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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5년 8월. 한여름 밤의 습습한 공기를 가르며, 학교 대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대강당에서는 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강당 앞은 연주회를 관람하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입구에서 프로그램 북을 하나 사서 대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자리를 찾기 위해 강당 안을 쓱 둘러보았다. 아직 연주 시작까지 시간이 좀 남은 탓도 있었겠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빈자리가 많았다. 친분 있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관객들의 표정은 그저 여유로울 뿐이었지만, 강당 안에는 흥분과 긴장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저 무대 뒤편에서 연주 시작을 초초하게 기다리는 연주자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었을까.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고서, 프로그램 북을 펄럭였다.

시간이 되고, 연주자들이 입장했다. 나는 그 무리를 눈길로 더듬어 지인(知人)의 얼굴을 찾았다. 무대가 그리 가깝지 않았지만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너를 보러 왔지.’

내가 자발적으로 찾아간 첫 오케스트라 연주회였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날 연주될 곡들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프로그램 북에 적힌 곡 해설은 꼼꼼히 읽어봐도 이해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날 연주된 곡들의 제목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첫 곡은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내가 이 연주회를 보러간 유일한 이유였던 지인(知人)은, 연주 경력이 길지 않았던 때문인지 이 한 곡만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이어서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과 (인터미션이 있은 후에) 슈만의 ‘교향곡 4번’이 연주 될 때는 한층 더 무심히 연주를 지켜보았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머물며, 나는 관조(觀照)했다. 시선은 고정하고 천 갈래 만 갈래의 생각을 상대를 향해 뻗어보았지만 그 본질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 했다.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박수를 쳤고, 연주자들은 뿌듯해 했다. 어떤 연주자는 눈물을 흘렸고, 나는 그것을 비웃었다. 작위(作爲)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흘리는 눈물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이기 위해 흘리는 눈물도 작위다. 그리고 나는 작위를 경멸한다.

내가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 역시 이 해 8월의 일이었다.

2.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음악사 강의를 신청했다. 이 당시에 나는 음악보다는 차라리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림이나 조각이 더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시각적으로 현현(顯現)된 예술품의 미(美)를,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서점에서 아무 미술사 책이나 골라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지(無知) 그리고 무감(無感)의 벽을 넘어서면, 책의 저자들이 그토록 경탄하고 숭배하는 예술품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음악사 강의를 신청한 것은, 미술사와 병행해서 공부하면 예술을 감상하는 총체적인 심미안을 기를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음악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둘 있었다. 두 교수 모두 같은 교과서를 채택했는데, 그 중 한 교수가 해당 교과서의 저자였다. 기왕이면 저자직강을 듣고 싶었으나, 시간표 여건을 고려 해 다른 교수의 강의를 신청했다. ‘윤혜준.’ 나이 40세 정도의 여자 교수였다. 음악사는 수업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고, 시험 문제는 세세하게 출제되는 까다로운 과목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혹시 수업 진행도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교수는 의외로 시원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러나 교수의 시원스런 성격이 음악사 공부의 모든 난제를 해결 해 줄 수는 없었다. 수업은 오늘날에는 그 음악 원형의 파편조차 알 길이 없는 고대 그리스의 음악 이론부터 시작하여 반주도 없고 박자도 없고 조성은 모호하고 심지어 가사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중세의 성가(聖歌)를 배우는 데에만 거의 한 달의 시간을 할애했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점차 옅어졌고, 수업 시간을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삼는 빈도가 늘어났다. 쪽지 시험 같은 것을 보기도 했는데, 대충 책의 내용을 암기하고 보면 점수는 잘 나왔지만, 결국 음악을 글로만 배우게 되었구나 싶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과가 있었던 터라 피곤해서, 오후에 음악사 수업을 들어가서는 또 금방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졸았을까. 귓가에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혹은 CF에서 들어본 적이 있음직한 음악이었다. 고개를 들어보았다. 빔 프로젝터가 하얀 스크린 위에 영상을 쏘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텅 빈 성당에 홀로 앉아 첼로를 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너무나도 담백한 연주. 그러나 풍부한 소리. 성당을 하나의 거대한 울림통으로 삼아 연주를 하는 듯 했다.

로스트로포비치. ‘거장’이라는 칭송이 어울리는 마지막 연주자. 그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은, 음악사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느낀 음악이었다. 나는 로스트로포비치란 이름도 이날 처음 들었고, 우아한 선율로 시작하는 저 익숙한 첼로 음악이 바흐가 첼로 솔로를 위해 작곡한 6개의 모음곡 중 첫 번째 모음곡의 서곡(프렐류드)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얼마 후 나는 처음으로 음대 도서관을 찾았고, 거기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리코딩을 대여해, 전곡을 들었다. 무지(無知)가 지(知)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후 음악사 수업 시간에 조는 일은 없어졌다.

윤혜준 교수는 자신이 창단했다는 ‘유포니아’라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주회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또 어려운 곡에 도전하고 그것을 소화해내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한지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유포니아에만 특별히 적용되는 관대함 속에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대학생들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이야기는 학생들의 동경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 역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 가능성 없는 공상일 뿐이었다. 유포니아의 존재를 알았을 당시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였으니까. 내 인생은 대학생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와는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담담한 수긍이었지만, 가슴 한 구석에 서글픔을 남겨놓았다.

3.

이듬 해, 나는 일찌감치 2학년 1학기 등록을 하는 대신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동아리 활동을 비롯하여 학교생활 일체를 접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호주와 이탈리아, 그리스를 여행했다. 요리를 배우고, 그림을 배우고, 외출을 하지 않는 날에는 방 안에서 소설을 읽었다. 바이올린 레슨도 계속 받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과 친해져보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시작은 바이올린 음악이었다. 바이올린은 내가 배우고 있는 악기인 만큼 친해지기 쉬웠다. 내가 최초로 구입한 클래식 음반은 헨릭 셰링이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였다. 며칠 동안 이 음반을 계속 들었다. 그렇게 셰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비발디의 사계, 비탈리의 샤콘느,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 소품들. 유명한 곡들 위주로 하나 둘 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을 듣고 나니 사라사테, 비에냐프스키, 비오티 등 이전에 몰랐던 작곡가의 곡들까지 찾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클래식 음악의 벽은 높게 느껴졌다. 특히 교향곡을 듣는 것이 어려웠다. 교향곡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베토벤부터 도전했지만, 단 한 곡도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쉬지 않고 듣지 못 했다. 그는 이런 장대한 교향곡을 무려 9곡이나 작곡했다.

인터넷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 추천 리스트에는 숨 막힐 정도로 많은 곡이 소개되어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라고 쉽게 말해왔지만, 천 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클래식의 세계에는, 내가 밤하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별의 숫자보다도 많은 곡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하나하나의 곡들을 예술품으로 대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음악을 진지하게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에게 음악은 ‘배경’ 정도의 의미 밖에는 없었다. 음악을 틀어놓고 다른 작업을 한다든가, 공부하다 지쳤을 때 신나는 음악으로 기분 전환을 하는 정도의 기능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왜 음악에서 그 이상의 것을 구해야 할까? 음악은 즐거운 것, 즐거워야만 하는 것, 반드시 인간의 감성과 호응하는 것이라 배웠다. 사람들은 모두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과 친한 듯이 보이지만, 평소 우리가 음악에 대해 생각하는 것, 알고 있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음악의 전부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의 지평이, 조금은 넓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2006년 9월, 교환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가져갔다. 10년은 레슨 받기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시작한 바이올린이다. 교환학생을 이유로 배움을 중단하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계속]

2010/03/22 06:00 2010/03/22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