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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동생은 스쿠터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 아침에 엄마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인터넷으로 열심히 버스 시간표를 확인 해 보더니, 전화를 끊고는 “남원으로 가서 아빠랑 만나 저녁 먹기로 했어.”란다. 같이 내려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지만, 주말까지 지방에서 보낼 생각은 없다. 게다가 남원은 이미 여행으로 두 차례나 간 적이 있다. 광한루니 만인의총이니 하는 관광지를 새삼 둘러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결국 나는 엄마를 버스 터미널까지 태워주는 역할만 수행하기로 했다.

따사로운 토요일 오후. 혹시 시내가 나들이 나온 행객들의 차들로 막힐까봐 조금 멀리 돌아가기는 하지만 일부러 고속도로를 탔다. 시원하게 뚫린 길을 달리는데, 기름 게이지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버스 출발 10분 전에 간신히 엄마를 터미널 앞에 내려줄 수 있었다. 버스 표는 미리 예매를 했다니까 시간은 충분하겠지. 나는 그대로 차를 빼서 차들로 붐비는 터미널 인근 비좁은 도로를 누비며 아슬아슬하게 내비게이션을 조작했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검색하고 ‘안내’ 버튼을 누르는데 뒤에서 “빵”하고 경적 소리가 울렸다. 역시 멀티태스킹은 어렵다. 내비게이션은 서울 도심으로 향하는 경로를 설정하고 안내를 시작했다.

토요일 오후에 서울 도심으로 차를 끌고 갈 생각을 하다니, 내가 잠시 미쳤던 게 틀림없다.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부터 꽉 막혀 있었다. 결국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1번, 2번, 3번을 다 듣고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 재생될 무렵에야 간신히 광화문 교보문고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잠시 동선을 망설였지만, 우선 지하철을 타고 명동으로 갔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대한음악사. 이곳에서 악보를 하나 골랐다. 차이코프스키의 왈츠 스케르초.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풍의 소품이다. 내 수준에는 어림도 없는 곡이지만, 동경하는 곡은 악보를 구입하여 높은 이상으로 가슴에 품어두는 것도 좋다. 오래 연습을 쉬었던 3도 화음 스케일 연습을 슬슬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명동에서 악보를 산 뒤,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으로 회현동 남대문 시장을 찾았다. 오늘의 목적지는 남대문 지하상가, 일명 ‘도깨비 시장’으로 불리는 수입품 전문 매장이다. 이름은 몇 번 들은 적이 있지만 직접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골목에 숨어있다시피 한 입구로 들어서니, 정말 두 사람 지나다니기에도 비좁은 통로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천막 같은 것을 둘러 겨우 구획을 나눈 네댓 평 남짓의 비좁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이곳이 ‘도깨비 시장’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늘 볼 일은 주류 매장에서 칵테일의 주재료가 되는 새로운 술들을 몇 병 구입하는 것이었다. 아빠의 주문으로 마티니의 재료인 진과 베르무트를 비롯하여 다섯 병의 술을 골랐더니 가격이 딱 10만원이었다. 가격은 저렴했지만, 다섯 병 술의 무게는 상당해서 들고 옮기는 게 일이었다. 상점 주인은 명함 한 장을 내어주며 다음부터는 이 정도 양이면 택배로 주문해도 좋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술병들을 직접 보고 만지고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새로운 수입업체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듯한 그랑 마니에를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아쉬움을 품은 채 뒤돌아서는 것도 이렇게 직접 발품 파는 쇼핑의 재미 아닐까. 술 가득 담긴 검은 봉지를 한 손에 든 채 회현동의 골목 시장을 누비다가 시장통의 칼국수 집에 들어가서 다대기를 푼 얼큰한 칼국수 한 그릇으로 저녁도 해결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역시 교보문고. 술과 악보를 차에 실어놓고 느긋한 마음으로 산책하듯 서점 이곳저곳을 누볐다. 늘 제목은 새롭지만 내용은 비슷해 보이는 책들이 진열되어있는 베스트셀러 코너도 둘러보고, 일본 서적 코너에서 문고판 책도 뒤적여 봤다. 결국 음악이론 책과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을 골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두 시간 무료 주차를 받았지만, 주차료로 1만 1천원이나 지불해야 했다. 서울 시내에서 4시간이나 주차한 대가치고는 비싸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오는 길에 듣다 만 프로코피에프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다시 재생시켰다. 안단티노 악장의 신비한 듯 구슬픈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뒷좌석에 묵직하게 자리한 술병들이 이따금 서로 부딪혀 내는 딸깍 소리가 흐뭇하게 느껴졌다.

텅 빈 집안의 1층을 독차지하고, 소파 위에 드러누워 TV로 새로운 영화 VOD를 검색해봤다. 요절한 비운의 천재 음악가 앙드레 마티유의 생애를 다룬 영화 ‘앙드레 마티유’가 올라와 있기에 망설일 것 없이 재생을 눌렀다. 음악은 황홀했지만, 영화 자체는 지루했다. 어디쯤부터 잠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눈을 뜨니 한낮이었다. 커튼 사이로 봄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 꺼내놓은 술병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초록빛 베르무트, 투명한 진, 연한 갈색의 아프리콧 브랜디……. 그 색색의 빛깔에 홀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못한 채 멍하니 술병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2011/03/14 23:29 2011/03/14 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