상이 아니다. 소수의 권력자가 비합리적인 사회 구조를 교모하게 이용하여 다수의 자유를 침해하고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어떤 문화의 산물로도 인정될 수 없다. 이란의 정치 지도자들은 공개적인 연설을 통해서 공공연하게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비난한다. 남자들은 여러 여자들을 아내로 삼지만, 남편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와 관계한 여자는 돌팔매질을 당해 죽는다. 이것이 한 사회의 문화로 법률로 도덕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유럽으로 밀려드는 무슬림들은 서구의 합리적인 가치관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민을 간 것이 아니다.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궁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주를 한 것이다. 이 이슬람인들은 유럽으로 치면 중세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서 현대 사회로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주어지는 사회보장 혜택을 마다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무관한 그 어떤 시민의 의무도 수행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인 사고와 관용의 정신은, 종교적 배타주의에 젖어든 그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유럽의 관용 정신이 그들을 포용할 수가 없다.

하지만 유럽 사회가 무슬림들에 의해 이슬람화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머지않아 무슬림들도 종교적 광신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배우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첨병은, 지금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유럽 사회의 이슬람들이 될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이 앞장서게 될 것이다. 유럽은 일, 이백년이나 앞서서 이것을 이뤄냈지만, 인류의 장대한 역사에서 보자면 겨우 진보의 한 걸음을 먼저 내딛었을 뿐이다.

2011/08/10 00:19 2011/08/10 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