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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음악/공연

한때는 도시의 번잡함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마음이 엷어지더니, 이제는 가끔 그것을 그리워하게까지 되어버렸다. 화려한 불빛, 시끄러운 소음, 메마른 아스팔트 위에 납작이 붙어 달리며 검은 매연을 토해내는 자동차들, 도시의 그림자를 형성하는 고층 빌딩들, 그리고 저 높은 곳에 별 대신 빛나는 것은 불 켜진 창(窓) 하나. 그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 내가 도시에 마음이 이끌리고 마는 것은 겉모습이 때문이 아니야. 한 꺼풀 벗겨놓고 보고 싶은 것이다. 손을 넣었을 때 뜨겁다고 해서 반드시 끓고 있는 것은 아니지. 도시의 공허함, 뜨겁지만 결코 끓어오르지 않는 이 도시의,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1도’의 부재를, 나는 애달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에 굶주려 있는 걸까. 나와 만나는 사람들은 왠지 내게서 존경심을 기대한다. 내가 그에 대해 고개 숙이고 경탄하며 그의 일과 그의 능력과 그의 열정을 존경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을 그 나름의 위치에서 존중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천성이 무언가에 들뜨는 것과 거리가 먼 나는 제아무리 열정적인 사람을 만나더라도 반드시 그 열정의 이면에 숨겨진 권태로움, 지루함, 평범함 그리고 인간적인 약점들을 먼저 발견하게 된다. 토해내는 열변은 무대 위의 대사처럼 지리멸렬하고, 그 과장된 몸짓들은 한낱 그림자 연극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항상 그랬다.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무심하게 바라보아 왔다. 그리고 항상 깨닫게 된다.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 대해 품는 지독한 경멸의 절반쯤은 항상 나를 향해있다. 타인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숨 막히는 권태로움과 평범함이 실은 다 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때로는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다.

<이렇게 안 생겼다>


프로그램

J.S. Bach : Partita No.3 in E Major, BWV 1006

L.V. Beethoven : 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5 in F Major, Op.24 <Spring>

D. Shostakovich : Five Pieces for Two Violins and Piano

J. Brahms : 3rd Sonata for Violin and Piano in d minor, Op. 108


지난 일요일, 연주회를 보러 갔다. 오랜만의 연주회. 보통 솔리스트의 리사이틀은 잘 보러가지 않지만, 근래에는 괜찮은 오케스트라 공연이 없었고, 간혹 있더라도 시간이 맞지 않아 보러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통역 업무의 스트레스로부터 간신히 해방된 주말, 나는 녹았다 굳은 캐러멜처럼 침대나 소파 위에 들러붙어 있었다. 연주회 당일인 일요일 오후까지도 나는 달콤한 무기력함에 젖어 표를 예매할 생각도 않았다. 그러나 리사이틀의 매력적인 프로그램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고, 결국 공연 시작 6시간 전에 표를 예매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나가 저녁 식사를 하고, 나는 식당에서 바로 예술의 전당을 향해 출발했다.

콘서트홀과 오페라 하우스가 모두 휴관이었던 예술의 전당에는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날씨가 많이 풀렸는데도 사람 없는 공연장의 공기는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공연 시작 40분 정도를 남기고 로비로 들어섰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디저트로 먹을 케이크 한 조각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커피숍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리사이틀 홀 앞에는 공연 시작을 기다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늘 이런 무명 연주자의 독주회를 보러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했었다. 연주자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있는 사람들일까? 저마다 인사 건네고 담소 나누는 모습으로 보아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오직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 홀로 연주회장을 찾은 나는, 달리 할 일도 없어서 유일하게 문을 연 가게인 앨범 가게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괜히 힐러리 한의 신보를 한 장 샀다. 히그던과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녹음된 앨범이었다. 힐러리 한이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들으러 간 적이 있다. 그때는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해석의 연주로 대단한 실망감과 그 이상의 의아함을 안고 공연장을 나왔던 기억이 있다. 과연 힐러리 한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앨범에 담은 해석은 어떠할지 궁금해졌다.

연주 시작 10분 전에 리사이틀 홀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 홀을 들어가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간혹 유명 연주자들의 리사이틀을 보긴 했지만, 명성 있는 연주자들은 리사이틀이라 해도 객석이 몇 안 되는 리사이틀 홀이 아니라 콘서트홀에서 연다. 그 거대한 연주회장을 가득 채우지 못 하는 솔로 악기의 소리가 때로는 애처롭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 아담한 리사이틀 홀을 가득 채울 솔리스트의 연주가 기대되기도 했다.

연주자가 등장했다. 첫 곡은 바흐의 파르티타 3번. 무반주의 솔로곡이다. 첫 악장 프렐류드는, 내가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동경하고 목표로 삼았던 곡. 이 곡에 대한 기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주는 처참했다. 내 생애, 프로의 연주로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인 연주는 처음 들었다. 첫 마디부터 불안한 음정에, 나는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고, 홀의 음향을 의심했고, 악기의 조율 상태를 의심했다. 불안한 음정은 연주가 계속 되면서도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추어처럼 먼저 소리를 내고 음정을 찾아가면 어쩌잔 말인가? 성부간 밸런스가 전혀 잡히지 않은 것은 곡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기본 기량의 부족 때문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바흐 연주에 대해 말하자면, 마치 연주회 2~3일 전에 처음 악보 펼치고 대충 읽은 다음 무대에 올라온 느낌이랄까? 바이올리니스트들의 구약성서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이 곡을 고르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무런 준비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프렐류드만 두고 말할 것 같으면, 내게 한 달의 시간만 준다면 이 날 이 연주자의 연주보다 더 잘 연주할 수도 있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이미 연주회는 망쳤다. 뒤이어 연주된 베토벤이나 쇼스타코비치, 브람스는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그 연주들의 수준도 하나 같이 엉망이었다. 쇼스타코비치 연주 때는 웬 고등학생 제자 한 명을 데리고 나왔는데, 잔뜩 얼어붙은 어린 학생을 옆에 세워 놓으니 자신감이 붙었는지 연주자 자신은 신나게 연주를 했지만, 덕분에 세컨드 바이올린을 맡은 학생의 소리는 완전히 묻혀서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브람스 연주 때는 반주자와의 호흡마저 불안 해 보였다. 특히 리듬의 매력을 살리는 3악장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4악장에서는 활 털이 두 가닥이나 끊어져나가서 비주얼 적으로는 격정을 잘 표현했지만, 그뿐이었다.

인터미션 시간에 나는 하마터면 옆에 앉은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을 할 뻔했다. 혹시 연주자와 친분이 있어서 오셨냐고. 나는 연주를 들으러 왔지만, 이렇게 처참한 연주회는 처음이라고…….

이날 연주만 놓고 본다면, 나는 이 연주자가 재학 시절에 오케스트라 수석까지 맡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수석을 얼굴로 뽑지 않는 한에야 말이다. 그러나 만일 이 연주자가 그래도 기본 기량은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날 연주회에 대한 준비가 소홀, 아니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이건 감히 티켓을 판매한 연주자에게는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각 악장이 끝날 때마다 놓치지 않고 박수를 쳐댔던 관객들은 음악에 대해 전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보통은 연주회가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관객들이, 이날은 로비에 모여 사교의 장을 열고 있었다. 그 무리 속에서 탤런트도 두 사람이나 발견했다. 중견 연기자 이정길과 박상원. 이들도 오늘 연주자와 무슨 관련이 있는 사람들인가?

옷 잘 차려입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등장해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시시덕거리는 소위 상류층 사람들이 음악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이용하든 난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이런 사교의 장이라도 그 핵심이 되는 연주회가 정작 이 꼴이어서는 이 모든 모습 자체가 너무 우스꽝스럽지 않나.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멋졌어요.’ 홀을 빠져나오면서도 몇 번은 들었던 말이다. 나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다른 건 잘 모르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데, 정말 엉망이었어요.’

2011/02/22 02:15 2011/02/22 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