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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이라는 동물은 생존을 위해 ‘조직’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조직은 개인의 삶을 어느 선까지 통제할 수 있을까? 또 어느 선까지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 한 것일까? 조직에 매몰된 채 살아가기보다는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기꺼이 죽겠다는 것은 생존 본능에 위배되는 태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게 되는 것일까? 나는 조직의 존속이 개인에 선행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문학적인 관점에서 단지 생존하는 것은 이미 죽은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

군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모든 생활을 조직 문화 안에서 영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훌륭한 군인일수록 조직 밖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 하고, 그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형태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12월 30일(금요일) 같은 날에 회식 같은 걸 할 수 있는 것이겠지. 각 개인들에게 독자적인 송년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고려가 애초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날 저녁 7시 반에 대전 문화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대전 시향의 송년 음악회를 예매 해 둔 상태였다. 회식에는 불참할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지만, 맛있는 공짜 밥을 거절할 필요는 또 없는지라(이 날 회식 장소는 샐러드 바가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제일 먼저 식당으로 달려가서 혼자서 식사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도착해서 식사 메뉴를 고를 때에 인사를 하고 나와 버렸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지만 단 한 가지, 식당의 주차 시스템이 엘레 파킹이라는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 했다. 주차해 둔 차가 나올 때까지 15분 정도가 걸려서 하마터면 연주회에 늦을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연주 시작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2011 대전시향 송년음악회 포스터


연주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과 합창 교향곡.

에디슨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전구를 발명하여 인류의 밤을 밝혔을 것이고, 상대성원리가 물리 세계의 자명한 원리라면 아인슈타인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이론이 정립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토벤이 없었더라면 인류에게 합창 교향곡이 울려퍼지는 연말은 존재하지 않았겠지. 예술이라는 것은 바로 그 대체 불가능한 무엇이 아닌가 싶다.

연말이면 여기저기서 연주되는 합창 교향곡. 돈 벌이가 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들 하니까 괜한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인지. 하긴 나도 묘한 의무감 때문에 굳이 큰 기대가 없으면서도 합창 교향곡을 들으러 발걸음을 옮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연주는 마치 바람 빠진 타이어를 달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아무런 긴장감도 고양감도 느낄 수 없었다. 연주 시작 전에 악장 간 박수는 삼가달라고 안내 방송을 내보내고 전광판에 친절하게 연주되고 있는 악장까지 표시 해 주었지만 관객들인 하나의 악장이 끝날 때마다 여지없이 박수를 쳐댔다. 차라리 안내 방송이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덜 창피했을 것을. 지휘자가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라면, 언제든 치고 싶을 때 치십시오.”라고 말했더라면 훨씬 멋지지 않았을까. 굳이 교육이 안 되는 관중을 교육하려고 애쓰다가 창피를 당하는 꼴이란.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재채기 아저씨. 타고난 리듬감은 퍼커션 주자 이상이다. 보통 연주 중간에 재채기 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짜증을 내게 마련인데, 절묘한 타이밍에 터져 나오는 재채기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피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주회 중 가장 재밌었어.

앙코르 곡은 올드 랭 사인. 참 훌륭한 연주였다. 메인 곡도 그렇게 좀 연주 해 주지.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바이올린 연습을 하면서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손가락을 바라볼 때 느끼는 절망감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을까?

어쨌든 한 해를 보내기 전에 해야 할 것은 해버렸다는 느낌. 어찌 보면 쓸데없는 의무감 같은 걸 지고 연주회를 보러가는, 타성에 젖은 나 같은 관객이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가는 길. 카 오디오로 베토벤 9번을 재생시켰다. 평소보다 볼륨을 몇 단계 올린다. 마음이 편안하다. 그래, 이게 진짜 음악 감상이지.

2012/01/12 00:41 2012/01/12 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