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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서재/편지
어떤 때는 모든 일들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때는 주위의 모든 것들이 미쳐 돌아가는 것만 같다. 그런 때에, 시계의 저 가느다란 바늘이 매초마다 정확히 정해진 간격만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나무 그늘에 숨은 채 우렁차게 울어대던 매미가 어느 날 바짝 마른 시체가 되어 내 발 아래 나뒹굴었다. 여름은 여전한가? 나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상징은 그렇게 감상적 시간의 흐름을 농락하지만, 그러나 나는 아직도 들끓어 오르는 한여름 속에 있다.

일본 열도는 이상 고온에 시달리고 있다. 며칠 전에는 일본 기상 관측 사상 최고 기온이 기록되기도 했다. 달아오른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아니, 실제로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그들은 살해당한 것이다. 바로 태양에게 말이다!
아스팔트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것만 같은 한낮의 열기 속에 서 있으면, 목덜미로 태양 광선의 무게가 실리는 것만 같다. 신체는 열기를 날숨에 실어 통해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자 하지만, 입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그저 뜨겁고 습습할 뿐이다.

생명의 유무를 떠나서 모든 물체가, 이 가혹한 날씨에 대항할 어떤 뾰족한 방법도 없이,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끈기 있는 인내심이야 말로 최상의 해결책이 아닐까. 그렇다, 어떤 것들은 내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인내하는 방법’을 익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위에 밀려 아득히 멀어졌던 정신이 어느 순간 돌아오면, 다른 차원으로 산산이 흩어졌던 시간들이 한 순간에 덮쳐오는 것만 같다. 그럴 때면 이 긴 하루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에, 이 여름이 아직도 건재함에, 내가 아직도 이 나라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나는 왜 여전히 스물한 살이란 말인가?

어째서 인간은 과거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서는 쇠하고 희미해져버린 가능성에 애석해하고, 미래의 시간을 상상하면서는 너무나 작아져버린 희망에 절망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과거에서도 또 미래 그 어디에서도 행복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도, 그려보지도 못 한 채 현재의 시간을 의미 없이 흐르는 과거의 강으로 흘려보내며, 모든 불가측성을 배제한 가장 형편없는 미래로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아티쿠스여, 장기 놀이를 기억하는가? 네모반듯한 모양의 세계위에 갖가지 말들이 늘어서서, 그 작은 천하를 얻기 위해 싸운다. 장기 놀이를 하는 선수는 가급적 자신의 말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지만, 결국 죽이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 작은 세상은 말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혼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마치 신처럼 세상을 관조하고 모든 말들을 멋대로 움직이던 선수도 모든 앞길을 꿰뚫어보지는 못 한다.

이 혼전 속에서 어떤 말은 자신의 죽음과 맞바꾸어 세상의 형세에 변모를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말은 그저 의미 없이 죽어버리기도 한다. 선수가 미처 깨닫지 못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빈번하다.

아티쿠스여,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이, 즉 어디에선가 날쌘 자객이 날아들어 순식간에 의미도 없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장기판 위에서 오직 한 걸음, 앞으로만 전진하도록 숙명 지어진 졸병은, 지금의 나와 닮아있지는 않은지?

아니, 죽음은 어쩌면 더 나은 결과이며, 어쩌면 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미 없이 죽는 것보다 의미 없이 사는 것이, 언제나 더 두렵고 끔찍한 일이니까 말이다.

나는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다. 내일이 밝으면, 나는 딱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장기판의 새로운 칸에서, 나를 싣고 갈 운명의 흐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욕망에 넘치지만 애정이 없고,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모래사장을 산책하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외줄 위를 위험천만하게 걸게 하면서, 그 위태로운 목숨을 더욱 위협하며 어떤 나락으로 전락시켜버리려는 음흉함, 파괴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유혹의 망령이, 오늘밤 나를 광기로 몰아넣는다.

낮은 곳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높은 곳에서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밤하늘의 별들을 모조리 떨어뜨려 놓은 듯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 불빛 하나하나가 실은 한때 사람들이 하늘에 걸었던 소원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새벽녘 끝도 없이 이어진 길을 따라 어딘가 먼 곳으로 사라져가는 자동차의 저 희미한 미등은, 한없이 약한 불꽃, 한줌의 온기에 불과하지만, 분명 거대한 화염의 불씨가 되기 위한 여정에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본다.

아티쿠스여, 그렇다! 어쩌면 현실은 비루한 것이다. 상상만큼 멋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자연에게 기대할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의해 움직이며, 존재를 넘어서는 신기루를 갈망하여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믿고 있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 한다. 나는 어느 때고, 그 여로의 어디쯤에선가 반드시 쓰러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등을 떠미는, 거역할 수 없는 세속의 운명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야만 하는 병졸의 숙명에 따라,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내 앞으로 닥쳐오는 어떤 가혹한 운명의 홍수에도, 저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서 있는 나무처럼 우직하게 버티어낼 것이다.

다음 편지는 신선한 바람에 실어 보내도록 하겠다.
2007/08/20 15:23 2007/08/20 1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