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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카이사르 : 제국을 만든 남자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이든 이미 죽은 사람이든, 작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해 글을 쓴다면 그 이유는 대개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든가 혹은 증오하든가. 물론 사회가 어린이들에게 습득시키고자 하는 구태의연한 도덕률이 위인들의 업적에 뻔뻔스럽게 덧칠되어있는 고리타분한 위인전 시리즈는 예외이겠지만.

다소 지루하게 쓰인 학술적 역사서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담겨있기 마련이다(혹은 억눌러져있으나 서슬 퍼런 울분이 담겨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글의 행간에서 단지 활자화된 것 이상의 것을 아무 것도 읽어낼 수가 없다면, 다시 말해 감정에 호소 해 오는 목소리가 없다면 그 글은 숱한 학생들이 억지로 써 내야만 했던 대학 과제물과 다를 바 없는 ‘죽은 글’이다.

저자가 까닭도 없이 고른 시대와 인물에 대해 그저 사실만 나열해 놓은 그런 무미건조한 책을 읽는 것은 시간의 낭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책의 서두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한 시각에서 서술하기 위해 노력했다”라는 식의 글을 써놓은 것을 보면 더 이상 책장을 넘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가 어느 한 시대나 한 인물에 대해 평생 한 권의 책만 읽을 수 있다면 모든 가치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버린 채 저울처럼 공평하게 서술 된 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격렬한 애정이야말로 모든 위대한 문학의 어머니요, 끓어오르는 울분이야말로 모든 위대한 역사서의 토대다. 우리는 작가와 서술의 대상 사이의 애증의 관계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 우리의 위치를 정할 필요가 있다. 단지 지식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역시 사랑하고 분노하는 것, 그것이 곧 독서의 가치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는 살아있었을 적에나 죽은 지 2000년도 더 지난 지금에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다만 민주주의 이념이 보편화되어버린 지금에는 카이사르의 결점을 지탄할 만한 뚜렷한 동기가 없어졌기 때문인지(오히려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경향마저 눈에 띈다), 현대의 카이사르는 리더십을 칭송 받는 역사적 영웅으로서, 매끄럽지만 다소 밋밋한 캐릭터가 되어버린 감이 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에는 언제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카이사르로부터 무얼 배워야하는지, 그의 일대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행위는, 카이사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마치 성경속의 우화처럼 느껴지게끔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우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한 인물이다. 그가 제국을 이룬 업적은 일개 기업의 성공 스토리와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의 관용과 응징은 부하 직원의 실수를 용서하느냐 마느냐하는 가벼운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관용에 배신으로 응수한 부족에 대하여, 전 부족민의 팔을 잘라버리는 것으로 응징했다. 카이사르의 도박은 전 재산을 거는 것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개인의 멸망과 조국의 파멸을 저울질 했다. 그리고는 자신 한 사람의 파멸 대신 로마 전역을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피로 물들이는 쪽을 선택했다.

카이사르의 이런 생생한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안내해 줄 안내자들은 사실 너무 많다. 우선 카이사르 자신이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라는 너무나도 훌륭한 안내서를 남겼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은 카이사르가 당대의 로마인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로마의 역사와 전쟁 이전, 이후에 얽힌 카이사르의 행적을 제대로 알지 못 하는 오늘날의 상당수 독자들에게는 입문서로 적절치 않다.

필립 프리먼의 『카이사르 : 제국을 만든 남자』는 카이사르가 태어난 시점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약 56년간의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펼쳐 보이는데, 카이사르 개인의 행적뿐만 아니라 말기에 접어든 공화국 로마의 전반적인 역사도 함께 개괄 해 나간다. 서술은 다소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카이사르라는 인물의 생애가 워낙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그 점은 보상 받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라틴어 수업 시간에 지루해하는 학생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종종 카이사르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은 “이 뛰어난 인물과 그가 살았던 세계를 좀 더 자세히 알려고 하는 이들에게 카이사르의 삶과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열망에서 이 책을 집필하였노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 구석에는 “카이사르를 지나치게 칭송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역사상 수많은 독재자들 사이에 묻어버리고 싶지도 않다”고 못 밖아 놓기도 했다. 이런 작가의 정신상태 때문인지, 그의 저작 속 카이사르는 다소 변덕쟁이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의 목에 칼을 들이 댄 정적들까지 용서하고 요직에 앉힌 ‘관대한 카이사르’와 죽은 사람을 깎아내리기 위해 3류 타블로이드 지처럼 온갖 유언비어와 원색적 비난으로 가득 찬 책을 출판한 ‘비겁한 카이사르’는 어쩐지 동일 인물처럼 여겨지지 않기까지 한다. 저자는 카이사르의 이런 행위의 불일치에 대해서는 그리 심각하지 않은 태도로 ‘이것은 관용, 저것은 실수’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넘어간다.

이 책은 명료하며 이해하기 쉽다. 혼란스러웠던 당시 로마의 역사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을 얻기에 적절하다. 더불어 서술의 저변에는 카이사르에 대한 저자의 호의가 깔려있다. 비록 저자 자신은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전문적인 역사 연구가도 아닌 고전 언어학자가 자기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때때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모자라 책까지 펼쳐냈을 정도라면, 카이사르에 대한 저자의 ‘애정’을 의심할 수는 없으리라. 다만 이 러브 스토리는 다소 미적지근하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가슴 속에 열광적인 무언가가 끓어오르지는 않는다. 카이사르와 함께 그토록 바쁜 여정을 달려왔는데, 그 여정이 끝났을 때에 조금도 숨이 가쁘지 않다면, 역사의 오락적 측면을 달성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이나 혹은 전쟁보다도 더 치열했던 정치전에 대한 묘사도 다소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것은 구태여 과장은 하지 않겠다는 저자의 자제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디테일을 많이 생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 얇지는 않더라도 한 권의 책에 한 인물의 생애를 통째로 담으려다보니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역사상 이렇게 사료가 풍부한 시대도 달리 없는 만큼 그 색채감을 선명하게 살리지 못한 것은 아쉽다.

추가적인 탐구의 욕구를 일으키지 않는 어설픈 만족감은, 약간 균형을 잃은 격렬한 열망보다 위험하다. 저자는 카이사르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고 하지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또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이 한 권의 책이 모두 짊어진 채로, ‘카이사르는 대충 이런 사람이었습니다’라는 이미지만 독자의 머릿속에 심어주고 끝나버린다면, 그건 애초의 의도와는 상반된 결과일 것이다.

총평의 의미로, 이 책의 의도와 가치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카이사르의 육성이 담긴 『갈리아 전기』나 『내전기』, 그밖에 키케로의 『서간집』을 비롯한 당대의 기록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역사서에 대한 탐구를 위해 한 걸음 내딛어야 할 것이라는 개인적인 소감을 적으며 마무리한다.

2011/12/06 00:20 2011/12/06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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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Perez Rulfo(1917~1986)


인간이 간직한 영원의 신비, 꿈. 제아무리 현실과 닮은 꿈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딘가 뒤틀려있다. 사실 꿈에는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정밀한 현실의 모사를 추구하지도, 현실 너머의 어떤 이상을 모색하지도 않는다. 꿈은 무한한 상징과 은유, 알레고리의 결합일 수도 있고 그저 무의미한 환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맥락 없이 피어오르는 이런 신기루는 사람을 홀리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꿈에 빠져들면 눈을 찌르는 아침의 햇살에도 아랑곳 않고 침대 위에서 몸을 움츠린 채 그 맥락도 없는 이야기, 결말이 없이 무한히 표류하는 꿈의 자락을 붙잡고서 헤어 나오지 못 하는 것이다.

라틴 문학은 어쩐지 ‘꿈’과 비슷하다. 꿈이 아니라면, 확정된 시간과 공간을 점하는 ‘위계’가 뒤섞일 수 없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 허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미 가상의 한 층위를 형성하지만, 아무리 환상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현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는 한 시간은 인과적 순서에 따라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고(원인 이전에 결과가 먼저 일어나지 않는다), 자아는 하나의 차원(次元)에 속해있다. 주인공은 깨어있거나, 꿈을 꾸고 있거나, 천국에 있거나 혹은 분열된 자아끼리의 다툼 중에 있다. 꿈에서는 이런 원칙이 무시된다. 다른 시간 속의 여러 공간이 중첩되며, 하나의 자아는 여러 세계에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고 혹은 완전히 부재하기도 한다. 라틴 문학은 마치 논리적 인식 구조에 심각한 오류를 초래하는 이러한 꿈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꿈을 꿀 때와 마찬가지로 그 소설 안에서 모든 기호들을 해석할 수도 있고, 완전히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공적으로 쓰인 소설들은 꿈이 갖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매력, 즉 아침을 거부하고 꿈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끔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줄거리



나는 이 소설의 꿈을 모사한 듯한 속성, 다층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혹은 그렇게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하다는 것을 언급 해 둔다. 이를테면 이 소설은 하나의 혁명 소설로 분류될 수 있으며, 유일한 생산 수단인 토지를 독점하는 토호(土豪)와 민중들의 갈등, 저항, 그리고 혁명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소설의 내용이 혁명을 지지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혁명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는 역시 ‘모호’하다. 이것에 대한 판단은 독자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2010/11/29 23:15 2010/11/2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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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요시다 슈이치. 일본 소설 코너에서 자주 발견하는 이름이다. 권위와 대중성을 모두 갖춘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가로 널리 홍보되는데, 몇 권의 책 서평을 읽어본 결과 상당히 기발하면서 반전이 있는 소설을 잘 쓰는 모양이다. 이번에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해 보았는데, 이 한 권으로 미루어 그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지만, 솔직히 이런 작가에게까지 아쿠타가와 상을 시상해야 할 바에야 매년 수상자를 내지 않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요시다 슈이치 본인인이 ‘두 번 다시 이런 연애소설은 쓰지 못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확실히 연애소설은 두 번 다시 쓰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소설 대강의 플롯은 전체의 3분의 1도 읽기 전에 그려졌고, 전개는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 소설이, 어떤 반전을 준비하고 있는 소설은 아니다. 소재는 확실히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일 수도 있겠지만, 소재의 독특함이 결코 소설 자체의 독창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 대한 시시콜콜한 묘사가 상당히 디테일 한 것에 비해, 인간의 심리에 대한 고찰은 어딘가 작가 자신의 시각에 매몰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대체 어디가 ‘작가 자신과 작품 간의 거리감’을 느끼게 한단 말인가?

소설의 전개도 뭔가 중간중간 잘라먹은 느낌이 있다. 전체적으로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힘이 부족하다. 캐릭터들도 생동감이 떨어진다. 그 중에서도 와타나베란 캐릭터는 최악이다. 기자답게 집요함으로 꽉 찬 캐릭터로 그릴 것이 아니었다면, 아예 텅 비어서 완벽한 관찰자로 만들었다면 좋았겠지만, 소설 전반에 와타나베의 의식이 상당히 많이 흐르고 있는 것에 비해 알맹이가 없다. 이건 뭔가 독자가 소설 속 사건과 배경을 자신의 의식 속으로 온전히 흡수하는 것을 방해하면서도, 역으로 독자가 충실하게 따라갈 길은 깔아주지 않는 불친절함이다.

덧붙이자면 요시다 슈이치라는 작가가 과연 여성, 여성의 심리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이건 나로서도 뭐라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건 여성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야겠다.

기억에 남는 구절

상상 속에서 그녀는 사내 남자직원에게 교제하자는 요청을 받고 거절했다. 자기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이 머릿속에서 고스란히 그녀의 이야기로 변해갔다. 자기가 누군가와 사귀면, 상상 속의 그녀도 누군가와 사귀기 시작했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십 수 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터무니없이 긴 세월이 아니다. 무언가를 십 수 년간 계속 생각하는 것쯤은 인간에게는 간단한 일인 것이다.

2010/09/23 01:49 2010/09/23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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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베켓(1906~1989)


부조리(不條理)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이 단어를 자주 사회의 어떤 구조적 모순, 특히 사회의 불평등성이나 비도덕성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인간 사회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다는 우리의 통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실의 증거들이 바로 우리가 ‘부조리의 파편’이라 여기는 것들이다.

흔히 사람은 법과 질서를 준수하고 자기 양심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도록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하며, 게으름보다는 부지런함이 바람직하고, 막대한 부(富)보다는 훌륭한 인품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줄곧 제기되었으나, 여기에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의문 한 가지가 늘 따라붙었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느냐?”이다.

여기에도 물론 많은 답변들이 나왔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회가 사람들의 선의와 선행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줄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피력했고, 어떤 사람은 개인의 행위가 신이나 역사에 의해 심판 될 것이라는 숭고한 종교적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의 가치 판단이 결국 ‘자기만족’에 달렸음을 넌지시 내비치기도 했다.

묻건대, 사회의 부조리를 외치는 사람들은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것은 하나의 신념이다. 현실 사회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모범적인 삶의 방식, 인생의 목적 같은 것을 제시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도덕책을 통해 습득하게 된 ‘상식’이 현실 사회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회가 ‘부조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가 도덕책이 그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부정의’하기 때문일 뿐이다.

‘부조리’란 본래 배리(背理)의 동의어로, 논리적으로 이치(理致)에 맞지 않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사실 부조리란 단어는 우리의 신념에 비추어 어그러진 사회의 모습에 던지는 푸념의 용어로 사용될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물음, 즉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단어인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카뮈, 새뮤얼 베켓은 부조리 문학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삶의 부조리한 속성은 보통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이나 무력함,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불가능성 등으로 이해된다. 소설 속의 상황들은 근본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난제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질문은 어떤 논리적인 해법을 완벽하게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카프카의 ‘변신’ 속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레고르가 ‘벌레’에서 다시 ‘사람’으로 변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혹은 측량사 자격으로 마을을 찾아온 K가 성에 들어가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살인죄를 저지르고 법정에 선 뫼르소에게는 대체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법인 것일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고도’는 ‘해답’인가?

얼마 전 우연히 ‘세비지스 The Savages’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 주인공 웬디는 39살 극작가다. 남편은 없고, 애인은 늙은 유부남. 변변한 성공작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어느 날 갑자기 20년 전 사랑하는 여자를 좇아 자식들과 인연을 끊고 사라졌던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입원중이라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 병간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힘겨운 상황 속에서, 8번째 응모한 구겐하임 장학 재단으로부터는 또다시 탈락 소식이 날아든다.

보통 헐리우드 영화에는 명확한 문제제기와 그에 따른 해법이 존재한다.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도망치는 처지라면 그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해법이다. 세상이 위기에 빠졌다면 그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하면 되고, 짝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한다면 사랑을 이루는 것이 분명한 문제의 해법이다.

영화 ‘세비지스’에는 누구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그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사랑을 좇아 자식들까지 내버리고 떠나간 아버지이건만, 결국 치매 노인이 되어 자신이 버린 자식들의 간병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웬디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대체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버지의 회복 혹은 임종, 불륜 관계의 청산, 극작가로서의 출세, 안정적 가정의 구축 같은 것들이 ‘인생’의 해법들일까?

문제의 핵심은 ‘life goes on’, 즉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동화 속 주인공의 삶은 왕자와의 행복한 결혼식 장면에서 끝나지만, 인간의 인생은 책이 덮인 다음에도 이어진다. 인간은 ‘실존’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시시포스는 영원토록 비탈길에서 바위를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가 굴리는 바위는 영원히 정상에 안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는 행위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가? 그것은 바위를 비탈의 정상에 올려놓는 불가능한 임무의 완수인가? 혹은 바위를 굴리는 그 자체인가?

새뮤얼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마치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는 것처럼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무대는 장소를 특정할 수 없는 어느 시골길을 배경으로 한다. 이 두 부랑자는 ‘고도’를 기다리며 부질없는 대화를 나누고,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한다. ‘고도’는 이 둘에게 어쩌면 절대적 구원이요,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정작 두 사람은 고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그를 만나면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 한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도’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이 의미 없어 보이는 삶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도는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나무를 보며 목을 메달 생각을 한다. 만일 이들이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극한의 좌절 혹은 분노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수긍이며, ‘바위를 미는 행위의 중지’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감정이 부추긴 죽음’이 아니라, ‘정신이 선택한 죽음’인 것이다.

부조리 문학은 확실히 읽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며, 우리의 실존의 근거를 뒤흔듦으로 하여 존재의 불안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부조리 문학의 배경에도 ‘논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부조리 문학의 토대는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 혹은 ‘실존이 곧 본질이다.’를 뒤집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주장, 그 뿐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란 주장은, 인간의 존재가 엄연한 사실인데 비하여 그 존재의 목적은 특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우린 이 세상에 목적 없이 태어났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주장은 전혀 우리들, 그러니까 동양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서양인들에게는 커다란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것이 서구인들이 목적론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서양 철학자들이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인과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론적인 것이다. 인과론적인 견해는 오늘날 자연과학자들의 견해와 비슷하다. 즉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인과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의 보편화로,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반면 목적론적인 견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이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현상의 ‘목적’이 바로 실존과 본질 중 ‘본질’에 해당한다. 눈(目)의 본질은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은 ‘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날개의 본질은 비행(飛行)이다. 그러므로 날개는 ‘날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고 어쩌면 매우 비과학적인 얘기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 최고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목적론적인 사고가 서구 문명을 지배했다. 중세 1천 년간, 유럽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삶의 본질은 전능한 신에 의해서 디자인 되어, 그 완벽한 계획 위에 인간의 실존이 주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근대 유럽인들이 느낀 존재의 불안은, 중세 1천 년간 이어졌던 강한 종교적 확신의 증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의 문제 제기는, ‘실존’과 ‘본질’ 혹은 ‘존재’와 ‘목적’이 엄연히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동양의 고전 철학에서는 애당초 ‘목적인’이 되는 초월자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았다. 목적이 존재를 유발한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실존’과 ‘본질’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일도 없다. 어쩌면 부조리 문학이 많은 아시아권 독자들에게 ‘갑갑한 현실’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못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2009/09/11 05:39 2009/09/11 0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