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Filed under 음악/공연



저는 크고 작은 공연들을 자주 보러 다닙니다. 학생 때부터의 취미 생활이었고, 지금은 단조로운 군 생활의 낙이죠. 하지만 저는 꽤 까다로운 관객이라, 항상 후련하게 박수치고 연주회장을 빠져나오는 건 아닙니다. 저야 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연주회장을 찾는 것이지만, 어떤 연주자에겐 연주가, 제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일상이고 일인 모양입니다. 그런 연주자는, 제가 매일 아침 무미건조한 보고서를 타이핑 하듯, 무표정하게 한 음 한 음을 그저 소리 내고 있을 뿐이죠.

하지만 무대 위의 유포니아 여러분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정말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연주 시간이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겠지만, 반쯤은 아련한 추억이 불러일으키는 상념에 젖어, 반쯤은 여러분들의 열정에 취한 채 보낸 감상의 시간은 제게도 정말 짧게만 느껴졌습니다.

제가 복무하고 있는 부대의 스포츠 센터 건물에는 강당이 하나 있습니다. 피치가 거의 1도 가까이 내려간 고물 피아노와 끊어진 전선을 억지로 이어 붙인 건반이 한 대 있는 이 강당에서, 저는 매일 퇴근 후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병사들이 문 열고 들어오려다 놀라서 돌아가기도 하죠.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과 유포니안들의 연습 소리로 가득했던 마술방, 요술방, 푸른샘(추억 속에서 다소 미화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한데)에 비하면 오죽이나 쓸쓸한 연습 장소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연습해야 하는 이유를, 여러분들의 연주를 보면서 깨닫습니다. 고마워요. 저도 꾸준히 연습해서 2013년 가을 연주회를 노려…….

아무튼 준비한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게 공연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의 공연은 멋졌어요!

공연 관람 후 유포니아 공식 홈페이지에 올린 글


맥락

군 생활을 하다보면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혼동하게 된다. 2월의 마지막 날, 상황실 한 벽에 걸려있던 달력의 페이지를 누군가 하루 먼저 넘겨버렸다. 지휘관이 브리핑을 받다가 우연히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았을 때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숫자 “3.” 그건 정말 중요한 것이었을까. 한 번 넘어가면 좀처럼 되돌릴 일이 없는 달력의 페이지를 거꾸로 넘기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우주의 모든 물질을 던져 넣어도 가득 채워지지 않을 광대한 인간의 사고가, 사방이 흰 벽으로 가로막힌 수평 남짓의 비좁은 방 안에 갇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잠식당한다. 공허함. 공허함은 끊임없이 팽창하여 모든 가능성의 영역을 남김없이 침범하고 이내 앗아가 버려, 결국 인생을 무의미함으로 가득 채워버린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내 인생의 독자성을 인정받기 바라는 것은 유치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누구나 하루에 한 번씩은 반드시 되뇌지만 쑥스러워 감히 입 밖에는 섣불리 내지 못 하는 말.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째서 그것을 지금 할 수 없는 걸까. 우리의 인생은, 대체 어느 순간에 그렇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린 걸까?

세상에 쫓겨 다니며 살지 말자. 브리핑 때, 지휘관의 테이블 위에는 반드시 탁상시계가 놓여있어야 하지. 티슈는 항상 꺼내기 쉽도록 한 장이 반쯤 빠져나와 있어야 하고, 그리고 나는 문 앞에서 45도 각도로 바라보며 차려 자세를 하고 있어야 한다. 혀를 반쯤 내밀고 있는 티슈 갑(匣)과 책상 모서리와 각을 맞춘 탁상시계와 45도 방향을 튼 채 차려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는, 있어야 할 위치에 정리정돈 되어있어야 한다는 질서 아래서 동급의 사물이다. 가치와 우선순위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세상에서야 살든 살지 않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의 인생이 최소한 자기 자신을 감상자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조형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섬세함과 인내심이 필요하겠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아마도 그 순간만이, 인생에서 기억될 빛나는 시간일 거야.

후기

연주회가 끝났다. 한바탕 인사와 촬영의 시간이 펼쳐지지만, 인사 나눈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만났었다는 사실을 기억이나 할까 싶다. 그만큼 연주회 직후는 정신이 없다. 더 이상 인사 할 사람도 없다싶을 때쯤 이번 연주회에 서지 않은 몇몇 사람들이 따로 모여 가볍게 한 잔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어차피 전체 뒤풀이는 연주자들의 여운을 위한 연회. 연주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가 보았자 돈 써주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없으니.

3월 첫째 주 금요일. 신입생 환영회다 오리엔테이션이다 뭐다 해서 신촌 바닥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가볍게 맥주 한 잔 걸칠 장소도 마땅치가 않아서 결국 바를 찾아 들어갔다. 월급쟁이는 어디를 가나 물주가 되는 법이라, 멤버들에게 칵테일 한 잔씩 돌렸다. 나는 ‘블랙 러시안’을 주문했다.

나는 05학번이지만, 08년도에 유포니아에 들어갔다. 당시 나와 함께 입단했던 08학번 새내기들이, 어느 덧 졸업 학년을 맞이했다. 그러니 그 사이 나는 얼마나 더 늙었단 말인가. 요새 부쩍부쩍 시간은 나를 놓아둔 채 쏜살 같이 달려 나가고 있는 것만 같다. 나의 성장은 지체되어 있는데.

이런저런 얘기들 나누다가 12시쯤 헤어졌다. 새벽 2시를 넘겨서야 집에 도착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한 번 쓰다듬고, 그날은 그대로 잠들었다.

2011/03/14 22:34 2011/03/14 22:34
Posted
Filed under 음악/공연




일시 : 2011년 3월 4일(금) 저녁 7시 30분

장소 : 연세대학교 대강당

연주 : 연세대학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유포니아'

지휘 : 김동혁

협연 : 신송림

프로그램 :

J. Sibelius - Symphonic Poem Finlandia Op. 26

R. Schumann - Concerto for Piano in A minor Op. 54

P. I. Tchaikovsky - Symphony No.6 in B minor Op. 74 'Pathetique'

어느 새 내가 마지막으로 연주를 선 때로부터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년 전에도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을 연주했었지. 차이코프스키와 함께 겨울을 보냈을 그들이 부럽다.

지난 22회 연주회 때는 퇴근 후 부랴부랴 올라갔지만 2부 교향곡의 후반부부터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전 단원의 특권으로 연주자 대기실에 들어갔기에 가능했지. 이번에는 아예 휴가를 쓸 생각도 하고 있다.

2011/02/25 00:32 2011/02/25 00:32
Posted
Filed under 음악/공연

마치 그렇게 되도록, 운명을 관장하는 누군가의 종이 위에 쓰여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개인의 처신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불가측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은, 항상 이중적인 면을 지니고 있어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전날, 선임이 몰고 가던 내 차가 도로 위에 서버렸다. 만일 차가 말썽을 일이키지 않아서, 차를 찾으러 가기 위해 40~50분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2부 공연 시작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을까? 혹은 목요일 저녁의 우연한 회식이 아니었더라면 내 고물 차는 주말 저녁 정체를 빚는 고속도로 위에 떡하니 멈춰 서서 정체를 더욱 극심하게 만들며 57분 교통정보에 ‘고장 차량’ 소식을 띄우게 되었을까?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 주행 중에 목숨을 걸고 카드를 물린 하이패스 단말기. 한 번 충전하면 두세 달은 끄떡없다던 녀석이, 잭을 제거한 지 1주일도 안 되어 방전되어버렸는지 침묵이다. 수리를 받았지만 여전히 상태 불량인 차. 오르막길에서는 아무리 액셀을 힘껏 밟아도 속도가 80km를 넘지 못 한다. 정체 구간에 들어서니 그나마도 속도를 낼 수 없다. 해가 기운다. 하늘은 눈부신 주홍빛에서 점차 깊은 바다의 어두운 푸른색으로 변해간다. 이윽고 잿빛이다. 내 마음도 그렇게 어두워져간다.

서울은 변함이 없다. 주말 저녁의 극심한 시내 교통 체증까지도. 1부 공연이 이미 끝났을 시간이다. 기름 게이지가 바닥을 친다.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본다.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 인공의 불빛들만 환하다.

생상스 3번 2악장이 들려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단단히 닫혀있다. 나는 우측 복도를 통해 무대 뒤편 연주자 대기장소로 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악기 케이스. 조금 전까지 이곳을 가득 메웠을 긴장의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있다. 음악이 잠시 멎었다. 그리고 3악장, 시작이다.

무대 옆벽의 뒤편에 서서, 작은 틈새로 무대를 엿보았다. 힘차게 타점을 내리찍는 지휘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지휘자의 모션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지휘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악장의 모습도.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활이 상하로 춤춘다. 뒤에서 바라보니 그 높이가 제각각인 것이 좀 많이 티가 난다. 피아노 소리도 들려온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전자 오르간은 바로 눈앞에 있다. 연주자는 자신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풍부한 C 코드의 울림! 4악장 Maestoso(사실은 2악장의 두 번째 파트) 시작이다.

도취를 걷어내고 바라보면, 현실의 모든 것들이 하찮아 보이기 마련이다. 내가 저 안에 있을 때, 함께 땀을 흘리고 연주하며 동경에 가득 차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던 때와 교하면, 이 날 이 자리에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예전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솔직하게 살아가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그 ‘실체’를 논할 수 없는 무언가가 보이고, 추억과 상상력이 부여하는 환상은 연주장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어떤 감동의 파장을 더한다. 그래, 당신들에게 열정이 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가득 찬 무대, 숨죽인 객석, 그리고 텅 빈 연주자 대기실에서 무대 벽에 기댄 채 좁은 틈으로 다른 세상을 엿보는 관객 한 사람. 이것은 썩 괜찮은 그림이다. 나는 취하기 위해 왔으니, 잔을 들어 올리겠어. 이것은 편파적이지만, 술 취한 사람은 오직 감정에만 솔직하니까.

브라보!

2010/09/05 01:44 2010/09/05 01:44
Posted
Filed under 음악/공연



일시 : 2010년 9월 3일(금) 저녁 7시 30분

장소 : 연세대학교 대강당

연주 : 연세대학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유포니아'

지휘 : 이병욱

협연 : 이주현

프로그램 :

E. Elga - Pomp and Circumstance Op. 39 No.1

F. Mendelssohn -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

C. Saint-Saens - Symphony No.3 in C Minor Op. 78 'Organ'

뭐 이렇다더군. 포스터의 오르간은 멋지지만…….

2010/08/31 23:12 2010/08/31 23:12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유포니아 캠프에 놀러갔다. 도착한 게 새벽 1시 반. 여름 성수기라 이 ‘누추한’ 리조트에도 꽤 사람들이 많이 묵고 있는 듯, 지하 주차장에 주차 공간이 없었다. 이럴 때 마티즈의 ‘사이즈’가 빛을 발하지. 거대한 SUV 두 대 사이, 주차장 시멘트 기둥 뒤편 좁은 공간에 살며시 주차. 마티즈는 가능하다.

보통 캠프는 월요일에 시작해서 토요일 아침 해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번 캠프는 일정이 이상하게 잡혀서 금요일에 시작하여 다음 주 수요일에 끝난다. 주말이 낀 덕분에 내가 놀러갈 기회도 생겼지만. 그리고 교회 나가야 하는 사람이 많아서 일요일 오전 연습은 생략. 덕분에 부담 없는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늦게까지, 아니 이른 아침까지? 술 마시며 잘들 놀았다.

난 선물로 군납용 면세주 스카치 블루와 J&B를 사갔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깨어있을 줄 알았더라면 몇 병 더 들고 갔을 텐데.

술 못 먹겠다. 안주도 안 든 빈속에 소주와 설중매를 들이붓고 거기에 스카치를 스트레이트로 마셨으니 무리를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수개월 알코올 청정 상태였던 때문인지 아침에 꽤 힘들었다.

연습 부담이 없는 나는 늦게까지 자다가, 오후 생상스 연습 때 연습실로 내려가서 참관을 했다. 지휘자 선생님도 계시니까 다리도 꼬지 않고 나름 바른 자세로 관람. 여느 공연 볼 때보다도 진지하게 봤다.

오케스트라의 튜닝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다. 자동차 마니아들이 엔진 시동 거는 소리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과 비슷하달까. 공연이 끝났을 때 느껴지는 벅찬 감동을 경험하기 위해서 만큼이나, 공연 시작 전 오케스트라 튜닝 순간의 설렘을 느끼기 위해 공연장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습 때 튜닝은 훨씬 귀엽고 재밌다. 관악기들은 어쩔 때는 음이 잘 맞춰져서 튜닝에 몇 분씩 걸리기도 한다. 악장이 악기 별로 친절히 튜닝을 해 준다. 원래 오케스트라 튜닝 시에는 오보에로부터 A를 받아 관을 먼저 튜닝, 그다음에 현을 튜닝한다. 일일이 클라리넷, 트럼펫, 호른 등등을 지적해서 맞춰주거나 하지 않는다.

튜닝이 끝나면 연습 시작이다. 지휘자 선생님이 지휘봉을 들어 올리면(근데 지휘봉을 썼던가?) 단원들도 일제히 악기를 들어올린다. 그 일사 분란함이 좋다. 첫 타점을 찍기 전까지의 정적. 그 적막이 또한 무지 매력적이다.

음악을 만든다는 건 정말 아름다운 작업이다. 음악은 작곡가의 머릿속에 존재했다. 오케스트라의 역할은 그저 악보에 적힌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악보를 ‘참고’하여 작곡가의 머릿속에 들어있었을 그 음악을 가능한 한 재현 해 보는 것이다. 그 음악은 다시 지휘자의 머릿속에 있고, 오랜 기간 연습을 통해 단원들의 머리와 가슴에도 전달이 된다.

생상스 3번. 참 좋더라. 그 뛰어난 능력, 그리고 그가 남긴 많은 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는 매우 낮은 생상스. 생상스는 5곡의 교향곡을 썼는데, 3번을 제외한 곡들은 거의 연주가 되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인기가 있는 3번은 부제인 ‘오르간’만 봐도 알 수 있듯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있어야만 연주를 할 수 있는데, 국내에는 그런 연주 환경이 거의 없다. 예당에도 파이프 오르간이 없어서 전자 오르간을 놓고 쓸 지경이니. 세종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왜 몰랐지. 아무튼 ‘오르간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과장이다 싶긴 해도 그만큼 오르간의 임팩트는 강하다. ‘오르간 필수’ 딱지가 붙었으니, 좀처럼 쉽게 공연이 될 수가 없지.

생상스 3번은 엄밀히 말하면 4악장 구성이 아니라 2파트 구성이다. 그러나 2파트가 각각 2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결국 4개의 부분이 일반적인 4악장짜리 교향곡의 각 악장과 비슷해서 그냥 각 부분을 악장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

두 시간 정도에 전 악장 연습을 다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난 세컨드 바이올린 파트보를 받아 참고하며 들었다.

정말 연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억누를 길 없을 만큼 솟구쳤다.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어. OJT고 야근이고 뭐고 간에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부터 물색 해 봐야겠다. 여건상 내가 유포니아에서 다시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러나 ‘기회’란 어느 정도 내가 만드는 것이기도 하니까,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부분은 준비해야지. 언제 어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연습 구경을 마치고 다시 차를 달려 충주의 숙소로 돌아왔다. 늦은 저녁을 먹고 상쾌하게 샤워를 마치고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적당한 공연을 물색한다. 마침 이번 달에는 가족음악축제라는 기획 공연이 매주 주말마다 열린다. 코리안 심포니, 수원 시향 등 괜찮은 단체들의 연주를 단돈 15,000원에 관람할 수 있는 기회. 이걸 마다해서 되겠나. 토요일 프로그램은 시벨리우스 2번이 메인. 일요일 프로그램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가 메인이다. 어느 쪽도 다 듣고 싶지만, 이번에는 시벨리우스로 결정. 한 주를 즐겁고 활기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블로그 스킨을 바꿨다. 커스터마이징을 안 해서 메뉴 구성이 엉망인데, 수정을 해야 하지만 귀찮아서……. 조만간 손을

2010/08/02 00:00 2010/08/02 00:00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훈련소 안에 있을 때나 밖에 있을 때나, 나는 군대와 관련된 꿈을 꿔 본 일이 없다. 어떤 이들은 훈련소에 있을 때도 훈련소로 끌려오는, 그러니까 군대에 있으면서 다시 군대에 끌려오는 끔찍한 꿈을 꿨다고도 한다.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나가면, 훈련소로 다시 들어가는 꿈을 언젠가 한 번쯤은 꾸게 될 것이란 얘기도 들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내 느낌에, 앞으로도 그런 꿈을 꿀 일은 없을 것 같다. 간절히 바라는 일도 아니요, 극심히 두려워하는 일도 아닌 일은, 구태여 꿈을 통한 생생한 체험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훈련소에 있을 때, 이런 꿈을 꿨다. 나는 무대 위에 자리한 수 십 명 오케스트라 단원 중의 한 명. 그러나 나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과 연주자의 시선을 자유로이 오가며 오케스트라를 안과 밖에서, 전체와 부분을 모두 바라보았다. 지휘자와 악장은 내가 마지막 연주를 섰을 때의 지휘자와 악장이었고, 주위의 모두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유포니아로 돌아가 있었다. 단원들은 분주했다. 이제 막 연습을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올린다. 단원들은 저마다 연주 준비를 한다. 나도 악기를 든다. 지휘봉이 첫 타점을 찍는다. 타악기와 금관의 요란한 팡파르와 함께 음악은 시작한다.

따딴따딴따따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악. 꿈속에서 연주되는 것 같지 않아. 이어서 보컬의 음성이 들린다.

“기상, 기상, 기상, 장교교육대대의 전 후보생은 침구를 반대로 펴고 창문을 개방하며 스트레칭과 공공실 출입 후…….”

그렇게 몇 번인가 쓴 웃음 지으며 아침을 맞이한 적이 있다. 본래 나는 과거를 추억하거나 회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고 난 다음 날에는 내가 이미 지나가버린 어떤 시간, 어떤 장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치 그 지나가버린 시간에 내 생의 모든 즐거움이 다 응축되어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런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서는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공허감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고작 몇 년 앞의 일이 불분명해지면 금방 과거에서 희망을 탐색하는 인간의 나약함이라니. 그러나 그런 나약함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추억이이야말로 가장 큰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지난 토요일, 유포니아를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 세컨드 바이올린 파트장을 맡고 있는 후배(입단 선배)에게 연락 해 간식 거리로 뭘 사가면 좋을지 물었다. 선배들의 간식이라면 크리스피크림 도넛이라는 정통 메뉴가 있긴 하지만, 내가 현역 단원이었을 때 이미 식상하다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누군가 에그 타르트를 먹고 싶어 한다는 답문을 받고 주저할 것 없이 연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앤드루스 에그 타르트 이대점에 전화를 걸어 에그 타르트 50개를 예약 주문 해 두었다. 연습 시작은 4시. 에그 타르트는 5시까지 준비가 가능하다니까, 보통 연습이 4시간 정도 진행되는 걸 감안하면 연습 중간 쉬는 시간에 적절히 간식을 들고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잠시 후 받은 한 통의 전화. 지휘자 사정으로 연습이 6시쯤에 끝날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바이올린 파트의 선배가 파트원 전부에게 저녁을 사주기로 했다나. 간식을 찾아서 가기에도 빠듯한 시간. 또 시간에 맞춘다 하더라도 저녁 식사 직전에 간식이라니. 하지만 이미 넣어놓은 주문을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 사실 에그 타르트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유포니아의 연습 장면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황했다. 아무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정체는 극심했지만 버스는 한산한 전용차로를 유유히 내달렸다. 덕분에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건 문제가 없었는데, 도로 사정은 시내도 마찬가지로 좋지 않았다. 서울. 언제나 불쾌감을 안겨주는 도시. 세상에서 가장 열정적인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불행과 피로를 향해 달려가도록 부추기는 도시. 삶에 피곤함의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고, 하루하루 지쳐가도록 만드는 괴상한 도시. 종종 이렇게 한없이 혐오감이 들게끔 하는 서울이다.

버스를 포기하고 지하철로 갈아타, 이대역에서 내려 서둘러 베이커리를 찾았다. 에그 타르트는 이미 포장 완료되어 있었다. 묵직한 비닐 주머니를 양속에 하나씩 들고, 지름길로 내달렸다. 무더운 날씨. 땀은 비 오듯 흘러내렸다.

대강당에 들어섰을 때, 단원들은 생상스 3번의 피날레 부분을 연습하고 있었다. 비록 템포는 느리고, 음정도 제각각에 호흡도 엉키고 밸런스는 실종된 상태였지만, 유포니아는 항상 이런 상태에서 출발하여 누구나 기대했던 그 정도 이상의 지점에 도달한다. 나는 고작 5분 남짓 연습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임관 후, 나는 아직까지 제대로 악기를 만지지도 못 하고 있다. 악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꺼려진다. 훈련소에 있을 때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바이올린이었는데. 배워가던 비브라토 기술은 다 까먹고, 마치 이제 막 바이올린 배우는 사람처럼 활로 비브라토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보면 실소를 할 지경이다.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단순한 이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몇 달 전에는 어렴풋이나마 그려졌던 지향점이, 이제는 안개 속에서 그 향방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단 5분. 그걸로 충분했다. 내가 다시 악기를 연습해야 할 이유를 깨닫고, 앞으로 10년간 다시 연습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기에는 말이다. 바로 저 자리에 앉기 위해. 단순히 자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력으로 지휘자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 주위의 소리를 듣고, 호흡하고, 함께하기 위해. 그건 내가 한 번도 제대로 경험 해 본 적 없는, 그러나 문틈으로 살며시 엿본 적은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도달하고 싶은 지향점이었다.

에그 타르트는 생각보다 잘 팔려서 기분이 좋았다. 먹성 좋은 대학생들이라, 저녁 식사 직전이라는 상황에는 아랑곳 않는 듯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정신없이 인사를 나눴다. 생각해보면 마지막 연주로부터 겨우 5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공백의 시간은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바이올린 파트 회식에도 따라갔다. 이제는 얻어먹는 입장이 아니라 사주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선배님은 나의 작은 일조를 딱 잘라 거절했다. 그건 그것대로 그 선배님의 역할이며 입장이니 존중하기로 했다.

파트별 회식이 끝난 후, 2차로 전체 모임이 있었다. 한 공간에 모여도 결국 파트별로 갈라져 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생각해보면 입대 후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부담이 없을수록 거리낌 없이 손은 잔으로 향하고, 평소 싫어하는 쓰디 쓴 소주도 제법 달게 마실 수 있다.

아직까지는 제법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익숙했지만, 낯선 사람도 많았다. 앞으로 점점 나를 기억하고,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겠지. 이번 악장은 나와 나이가 같다. 25살이지만 이미 나이가 많은 축이라 단원들은 장난삼아 이름 뒤에 ‘옹(翁)’자를 붙여 부르기도 한다. 나로서는 나를 편하게 대해주는 동년배가 악장을 맡고 있으니 더없이 반갑지만, 앞으로는 나를 까마득한 선배쯤으로 여기고 어려워하는 후배들이 그 자리를 대신 해 나갈 것이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 과거의 시간을 다시 사는 꿈을? 아니면 이제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나? 악기를 들고 있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새로운 시간, 새로운 장소에서 조금 더 나이가 든 모습으로 낯선 듯 익숙한 듯 그 때를 살고 있기를.

밤이 늦어 돌아왔다.

2010/07/26 00:49 2010/07/26 00:49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6.

이듬해 1월. 교토의 콘서트홀에서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제88회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 이들이 연주한 곡은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곡’, 그리고 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이었다. 나는 이때 연주자가 아닌 스태프로 참가하여, 로비의 데스크를 지키며 연주회장을 찾은 관객들이 연주자들 앞으로 보내는 선물을 위탁받는 일을 했다. 연주회가 중반을 넘어가면 어차피 할 일이 없는 역할이라, 나는 로비 안에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었다. 브람스 2번 4악장의 격정적인 피날레가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교토 콘서트홀을 가득 채웠다. 나 역시 로비에서 그들에게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연주회가 끝난 뒤 대기실에 돌아가니 여기 저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그 눈물을 비웃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아직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더욱 연습에 매진했다. 3월 초, 89회 정기 연주회를 넉 달 정도 남기고 아미야로부터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서곡의 제2 바이올린 파트로 들어와 주지 않겠느냐고, 아미야 다운 매우 정중한 어조로 쓰인 글이었다. 초대의 형식을 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연주회에 설 수 있다는 ‘승낙’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정중한 글에는 그러나, “힘들게 연습 시킬 것이니 각오 하고 대답을 주십시오.”라는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저히 못 따라간다 싶으면 쫓아내도 좋으니, 같이 하고 싶습니다. 물론 쫓겨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명실공이 한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었다. 연주회를 준비하는 네 달의 기간은 결코 신나지만은 않았다. 네 달 동안 단 한곡의 곡을 붙잡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네 달의 시간을 온전히 쏟아 부어도 한 곡을 제대로 연주하기 힘들만큼, 나의 기초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120일간 하루 평균 세 시간씩 연습했는데, 악기를 잡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매주 주말에 있던 전체 연습은 한두 번 빠진 일이 있었지만, 매주 목요일 저녁 파트 연습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물론 바이올린 레슨도 계속 받았다.

2007년 7월 7일. 행운의 숫자 7이 세 번 겹쳤다 하여 길일이라던 그 날,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제89회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 연주회의 문을 연 곡은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의 서곡. 아마가사키 홀에서 천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또 천 명의 관객 중 한 사람, 백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 중 한 명의 나를 보기 위해 찾아와 준 친구를 두고, 나는 이 곡을 연주했다. 연주 시간은 10분 남짓. 그 10분 남짓의 연주를 위해 나는 300시간 이상을 연습했다. 아니 어쩌면 그 10분을 경험하기 위해 나는 일본에 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주가 끝났을 때, 나는 굳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노력의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케스트라 단원. 실현 불가능한 공상으로 치부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다음 달, 바이올린 파트의 동료들이 나를 위한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그렇게 내 유학 생활은 마감되었다. 동료들은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에서 연주 생활을 이어가게 될 터였지만, 내 경우는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오케스트라 활동을 지속해 나가겠다는 의지만은 확고했다. 그때 오랫동안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있던 이름이 떠올랐다. 바이올린 시작한지 한 달 남짓인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이름, 연세대학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유포니아. 새로운 길은 의외로 빨리 발견될 것 같았다.

7.

2007년 8월 20일. 나는 1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대부분의 짐은 배편으로 미리 부쳤으므로, 산더미 같은 짐을 들고 돌아오지는 않았다. 어깨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신만만했다. 1년 동안 실력이 조금 향상된 것에 우쭐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일에도 도전할 용기가 있고, 어떤 힘든 길도 걸어갈 성실함과 인내심이 있다고 믿었기에 자신감이 있었다.

거의 2년 만에 돌아간 학교는 완전히 낯선 공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벌써 3학년생이 되어있었지만, 기분은 흡사 새로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개강 직후, 유포니아 동아리 방을 찾았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의 문을 처음 두드릴 때만큼의 각오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오케스트라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유포니아의 동아리 방은, 채플을 들으러 다니던 대강당 1층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찾아갔을 때, 나는 그게 오케스트라 동아리의 방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비록 주말이면 전체 연습 할 공간을 찾아 시내 여기저기의 홀들을 전전해야 하긴 했어도 학교 안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상시 연습할 수 있는 커다란 공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는 거의 1년 내내 누군가가 악기 연습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유포니아의 동아리방은 너무 비좁아 열 사람만 들어가도 가득 찰 것 같았다. 푹신푹신한 소파와 컴퓨터가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 안에서 악기 연습을 할 수는 없어 보였다. 마침 동아리 방에 단원들이 몇 명 있어서 나는 입단 절차를 물어보다가 슬그머니 연습 장소에 대한 것도 물어보았다. 혹시 따로 연습할 공간이 있느냐고. 그러자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평소에 개인 연습은 대강당 양 옆의 복도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복도에서 연습을? 오케스트라마다 여건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며칠 후, 나는 유포니아의 정기 연주회를 관람하러 갔다. 서곡은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 관람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연주회의 서곡이었던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두 번째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는데,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협주곡을 연주한다는 것도 나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메인 곡은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이었다.

단원들이 개인 연습을 할 변변한 공간도 갖지 못한 오케스트라가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일본의 대학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들 중에서도 실력이 좋기로 평판이 나있다. 도쿄대나 교토대처럼 엄격한 기준으로 단원들을 선발하는 입단 절차 같은 것이 없으면서도 ‘되는 대로’ 받은 신입들로 그처럼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 개개인들이 실력을 연마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원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개인 연습을 할 수 있는 ‘학관’의 존재야 말로 그 여건의 핵심일 터였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 선배 중에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 있었는데, 연주회 후 연설 때 자신은 마음속에 늘 학관과 같은 장소를 품고 앞으로 건축 설계를 해 나가고 싶다고 했다. 물론 학관과 같은 난잡한 장소를 설계의 모델로 잡으면 낭패겠지만, ‘정이 깃드는 공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건축의 철학을 얘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도 학관은 의미가 큰 장소였다. 학교를 떠나기 전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학관을 들러 구석구석 찬찬히 살펴보았던 기억이 있다. 수업이 끝나면 늘 찾아갔던 장소. 사람들이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에 나도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이상적인 공간. 어쩌면 오케스트라를 생각할 때 무대보다도 더 기억에 남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장소일 것이다. 그런 장소의 부재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유포니아의 연주는 훌륭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악기를 시작한 지 2년. 클래식 음악을 들은 기간도 그 정도. 연주의 질을 논할 만큼의 안목이 생겼다고는 아직 자부할 수 없었지만, 2년 전 그저 무심히 연주를 바라보아야 했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무언가 다른 바가 있었다. 이날 유포니아의 연주는 나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오케스트라마다 문화가 다른 것이겠지. 아마도 유포니아는 처음부터 연주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만을 뽑기 때문에, 개인들이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 정도의 연주를 해내는 모양이로구나.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단 지원서를 제출했다. 이미 적지 않은 나이. 그러나 나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력. 유포니아는 2년 전의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저 공상의 대상일 뿐일까. 그러나 나는 그것을 직접 확인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오케스트라 동아리가 오디션을 통해 신입을 선발하는 것은 어쩌면 꼭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디션이 없는, 그러면서도 성공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오케스트라를 먼저 경험한 나에게는, 이 오디션의 존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오디션을 통한 선발은 실력 있는 단원의 유입을 담보하긴 하지만, 반드시 열정과 의지가 있는 단원의 유입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실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와 유포니아의 문화와 전통이 엄연히 다른 만큼,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디션은 미리 준비한 자유곡 1곡, 즉석에서 공개되는 초견곡 1곡의 연주를 통해 연주력을 검증하는 단계와 면접관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지원자의 성격을 파악하는 구술 면접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자유곡으로 파가니니의 기타와 바이올린을 위한 이중주곡 중에서 쉬운 악장 하나를 골랐다. 원래 친구와 합주를 하려고 찾은 곡인데, 덜 알려져 신선하면서 어렵지 않은 곡이라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최악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오디션을 본 후 며칠이 지나 유포니아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죄송합니다만 바이올린 파트에는 불합격 하셨습니다. 대신 호른을 불어볼 의향은 없으신가요?”

오디션의 벽. 그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던 내가 다시 오케스트라 생활을 그저 공상으로 여기게끔 만들기에 충분하리만큼 높은 것이었다. 다른 악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제의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호른은 제게 맞는 악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유포니아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군요. 아쉽습니다.”

8.

2007년 10월부터 나는 신촌에 있는 음악 학원에 등록하여 바이올린 레슨을 재개했다. 일본 시절부터 쉬지 않고 달려와 들끓은 열정은 쉽게 식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고독한 연습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늘 학원을 찾아가 하루 두 시간 정도 연습을 했다. 유포니아와 인연이 없는 것 같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당시의 내 학년과 실력을 고려할 때, 또 다시 유포니아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오케스트라에 대한 나의 애정과 의지와 성실함과 진지함이 실력의 한계 앞에 평가 받지 못 한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분하기도 했다.

다시 1년. 뚜렷한 목표도 없지만, 10년 동안 레슨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약속만은 지키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오케스트라 입단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연습을 포기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나 2008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학기 시작과 함께 조기 졸업 신청을 위해 학적과 사무실을 찾았다. 조기 졸업을 위해 나는 닥치는 대로 전공 수업을 들었고, 방학에도 계절 학기를 들었다. 덕분에 4점대 이상이었던 학점은 3점대로 주저앉았지만, 그래도 조기 졸업 가능 학점은 유지하면서 3학기 만에 필요한 전공 학점을 모두 이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졸업 요건에 고급 과목을 몇 학점 이상 이수해야 한다는 제한에 걸렸다. 불과 6학점이 부족해, 나는 조기 졸업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대학을 한 학기 더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남은 학교생활이 반년에서 1년으로 늘어났다.

며칠 후, 나는 유포니아에 다시 입단 지원서를 냈다. 어쩌면 이런 것이 내가 생각했던 ‘언제 나를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심지어 레슨 선생님에게도 비밀로 하고, 오디션 준비를 했다. 스즈키 교재에 수록된 헨델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 한 악장을 골라 악보를 복사하고, 문구점에서 검은색 색지와 풀을 사서 정성스럽게 악보를 정리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며 마지막 시도였다.

며칠 후 합격 통보 전화를 받았다.

[다음에 계속]

2010/04/05 06:00 2010/04/05 06:00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4.

일본 입국 첫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무거운 짐들은 공항 안의 택배 회사를 찾아 당일 배송 서비스로 부치고, 기숙사 주소와 약도가 그려진 안내장 한 장과 바이올린을 들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서는 대담하게 택시를 탔다. 일본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어의 억양에는 아무래도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얼마 후 당도한 오사카 대학의 국제학생 기숙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름한 건물이어서 첫 인상은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관리실로 들어가 일본어로 내 소개를 하려는데, 상대방이 갑자기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국제학생 기숙사인 만큼 관리실을 지키는 사람들도 유학생들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108호 A. 내가 1년 동안 생활하게 될 방으로 안내되었다. 좁은 방 안에 책상, 책꽂이, 옷장, 냉장고, 침대, 에어컨 등 시설이 빼곡히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허전해 보였다. 관리인이 돌아가고, 나는 침대에 홀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외국에서 홀로 시작하는 유학생활. 내가 바랐던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건만, 가슴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억누를 길이 없었다.

며칠 후, 오사카 대학에서 나의 지도 교수로 지정된 교수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1년 동안 공부할 캠퍼스에 가 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면담을 끝내고, 나는 캠퍼스 안을 산책하며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금관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소리의 근원에 다가갈수록, 금관악기뿐만 아니라 목관악기, 현악기 등 다양한 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끄러운 소음은 어떤 허름한 건물의 1층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구의 유리문에는 “초심자도 환영. 사양하지 말고 들어오세요.”라고 적힌 빛바랜 종이가 붙어있었다. 그곳은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습실이었던 것이다.

10월. 학기가 시작되었다. 간혹 한국인 유학생 선배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조심스럽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보통 그런 것에는 무심한 사람들이어서, ‘항상 시끄럽다’거나 ‘조금 소리가 들을만해지면 또 신입생들이 들어와 시끄럽다’란 얘기들뿐이었다. 10월 6일. 아마도 그날은 추석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작정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찾아갔다. 문을 열려는데, 마침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한 사람이 너무나 멋지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어서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고,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 혹시 입단 신청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악기를 내려놓고 물었다. “무슨 악기로 지원하시려고요?”

“바이올린이요.”

온통 어지러운 연습실 안에는, 대충 책꽂이라든가 책상 따위로 각 파트의 구역을 나눠놓고 있었다. 나는 바이올린 구역으로 안내되었다. 즉석에서 일종의 입단 테스트가 치러졌다. 입단 테스트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오케스트라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식이어서, 연주를 못 한다고 입단을 거부당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해 보려는 것이었다. 한 단원이 내게 악기를 빌려주고, 단지 1년 정도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나의 말을 참고해 적당히 쉬운 곡들이 실린 악보집 하나를 건네줬다. 그 안에서 나는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레슨 받았던 곡을 찾아내어 연주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한동안 얼굴이 화끈거려 좀처럼 고개를 똑바로 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단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날 나는 추석날 밤의 보름달이 뽐내는 아름다운 달빛을 흐뭇하게 즐기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추석을 맞아 한밤중에 한국인들끼리 모여 연 가벼운 주연(酒宴)에서, 나는 내가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밝혔고, 사람들의 성화에 바이올린을 꺼내 또 얼토당토않은 연주 실력을 피로했다. 그렇게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나의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5.

입단 둘째 날, 나는 악기를 들고 연습실로 찾아가 정식으로 입단 원서를 작성했다. 바이올린 파트 사람들과 인사도 나눴다. 그러나 내 악기 지판에 붙어있는 운지 테이프가 부끄러워, 나는 이 날은 끝끝내 악기를 꺼내보지 못 했다. 눈치껏 살펴보았으나 지판에 테이프를 붙여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 지판의 테이프를 떼어버렸다. 그리고 음정을 잡아보려 했지만, 항상 눈으로 손 짚을 자리를 확인하던 습관 때문에 영 어색하고 음정이 정확하지가 않았다. 무작정 오케스트라에 지원은 했지만, 점점 마음은 초조해져만 가고 있었다.

2학기 신입 모집은 거의 하지 않는 일본의 동아리. 여름 방학이 지나 오케스트라에 들어온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환영식 같은 것도 물론 없었고, 동아리 안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내가 단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해주는 것은, 3000엔의 단원 회비와 얼마 후 떠나게 될 합숙 훈련비를 내야한다는 회계의 전달 사항뿐이었다. 나는 아주 고독하게 오케스트라 생활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연습실로 가서 보면대 위에 악보를 펼쳐놓고, 저녁 8시 학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연습을 했다. 주로 호만이나 스즈키 교재에 실린 것들을 지루하게 반복해서 연주했다. 며칠 후 ‘아미야’란 단원이 내게 악보를 건넸다. 합숙 훈련을 가면, 오케스트라 1년차들끼리 모여 연주할 곡이라고 했다. 생각이 있으면 연주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일단 ‘예스’라고 답해버렸다. 그리고 살펴본 악보는, 내 수준에서 도저히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악보는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 제2 바이올린 파트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비로소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11월 초, 오사카 대학의 축제가 한창일 때, 오케스트라는 정기 연주회 대비 합숙 훈련을 떠났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합숙 훈련을 본격적인 연습의 시발점으로 본다. 물론 실력 미달의 신입 단원인 나는, 정기 연주회 참여 대상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견습 단원이라고 할까. 합숙 때 나는 비로소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소개되었고, 저녁 술자리에서 드디어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사용을 고집하던 경어(존댓말)를 버렸다.

합숙 훈련 중에 나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습 과정을 지켜보았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널찍한 방안의 냉랭한 공기도 단원들이 연습만 시작하면 금방 달아올랐다. 현과 목관과 금관과 타악기가 때로는 각자, 때로는 함께 소리를 낸다. 뭔가 어그러지고 맞지 않는 느낌이 들 때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엔가 하나의 소리로 모아진다. 음악 감상의 경력도, 연주 경력도 짧은 내게 그 모습은 하나의 경이였다.

실력 미달의 신입인 나는 아직 정기 연주회에 참여할 수 없어, 몇 명의 다른 초심자들과 함께 ‘피델리오’ 연습에 매진했다. 이 연주는 오케스트라 1년차들이 모여서 합숙 기간에 한 번 재미로 연주해 보는 의미밖에는 없는 것이었지만,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과 생애 처음으로 앙상블을 맞추는 소중한 첫 경험이었다.

아미야는 성심껏 지도를 해주었지만, 실력의 한계를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극복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리듬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처음 깨쳤다. 혼자서 연습할 때 늘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은 음정이었다. 그러나 앙상블을 맞출 때는 리듬을 틀리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16분 음표와 4분 음표, 온음표의 음가, 그리고 부점이나 트릴, 꾸밈음의 음가에 대한 이해와 정립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몸으로 익혀야만 했다. 모든 것이 너무 어려웠다. 어려운 부분에서 느려지지 않기, 쉬운 부분에서 빨라지지 않기, 여린 부분에서 크게 연주하지 않기, 포르테에서 작게 연주하지 않기, 쉼표 잘 지키기 등 평소 내가 악기를 연습하며 등한히 했던 모든 것 하나하나가 음악을 만들어 나감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들이었는지를 ‘혼나며’ 배워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합숙 훈련에서 돌아온 후, 나는 바로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발견한 음악 학원에 찾아가 상담을 받고, 레슨을 견학한 뒤 바로 등록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잠깐 도서관에 들렀다가 늘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찾았고, 거의 매일 저녁 8시 문을 닫을 때까지 연습을 했다. 마침 귀갓길 방향이 같았던 ‘고토’와는 매일 함께 하교를 하다 보니 제법 친해졌다. 더군다나 고토와는 바이올린 초보의 애환도 공유하고 있었다. 레슨 받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늘지 않는 실력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해의 겨울을, 오케스트라에 대해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열정으로, 타지(他地)에서도 외롭지 않게 이겨낼 수 있었다.

[다음에 계속]

2010/03/29 06:00 2010/03/29 06:00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1.

2005년 8월. 한여름 밤의 습습한 공기를 가르며, 학교 대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대강당에서는 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강당 앞은 연주회를 관람하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입구에서 프로그램 북을 하나 사서 대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자리를 찾기 위해 강당 안을 쓱 둘러보았다. 아직 연주 시작까지 시간이 좀 남은 탓도 있었겠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빈자리가 많았다. 친분 있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관객들의 표정은 그저 여유로울 뿐이었지만, 강당 안에는 흥분과 긴장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저 무대 뒤편에서 연주 시작을 초초하게 기다리는 연주자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었을까.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고서, 프로그램 북을 펄럭였다.

시간이 되고, 연주자들이 입장했다. 나는 그 무리를 눈길로 더듬어 지인(知人)의 얼굴을 찾았다. 무대가 그리 가깝지 않았지만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너를 보러 왔지.’

내가 자발적으로 찾아간 첫 오케스트라 연주회였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날 연주될 곡들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프로그램 북에 적힌 곡 해설은 꼼꼼히 읽어봐도 이해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날 연주된 곡들의 제목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첫 곡은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내가 이 연주회를 보러간 유일한 이유였던 지인(知人)은, 연주 경력이 길지 않았던 때문인지 이 한 곡만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이어서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과 (인터미션이 있은 후에) 슈만의 ‘교향곡 4번’이 연주 될 때는 한층 더 무심히 연주를 지켜보았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머물며, 나는 관조(觀照)했다. 시선은 고정하고 천 갈래 만 갈래의 생각을 상대를 향해 뻗어보았지만 그 본질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 했다.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박수를 쳤고, 연주자들은 뿌듯해 했다. 어떤 연주자는 눈물을 흘렸고, 나는 그것을 비웃었다. 작위(作爲)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흘리는 눈물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이기 위해 흘리는 눈물도 작위다. 그리고 나는 작위를 경멸한다.

내가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 역시 이 해 8월의 일이었다.

2.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음악사 강의를 신청했다. 이 당시에 나는 음악보다는 차라리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림이나 조각이 더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시각적으로 현현(顯現)된 예술품의 미(美)를,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서점에서 아무 미술사 책이나 골라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지(無知) 그리고 무감(無感)의 벽을 넘어서면, 책의 저자들이 그토록 경탄하고 숭배하는 예술품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음악사 강의를 신청한 것은, 미술사와 병행해서 공부하면 예술을 감상하는 총체적인 심미안을 기를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음악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둘 있었다. 두 교수 모두 같은 교과서를 채택했는데, 그 중 한 교수가 해당 교과서의 저자였다. 기왕이면 저자직강을 듣고 싶었으나, 시간표 여건을 고려 해 다른 교수의 강의를 신청했다. ‘윤혜준.’ 나이 40세 정도의 여자 교수였다. 음악사는 수업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고, 시험 문제는 세세하게 출제되는 까다로운 과목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혹시 수업 진행도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교수는 의외로 시원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러나 교수의 시원스런 성격이 음악사 공부의 모든 난제를 해결 해 줄 수는 없었다. 수업은 오늘날에는 그 음악 원형의 파편조차 알 길이 없는 고대 그리스의 음악 이론부터 시작하여 반주도 없고 박자도 없고 조성은 모호하고 심지어 가사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중세의 성가(聖歌)를 배우는 데에만 거의 한 달의 시간을 할애했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점차 옅어졌고, 수업 시간을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삼는 빈도가 늘어났다. 쪽지 시험 같은 것을 보기도 했는데, 대충 책의 내용을 암기하고 보면 점수는 잘 나왔지만, 결국 음악을 글로만 배우게 되었구나 싶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과가 있었던 터라 피곤해서, 오후에 음악사 수업을 들어가서는 또 금방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졸았을까. 귓가에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혹은 CF에서 들어본 적이 있음직한 음악이었다. 고개를 들어보았다. 빔 프로젝터가 하얀 스크린 위에 영상을 쏘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텅 빈 성당에 홀로 앉아 첼로를 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너무나도 담백한 연주. 그러나 풍부한 소리. 성당을 하나의 거대한 울림통으로 삼아 연주를 하는 듯 했다.

로스트로포비치. ‘거장’이라는 칭송이 어울리는 마지막 연주자. 그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은, 음악사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느낀 음악이었다. 나는 로스트로포비치란 이름도 이날 처음 들었고, 우아한 선율로 시작하는 저 익숙한 첼로 음악이 바흐가 첼로 솔로를 위해 작곡한 6개의 모음곡 중 첫 번째 모음곡의 서곡(프렐류드)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얼마 후 나는 처음으로 음대 도서관을 찾았고, 거기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리코딩을 대여해, 전곡을 들었다. 무지(無知)가 지(知)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후 음악사 수업 시간에 조는 일은 없어졌다.

윤혜준 교수는 자신이 창단했다는 ‘유포니아’라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주회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또 어려운 곡에 도전하고 그것을 소화해내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한지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유포니아에만 특별히 적용되는 관대함 속에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대학생들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이야기는 학생들의 동경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 역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 가능성 없는 공상일 뿐이었다. 유포니아의 존재를 알았을 당시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였으니까. 내 인생은 대학생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와는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담담한 수긍이었지만, 가슴 한 구석에 서글픔을 남겨놓았다.

3.

이듬 해, 나는 일찌감치 2학년 1학기 등록을 하는 대신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동아리 활동을 비롯하여 학교생활 일체를 접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호주와 이탈리아, 그리스를 여행했다. 요리를 배우고, 그림을 배우고, 외출을 하지 않는 날에는 방 안에서 소설을 읽었다. 바이올린 레슨도 계속 받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과 친해져보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시작은 바이올린 음악이었다. 바이올린은 내가 배우고 있는 악기인 만큼 친해지기 쉬웠다. 내가 최초로 구입한 클래식 음반은 헨릭 셰링이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였다. 며칠 동안 이 음반을 계속 들었다. 그렇게 셰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비발디의 사계, 비탈리의 샤콘느,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 소품들. 유명한 곡들 위주로 하나 둘 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을 듣고 나니 사라사테, 비에냐프스키, 비오티 등 이전에 몰랐던 작곡가의 곡들까지 찾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클래식 음악의 벽은 높게 느껴졌다. 특히 교향곡을 듣는 것이 어려웠다. 교향곡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베토벤부터 도전했지만, 단 한 곡도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쉬지 않고 듣지 못 했다. 그는 이런 장대한 교향곡을 무려 9곡이나 작곡했다.

인터넷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 추천 리스트에는 숨 막힐 정도로 많은 곡이 소개되어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라고 쉽게 말해왔지만, 천 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클래식의 세계에는, 내가 밤하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별의 숫자보다도 많은 곡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하나하나의 곡들을 예술품으로 대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음악을 진지하게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에게 음악은 ‘배경’ 정도의 의미 밖에는 없었다. 음악을 틀어놓고 다른 작업을 한다든가, 공부하다 지쳤을 때 신나는 음악으로 기분 전환을 하는 정도의 기능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왜 음악에서 그 이상의 것을 구해야 할까? 음악은 즐거운 것, 즐거워야만 하는 것, 반드시 인간의 감성과 호응하는 것이라 배웠다. 사람들은 모두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과 친한 듯이 보이지만, 평소 우리가 음악에 대해 생각하는 것, 알고 있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음악의 전부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의 지평이, 조금은 넓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2006년 9월, 교환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가져갔다. 10년은 레슨 받기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시작한 바이올린이다. 교환학생을 이유로 배움을 중단하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계속]

2010/03/22 06:00 2010/03/22 06:00
Posted
Filed under 음악



유포니아 21회 봄 연주회

일시: 2010년 3월 5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장소: 연세대학교 대강당

프로그램

-1부-

드보르작, 슬라브 무곡 Op.46 8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2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벌써 세 번째 연주인가. 유포니아 사람들은 곧잘 유포니아에 대한 감정을 ‘애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던데, 나의 감정은 훨씬 소박한 것이다. 감사한 마음. 그뿐이다.



 

2010/03/05 03:00 2010/03/05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