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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집 앞마당에 내걸린 잭오랜턴


Happy Halloween!!!

‘할로윈’ 앞에 ‘해피’라는 수식어가 가당키나 한 건지 모르겠다.

모든 사령(邪靈)들의 날인 ‘할로윈’이 모든 성인들의 날인 ‘만성절(11월 1일)’ 전날인 것이 재밌다. 사실 ‘Halloween’이라는 단어 자체가 ‘모든 성인들의 날 전야’라는 뜻의 ‘All Hallows Eve’가 줄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밤중에 온갖 잡귀들이 인간 세상으로 나와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면, 동이 틀 무렵부터는 다시 성인들이 세상에 고요와 안정을 찾아준다는 것일까.

이런 성(聖)과 사(邪)의 뚜렷한 대비 때문에 할로윈 시기가 되면 항상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1940년, 디즈니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판타지아’다. 총 8곡의 클래식 음악에 그 음악의 성격을 잘 살린 애니메이션을 결합시켜 만들어낸 일종의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인데, 비록 공개 당시에는 크게 인기를 끌지 못 했지만,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명작 애니메이션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곡이 바로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에서의 하룻밤’과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다. 해설자는 ‘profane’과 ‘sacred’의 대비라는 표현을 썼다. 말 그대로다. 보름달이 뜬 밤, 하늘은 온통 요기(妖氣)로 가득하다. 불협화음이 자아내는 음산한 분위기 속에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의 모습이 보인다. 이윽고 산 정상에서 마왕(魔王)이 눈을 뜨고, 검은 그림자로 산하(山下)를 뒤덮어 잠들어있던 귀신들을 깨운다. 기괴한 형상을 한 귀신들이 모두 산으로 모여들고, 이윽고 산에 피어오른 지옥의 화염을 둘러싸고 광란의 축제가 시작된다. 마왕은 지옥의 불길을 마음대로 조종하며 귀신들을 희롱한다.

그러나 축제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멀리 마을에서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지옥의 불길은 순식간에 잦아들고, 귀신들은 움츠러든다. 밤의 축제가 끝났다. 귀신들은 흩어지고,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가 흐르는 가운데, 멀리서 손에 등불을 밝힌 순례자들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한다.

만성절은 835년에 생긴 이래 오늘날까지 가톨릭교회의 중요한 축일로 남아있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친숙한 것은 ‘할로윈’이 아닐까 싶다. 귀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위인도 아닌 ‘성인’이 비기독교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개념인데 비하여, 잡귀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고, 또 잡귀들에 대한 위령제의 성격을 띠는 제식이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나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할로윈의 개념 자체를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닐까.

Mussorgsky (1839 - 1881)

Night On Bald Mountain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은 장난스럽고 유쾌한 느낌이 드는 ‘할로윈’보다는, 차라리 ‘파우스트’에 묘사된 ‘발푸르기스의 밤(4월 마지막 밤)’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사실 이 곡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축일인 ‘성 요한 축일 전야제’인데, 이 날 역시 명칭과 날짜만 다를 뿐 ‘발푸르기스의 밤’이나 ‘할로윈’과 성격이 같다. ‘축일의 전야’라는 것은 할로윈과 판박이고, 마귀들이 ‘트라고라프’라는 바위산 정상에 모여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는 것은 ‘발푸르기스의 밤’ 전설에서 산 이름만 바뀌었다는 느낌이다.

이 곡은 본래 무소르그스키의 미완성 오페라인 ‘소로친스크의 시장’에 삽입될 예정이었던 곡이라고 한다. 무소르그스키는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고, 작곡가로서 경력을 시작한 뒤로도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서 도중에 쓰다가만 곡들이 여럿이다. 역시 천재(天才)가 있었던지 착상이 뛰어났지만, 빈약한 이론 지식 때문인지 착상한 멜로디의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을 완벽히 완수하지 못 한 경우가 빈번하다. 한편 오케스트레이션의 귀재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나 라벨 같은 이들이 무소르그스키가 생전에 남겨놓은 음악의 파편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관현악곡으로 다시 편곡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라벨이 관현악 판으로 편곡한 ‘전람회의 그림’ 등이다.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편곡을 했다.

2009/10/31 06:49 2009/10/31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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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시청하는 Arte TV의 광고를 통해 알게 된 바흐 페스티벌. 지난 토요일에는 바흐 페스티벌 공연 중 하나인 ‘바흐를 위하여’를 보고 왔다. 소프라노 임선혜가 바흐의 칸타타를 노래했고, 메튜 홀스가 지휘하는 레트로스펙트 앙상블(Retrospect Ensemble)이 연주를 했다.

레트로스펙트 앙상블의 전신은 1980년에 창단된 영국의 고음악 연주단체 킹스 콘소트(Kings Consort). 20년 넘게 이 팀을 이끌어온 로버트 킹이 2007년에 물러나고, 2009년에는 이름까지 레트로스펙트 앙상블로 바꿨다고 한다.

고음악 연주단체 답게 악기도 바로크 시대 악기를 사용한다. 하프시코드(쳄발로)와 바로크 바이올린, 바로크 오보에와 바로크 바순 등…….

장소는 세종문화회관 체임버 홀. 자리는 맨 뒷 열 좌측에서 두 번째 자리. 사실 티켓링크 쪽에 더 좋은 자리가 여럿 남아 있었는데, 티켓링크의 그 팝업 플래쉬 예약 시스템이 내 컴퓨터에서는 지랄 맞게 느려서 좌절. 티켓 한 장 예약하는 데 거의 30분쯤 걸렸다. 겨우겨우 끝마치고 결제 하려는데 무슨 보안 프로그램 안 깔렸다면서 액티브액스 떠주시고 처음부터 다시. 욕을 바가지로 퍼부은 다음 인터파크에서 예매해버렸다.

연주 프로그램은

칸타타 <바로 그 안식일 저녁에> BWV 42 중 신포니아

칸타타 <내게 주신 복에 만족하나이다> BWV 84

<오보에 다모레와 현을 위한 협주곡 A 장조>, BWV 1055

-인터미션-

<오케스트라 모음곡 1번 C장조> BWV 1066

칸타타 <이제 사라져라, 슬픔의 그림자여> BWV 202

사실 오케스트라 모음곡 1번 하나 바라보고 간 연주회였다. 오보에 협주곡은 제목만 오보에 협주곡이지, 원래 악보는 소실되어서 주로 쳄발로 협주로 연주된다. 그런데 이 날은 정말 오보에 협주로 연주를 하더라. 하지만 솔직히 오보에의 연주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 가장 발전한 악기가 관악기라는 것을 절감할 만큼, 바로크 오보에의 소리는 현대 오보에의 그 청아한 소리 대신 어딘가 짓눌린 듯한 갑갑한 소리가 났다. 악기의 한계를 제쳐두고라도 연주자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났다고 볼 수도 없었다. 몇 가지 눈에 띄는 실수가 있었던 것. 엉뚱한 것 가지고 트집 잡을 생각은 없지만, 자기 쉬는 부분에서 다리를 꼬고 앉는 거만한 태도를 보일 정도의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바로크 시대의 오보에. 현대의 오보에와는 생김새부터가 많이 다르다.>

BWV 42 신포니아는 이날의 기악 음악 중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곡이었다. 하기야 성악곡 분야에 대해서는 통 무지한 나이니, 들어본 적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만. 참고로 덧붙이자면, 바로크 시대에 ‘신포니아’라고 하면 오페라나 칸타타 같은 성악극의 시작 부분이나 중간에 삽입되는 기악 음악을 의미했다. 요즘 말로 옮기면 ‘서곡’이나 ‘간주곡’ 정도가 될까. 곡은 좀 심심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곡이니까, 낯선 것도 있고.

그래도 오케스트라 모음곡 1번은 상큼했다. 또 지휘와 연주를 같이 한 것을 처음 봤는데, 이것도 인상 깊었다. 건반 악기 연주자들에 한해서 이렇게 지휘와 연주를 같이 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고음악 연주단체에서는 상당히 일반적이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지휘와 연주를 동시에 하는 것을 ?き振り(히키후리)라고 한다. ?く는 피아노 등을 ‘치다’란 의미이고, 振る는 지휘봉을 ‘흔들다’라는 의미에서 ‘지휘하다’의 뜻으로 통한다. 그러니까 합쳐서 ‘치며 지휘하기’가 된다. 영어나 한국어에 이런 표현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관객을 등지고 쳄발로 앞에 앉아서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한편, 지휘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번 연주회의 수확이라면 역시 소프라노 임선혜의 칸타타였다. 성악은 별로 즐기지 않아서 모두가 생소한 곡들이었지만, 과연 명불허전이라 음색이 고울 뿐만 아니라 기교도 완벽해서 처음 듣는 곡들임에도 감명을 받았다.

이날은 연주 실황이 라디오로 방송 되었는지, 객석 뒤편에 설치된 데스크에서 진행자가 연주 사이사이에 계속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라.

연주회는 주로 큰 홀로 다녔고, 체임버 뮤직을 실황으로 즐길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이런 분위기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이런 연주회까지 찾아 올 정도 관객들이니 매너도 좋았고 말이다.

100% 만족한 연주회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좋은 기분 전환이 되었다.

2009/10/19 03:55 2009/10/19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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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명동에 갈 있었는데, 그때 대한음악사에 잠깐 들러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론도’의 악보를 사왔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Rondo for Violin and Orchestra in C-dur, K. 373

이 곡은 단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바이올린이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엄밀히는 ‘협주곡’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보통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하면, 각각 쾨헬 넘버 207, 211, 216, 218, 219가 붙여진 총 5개의 협주곡을 떠올리게 된다. 서로 가까운 숫자들의 나열이라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 5개의 협주곡이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게다가 모차르트의 말년 작품 번호가 600대이니, 200대 초반의 번호가 붙은 곡들이라면 겨우 35년에 불과한 모차르트의 생애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작곡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부터 5번까지는 모차르트가 겨우 19세였던 1775년 4월부터 한두 달 간격으로 완성되어, 같은 해 12월까지 약 9~10개월 만에 모두 작곡이 완료되었다. 협주곡 1번의 작곡 시기가 1775년 4월이 아니라 1773년 4월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상당히 신빙성이 있지만, 2번부터 5번이 1775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모두 작곡된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토록 짧은 시간동안에 작곡되었음에도 협주곡 3, 4, 5번은 바이올린 협주곡 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며, 오늘날 수많은 전공생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는 ‘교재’이자, 프로 연주자들이 사랑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어있다. 이를 보면 정말이지 모차르트에겐 작곡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조차 필요치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이야 여기서 새삼스럽게 떠들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한 가지는 어째서 5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한 것이 한 시기에 집중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더불어 1775년 이전이나 이후에는 정말 모차르트가 쓴 바이올린 협주곡이 단 한 곡도 없는 것일까?

전자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언젠가 내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시작하게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후자의 의문점을 해결 해 보도록 하자.

우선 1775년 이전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없을까? 1933년이었던가,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였던 마리우스 카사드쉬라는 사람이 ‘모차르트의 사라진 바이올린 협주곡을 발견했다’며 세상에 악보 하나를 공개했다. 그것이 ‘아델라이데 협주곡’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협주곡으로, 카사드쉬의 주장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10살 때쯤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곡은 세상에 발표된 직후부터 줄곧 위작 논란에 시달렸고, 결국 현재는 이 곡이 카사드쉬의 위작이라는 것으로 잠정 결정이 난 상태이다.

그렇다면 1775년 이후에 작곡한 협주곡은? 사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6번과 7번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이 줄곧 1775년 이후에 작곡된 모차르트의 협주곡이라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재는 이 두 작품도 모차르트의 작품이 아니라 위작이라는 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위작으로 여겨지는 아델라이데 콘체르토와 6번, 7번 협주곡을 제외하면, 3악장 구성으로 완벽하게 쓰인 협주곡은 더 이상 없다. 아마도 모차르트는 1775년 불과 몇 달 사이에 정열을 쏟아 부어 5개의 협주곡을 작곡한 뒤로는, 더 이상 이 장르에 미련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전 악장을 갖춘 완전한 협주곡이 아닌, 단악장으로 된 것들이라면 1775년 이후에 작곡된 것도 몇 개가 있다. K 261, 269, 373이다. 사실 이 곡들은 독립된 악곡으로 작곡된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가 자신이 이미 작곡 해 놓은 협주곡들의 일부 악장을 대체할 목적으로 작곡한 것이다. K261번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다지오’란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본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의 2악장을 대체할 목적으로 작곡되었다. K269번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론도’인데, 이것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의 3악장을 대체하기 위해 작곡했다.

오늘 소개하는 K373번은 조금 특이하다. 이 곡은 단악장짜리 곡이지만 모차르트가 자신이 작곡한 협주곡의 한 악장을 대체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작곡 시기는 1781년 4월로 되어 있다. 이 곡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해 온다. 모차르트가 빈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친분이 있는 귀족(혹은 대주교의 아버지?) 저택에서 음악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 연주회에서는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브루네티와 대주교 궁정 오케스트라가 협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연주할 협주곡의 3악장에 문제가 있었다.

일설에는 3악장이 통째로 없어졌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애당초 그런 곡이 선곡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곡에 대해 까다로워 작곡가들에게 수정 권고도 서슴없이 했던 안토니오 브루네티가 3악장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사실 모차르트의 K261이나 K269도 브루네티의 권고에 따라 작곡하게 된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무튼 결국 3악장을 새로 작곡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모차르트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곡은 소위 말하는 ‘땜빵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작곡된 C-Major의 론도는, 경쾌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명곡이다. 비록 길이는 짧고 구성도 간결하지만, 오케스트라 반주 위로 떠오르는 솔로 바이올린의 유려한 주제 선율은 일품이다.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모차르트는 역시 모차르트다.

악보는 피아노 반주보가 딸려서 가격이 약 2만 5천원정도 한다.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은 겨우 4페이지(양면 인쇄로 1장!)의 솔로 악보인데, 억울하단 느낌도 든다. 악보에는 손가락 번호가 꼼꼼히 쓰여 있어 매우 친절 해 보이지만, 따라 짚어보면 결코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어렵게 만들어놨어.

아무튼 언젠가는 멋지게 연주 해 보고 싶은 곡. 누군가 피아노 반주를 해줘야 할 텐데…….

2009/09/03 04:41 2009/09/03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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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스 포에버(Callas Forever) (2002년 작품, 2007년 한국 개봉)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Franco Zeffirelli)
출연: 화니 아르당(Fanny Ardant),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

며칠 전 우연히 TV에서 방영하기에 보게 된 영화.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세련되지 못 한 영상과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이야기 진행에 채널을 돌려버릴 뻔도 했지만, ‘마리아 칼라스’라는 그 이름 하나 때문에 끝까지 보았다.

음반(recode)의 역사는 100년 남짓이다. 1902년에 녹음된 카루소의 음반이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된 이후로부터 정확히 한 세기 동안이 클래식 음반의 흥망성쇠가 망라된 시대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클래식 음반 산업의 분명한 쇠퇴를 목격하고 있다.

음악은 불멸할 것이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고,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때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경지에서 출발하는 출중한 연주자들도 계속 배출될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 음반 산업이 사장(死藏)되는 것을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이제는 노쇠한 거장들이 젊은 연주자들에게 거침없이 쏟아내는 찬사는 차라리 애처롭게 느껴진다. 앨범의 속지는 점차 화보(畵報)처럼 변해간다. 베토벤 교향곡 녹음은 시중에 수백 종이 나와 있다. 클래식 애호가의 자식은 부모로부터 베토벤 5번 녹음을 열 장쯤 물려받을 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앨범 컬렉션에 11번째 녹음을 추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한 시대의 쇠퇴기에 이르러 비로소 역사는 정리될 수 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무언가 쇠락해가는 쓸쓸한 시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위안거리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우리에겐 역사가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사실 죽은 자에 대한 숭앙, 영웅화와 신격화, 이런 것도 하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할 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아무튼 클래식 음반의 역사는 완결되었다. 이제 이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진정한 신화(神話)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카라얀이 그렇고,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그러하며,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가 그렇다. 이들이 과연 가장 뛰어난 지휘자, 성악가, 연주자들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었다.”고.

마리아 칼라스 역시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승자’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1922년에 태어났고 1942년에 데뷔했다. 1949년에 첫 앨범을 냈고, 1965년에 은퇴해 그 후로 일체의 음악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음반을 내며 활동한 시기는 채 20년이 되지 않지만, 리코딩의 역사에 금자탑을 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앨범은 현재까지 약 3000만장 정도가 팔렸는데, 성악가 중에서 마리아 칼라스보다 더 많은 음반을 팔아치운 사람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유일하며, 여자 성악가 중에서는 마리아 칼라스에 견줄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

‘칼라스 포에버’의 배경은 1977년. 마리아 칼라스가 은퇴한 때로부터 12년이 흐른 시점. 이야기는 음반 제작자인 래리가 은퇴한 칼라스에게 새로운 음반 제작을 제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음색도 쇠락하고 만 칼라스는 극구 거절하지만, 래리는 새 시대에 걸맞은 ‘오페라 비디오’ 제작을 제안하며, 노래 문제는 과거에 그녀가 녹음한 앨범에서 음원을 가져와 ‘립싱크’로 찍어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러면서 래리는 그녀의 예술적 열망을 은근히 부추기는 노련한 설득의 기술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픽션이다. 역사적으로 1977년은 칼라스가 화려하게 복귀에 성공한 해가 아니라, 그녀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영화의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는 한 때 칼라스와 함께 오페라 연출 작업 한 적이 있는 만큼 그녀와는 친분이 깊고, 사실 누구보다도 칼라스의 재능을 아꼈던 사람이다. 이 영화는 철저히 프랑코 제피렐리의 시각에서 마리아 칼라스를 재해석하고 추모하는 하나의 추증작이다.

영화 속에서 칼라스는 래리의 설득으로 결국 복귀를 결심한다. 복귀작은 그 어떤 오페라보다도 여주인공의 정열이 돋보이는 비제의 ‘카르멘.’ 너무 오래 무대와 떨어져 있었던 칼라스에게는 립싱크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정열적인 삶을 산 여인 카르멘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칼라스는 점차 과거의 열정을 되찾는다. 그녀는 점점 연출에 관여하고 싶어 하고, 안무에 관심을 쏟고, 출연진과 연출자들을 다그치며 과거의 영화를 재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작품 속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잘생긴 청년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까지 느끼며, 칼라스는 50이 넘은 자신의 나이를 잠시 잊는다.

카르멘의 촬영은 대성공으로 끝난다. 카르멘의 공개를 앞두고 래리는 발 빠르게 칼라스와의 다음 작품 구상에 나서지만, 칼라스는 래리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라 트라비아타를 찍자는 래리에게 칼라스는 말한다. “하지 않겠어.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토스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푸치니의 토스카. 마리아 칼라스가 1953년 이 오페라를 처음 녹음한 음반을 내놓은 후, 그 음반은 불멸의 명반이 되었으며, 오페라 토스카의 영원한 결정반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리고 1965년, 은퇴 직전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마리아 칼라스가 맡은 배역이 또한 토스카였다. 마리아 칼라스와 토스카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칼라스는 이번에는 립싱크가 아니라 직접 자신이 노래도 다시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가짜가 아닌 진짜로, 엔터테이너가 아닌 예술가로서 대중 앞에 당당히 서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미 노쇠해버린 그녀의 목소리는 칼라스에게 그런 새로운 기회를 안겨줄 수 없었다. 칼라스는 결심을 한다.

“부탁 한 가지가 있어. 당신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야. 카르멘 영상을 폐기 해 줘.” 이번 작품 제작에 50%의 지분을 투자한 래리로서는 정말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결국 래리는 ‘진실한 예술가’로 남고자 한 칼라스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한다.

자, 마리아 칼라스가 연기한 ‘카르멘’이 어떠했는지, 거짓 아닌 그녀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보자.



사실 칼라스의 음성은 사람들이 흔히 ‘미성(美聲)’이라 부르는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목소리에 단순한 음악적 기교 이상의 어떤 인생의 깊이를 담아내는 진정한 ‘연극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은 대부분 순탄한 인생과는 거리가 멀다. 카르멘도 그러하거니와 토스카도 그렇다.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가족도 음악도 버리다시피 했지만, 결국 그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인생은 어차피 불완전하다. 오페라는 이 불완전한 삶에 대한 모사다. 마리아 칼라스의 약간의 불완전성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인생의 불완전성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영화 마지막, 칼라스는 평범하게 한 사람의 여자로서 살았다면 훨씬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그저 ‘가지 않은 길’을 동경하는 넋두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커리어의 정점에서 은퇴하고 진정 한 사람의 여자로서 한 남자의 사랑을 바랐던 칼라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대사는, 아무리 픽션이라 하더라도 흘려들을 수 없는 무게감을 지니고 우리의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사람, 래리 켈리. 그는 탁월한 선구안과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프로듀서이며, 예술가들의 까다로움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의 소유자이다. 거기에 교묘한 설득의 기술까지 갖추고 있다.

사실 이 래리 켈리란 인물은 마리아 칼라스와는 달리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가공의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인물을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자신을 투영하여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믿는 듯하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칼라스의 예술적 재능을 아꼈고, 그녀의 은퇴를 누구보다도 아쉬워했으며, 비교적 이른 칼라스의 죽음에 누구보다도 애통함을 느꼈던 사람이 바로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영화 속 래리는 칼라스에게 복귀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녀가 다시 한 번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도록 돕는다. 결정적으로는 진실한 예술가로 남기로 한 칼라스의 바람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칼라스 포에버’의 최고의 조력자로 그려진다.

사실 나는 래리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여러모로 래리라는 캐릭터와는 상반되는, 실존한 음반 제작자 월터 레그다. 월터 레그는 EMI의 음반 프로듀서였다. 그는 예술가들의 재능,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에는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하 직원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티스트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엘범의 ‘창조자’라고 여겼던 그는, 어떤 점에서는 영화 속의 래리처럼 배짱이 있고 오만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매우 호감형 외모에 때때로 근사하고 달콤한 말도 늘어놓을 줄 아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게이’였던 래리와는 달리 월터 레그는 비교적 통통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성격은 훨씬 더 보수적인데다가 한층 더 오만했다. 그는 동료가 친근감의 표시로 자신의 어깨를 툭 치는 가벼운 접촉조차 참아내지 못 했다. 월터 레그는 보수적이고 엄격한 사내 분위기로 유명했던 EMI에서도 그 정점에 선 인물의 하나였다. 여러모로 래리 켈리의 캐릭터는 EMI보다는 차라리 데카에 가깝다.

레그는 일찌감치 마리아 칼라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1953년 그녀와 함께 토스카를 녹음했으며, 이 앨범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이 팔리는 토스카 앨범이 되었다. 이후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의 커리어 동안 오직 레그와만 함께 작업 했다.

레그의 오만함과 그의 독자적 행보를 견디다 못 한 EMI는 그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 앨범이 제작된 1964년이었다.

우리는 종종 앨범의 역사를 생각 할 때에 예술가들에게만 너무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음반 제작사나 프로듀서들의 역할을 간과하고 만다. 사실 위대한 음반들은 프로듀서들의 예민한 촉각과 불굴의 의지로 제작되었다. 또 그 이면에는, 아티스트들을 하나의 신화로 포장하는 제작사의 교묘한 홍보 전략도 숨어있고 말이다.

레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단언하건데 예술의 영역에서 위원회라는 것은 전혀 쓸모가 없다. 필요한 것은 카라얀, 커쇼,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이다.”라고. 레그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레그와 카라얀. 이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 있지만, 카메라의 초점은 카라얀에게 맞춰져 있다. 세상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비슷하다.>

영화 자체의 구성만 놓고 보면 그리 높이 평가하기 어렵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굴곡진 인생과 음반사에 남겨놓은 그녀의 업적을 추모하고, 또 아티스트 뒤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한 세기 동안 리코딩의 역사를 이끌었던 프로듀서들의 존재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한 번쯤 볼만한 영화라고 하겠다.

2009/08/30 06:04 2009/08/30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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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음악/음악감상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이, 벌써 여름은 저만치 물러가고 가을이 가까이 오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브람스에 빠져있다.

 “자유롭지만 고독하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오늘 소개할 곡은 The Variations on a Theme by Haydn Op. 56a(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번호 56a)이다. 이 곡은 1873년 여름에 작곡되어 같은 해 11월에 브람스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편성은 2관 편성.

이 곡은 이미 제목만으로도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 해 주고 있다. 우선 곡의 형식이 ‘변주곡’이라는 것. 이 ‘변주곡’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하다. 그런데 변주곡이 대체 무엇이란 말이지?

본래 변주(變奏)란, 어떤 선율을 여러 가지 작곡, 연주 상의 기법을 사용하여 변화시켜 나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변주’의 방식으로 곡 전체를 구성한 것이 이른바 ‘변주곡’으로, 악곡의 주제 선율을 시종 다양한 기법으로 변주해 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변주곡은 상당히 자유로운 작곡 형식이다. 기본적으로 변형을 할 원형의 멜로디(주제)가 초두에 제시되는 것은 당연한 약속 같은 것이지만, 이후에 어떤 식으로 몇 번 변주가 이루어질 것인가는 전적으로 작곡가의 개성에 달려있다.

이런 변주곡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명곡들로는 하나의 선율을 무려 30번 변주하여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기교를 이용한 변주의 진수를 보여주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 그리고 바로 이 카프리스 24번의 주제 선율을 이용하여 전혀 새롭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관현악판 변주를 들려주는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광시곡’,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등이 있다.

브람스 역시 변주곡 형식의 곡들을 남기고 있는데, 오늘 소개할 ‘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변주곡 역사에서도 각별한 위치를 지닌 곡이다. 대체로 변주곡은 장대한 심포니나 모음곡 같은 비교적 규모가 큰 악곡의 한 악장으로 작곡되는 것이 통례다. 그런데 ‘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변주곡 형식이면서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작곡된 최초의 관현악곡인 것이다.

사실 이 곡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먼저 작곡되고, 오케스트레이션은 나중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버전이 먼저 공개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먼저 작곡된 피아노 버전이 오케스트라 버전에 밀려 작품 번호 56b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다시 한 번 곡의 제목으로 돌아가 또 다른 정보를 탐색 해 보자. 곡 초반 2분가량 제시되는 이 근사한 주제 선율이 어디에서 얻어졌을까? 곡의 제목은, 이 주제 선율이 하이든의 작품에서 가져온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율이 정말 하이든이 작곡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Haydn, Divertimento in B-dur 2nd mov.

하이든의 디베르티멘토 1번으로도 알려진 곡의 2악장이다. ‘Chorale St. Antoni(성 안토니의 성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여기의 멜로디는 분명 브람스가 변주에 사용한 멜로디가 맞다. 그러나 이 곡을 정말 하이든이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오늘날에는 오히려 다른 작곡가의 작품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그러나 설령 이 희유곡을 하이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작곡했다 하더라도, 과연 그 제3의 작곡가가 주제 선율을 작곡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성 안토니의 성가’라는 제목이 그런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지만, 지금까지는 이 부제와 관련하여 주제 선율의 근원을 밝혀줄 어떤 추가적인 정보도 발견되지 않았다.

여전히 미스터리인 아름다운 주제 선율이 제시된 뒤, 이후 이 주제가 총 8번 변주된 다음, 피날레로 마감한다. 8번에 걸쳐 다양한 시대의 기법들로 폭넓은 변주를 들려주는데, 각각의 변주가 모두 개성 넘치고 아름답다. 개인적으로는 정열적이면서도 유려한 1번 변주가 마음에 들지만, 여러분들의 선택은 어떨지?

본래 하나의 곡으로 쉼 없이 연주되는 이 곡을 변주별로 쪼개서 올린 것은, 각 변주간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통째로 된 파일의 용량이 커서 안 올라간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 대충 보니까 파일 크기가 10메가가 넘어가면 업로드가 안 되는 것 같다. 이건 텍스트큐브 자체에 걸려있는 제한인 걸까? 이래서는 용량 6기가의 서버를 사용하는 의미가 없다. 어떻게 수정이 안 되나.

지휘는 토스카니니.

2009/08/30 05:25 2009/08/30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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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음악/오페라

기사(騎士)이자 가수인 탄호이저는 천성이 오만하며 절제보다는 탐락을 미덕으로 여기는 자다. 용모가 수려하고 노래 솜씨가 뛰어나서 그를 흠모하는 아가씨들이 많았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이 방자한 청년에게 걱정스런 시선과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탄호이저 역시 순수니 절제니 신앙이니 하는 고리타분한 가치들을 전통의 미덕이라며 고수하고 있는 이 촌구석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는 진심으로 이 따분한 마을은 자신이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여겼다.

결국 탄호이저는 길을 떠났다. 관능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열정에 있는 그대로 도취되기 위해, 이윽고 환희의 마력에 휩싸여 영원한 쾌락을 누리기 위해. 그리하여 그가 도착한 곳은 베누스베르크, 즉 ‘비너스의 도시’였다. 술에 취한 사티로스와 목양신들이 바쿠스 신의 여사제들을 거느리고 흥청망청 향락을 벌이는 무릉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보다 더 매력적이며, 꿀보다도 더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 비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잘생기고 누구보다도 노래 솜씨가 뛰어나며 관능에의 욕망으로 충만한 이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탄호이저는 비너스의 마음을 사, 그녀가 지배하는 쾌락의 정원에서 신과도 같은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탄호이저가 하프를 타며 노래를 시작하면 어느 새 비너스는 그의 등 뒤로 다가와 흰 팔로 탄호이저의 늠름한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부드러운 가슴을 등 뒤에 맞대며 귓가에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탄호이저는 정념이 솟구치고 피가 끓어오르며 하프를 타던 손을 멈추고 열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비너스는 이 세상의 모든 미를 합한 것보다도 아름다웠고, 이 세상 모든 사랑의 기교를 몸소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일찍이 꿈꿨던 모든 것이 이루어진 비너스의 도시에서, 그러나 탄호이저는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늘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요정들은 탄호이저의 노래 소리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비너스의 빛나는 얼굴도 더 이상 고향 마을 처자들의 소박한 용모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관능에의 진한 욕구가 식자, 침대 위에서의 향락도 더 이상 그를 사로잡지 못 했다. 그러자 탄호이저에게는 갑자기 비너스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솟구쳤다. 마치 자신이 비너스의 포로가 되어, 잘못된 향락의 길로 빠진 피해자처럼 생각되었다. 가슴 한편에서 새로운 삶, 무절제와 탐락을 벗어던지고 보다 의식이 있고 신사적인 삶에 대한 열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탄호이저의 눈은 새로운 의지로 반짝이는 듯했다.

떠날 때가 되었다. 탄호이저는 비너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자 비너스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탄호이저를 저주했다. “배신자! 당신을 붙잡지는 않겠어. 그러나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곧 당신의 파멸이 될 거야. 결코 평화를 찾지 못 할 사람. 결코 용서를 얻지 못 할 그대. 그러나 치유를 원한다면, 그때는 내 품에 돌아오게 되겠지.” 그러자 탄호이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나는 당신에게서 평화와 안식을 찾지는 않을 거요. 나의 구원은 성모 마리아에게 있으니까!”

베누스베르크에서 빠져나오자,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같았다.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새들의 지저귐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축복하는 소리로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자못 신사적인 태도로 말을 몰았다.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내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 삶을 살리라. 참된 사랑을 찾고, 참된 신앙을 가지리라!

이윽고 탄호이저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탄호이저의 마음 한 구석은 무거워졌다. 한때 그토록 거만하게 굴었던 나를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들을 경멸하고 오만한 태도로 마을을 떠났는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가다니! 마을 근처에 이르자 몇몇 사람들이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과거에 오만방자했던 탄호이저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그러나 탄호이저가 신사적이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인사를 하자, 마을 사람들은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그들은 탄호이저가 오랜 시간 넓은 세계를 여행하며 드디어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재능 있는 젊은이가 성숙해서 돌아온 것을 크게 반겼다. 탄호이저는 마음 한 구석에서 죄책감을 느꼈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에 이내 그 죄책감을 벗어버렸다. 그는 정말 자신이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성숙한 인간,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 지난날 탄호이저에게 그토록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던 그녀가 아직도 그를 못 잊고 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는 바르트부르크의 노래의 전당에서 오래전에 떠나간 탄호이저를 아직도 그리워하며 회상에 잠겨있었다. 볼프람의 안내를 받고 노래의 전당으로 간 탄호이저는 엘리자베트와 재회하고, 그녀에게로 자신을 이끈 기적을 찬양하며 이 조신한 아가씨의 마음을 다시 휘어잡기 위해 달콤한 말들을 쏟아냈다.

바르트부르크의 영주는 탄호이저의 귀환 소식을 듣고 그를 환대하는 의미에서 노래 경연 대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경연 대회를 통해 탄호이저가 그동안 어떤 경험을 했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탄호이저는 흔쾌히 경연 대회의 참가를 수락했다.

이윽고 노래 경연 대회가 시작되었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가 노래의 주제로 던져지자, 이 정숙한 도시 바르트부르크의 사람들은 저마다 진실 되고 고귀하며, 정신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자코 듣고 있던 탄호이저는 점점 이 순진한 사람들의 생각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사랑의 본질이라고? 이 자리에서 나보다 그것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누가 뭐래도 나는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의 사랑의 독차지하였던 사람이다! 정신과 영혼의 사랑?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맑은 샘? 그 정절을 지키는 지순함? 내가 이 사람들에게 진짜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어야겠다!

“샘이 있다면, 나 불타는 갈증을 식히기 위해 그 샘으로 기꺼이 입술을 축이리. 샘이 마르지 않는 것은 마치 나의 갈망이 꺼질 줄 모르는 듯, 영원히 내 그리움이 불타도록 영원히 나 그 샘에서 활기를 찾겠소.”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탄호이저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는 믿음에 균열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래도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는 셈 치고, 진실함의 미덕을 가르치는 노래로 탄호이저에게 교훈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탄호이저는 이를 비웃으며 외쳤다. “우리의 육신에는 즐거운 향락이 어울려! 그리고 사랑은 그 향락 속에만 있지!”

그러자 귀부인들은 탄호이저의 음탕한 생각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다 이내 황급히 자리를 피했고, 마을의 신심 깊은 기사들은 격분하여 탄호이저를 추방하려고 들었다. 그때서야 탄호이저는 자기가 그만 자제심을 잃고 어떤 위험을 초래하였는지를 깨닫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기사들의 거친 포승이 그의 몸을 휘감으려는 순간, 그 앞으로 한 여인이 몸을 내던졌다. 영주의 조카인 엘리자베트였다. 엘리자베트는 기사들 앞에 무릎 꿇고서 눈물로 호소했다. “나의 소원은 이 분의 구원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감히 이 사람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엘리자베트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탄호이저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고통스런 참회의 길을 떠나는 마지막 기회를 부여 해 달라고 탄원했다.

엘리자베트의 헌신에 탄호이저는 죄책감을 느꼈다. 결국 자신이 돌아와서는 안 될 곳에 돌아왔음을 깨달았고, 변했다고 믿은 자신이 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삶의 의지로 믿었던 열정은 결국 향락에 대한 권태로움의 반대급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떠나겠소, 순례자들과 함께. 천사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로마로!” 탄호이저는 순례자들의 무리와 함께 로마로 향하는 고통스런 순례길에 올랐다.

그 뒤로 또 긴 시간이 흘렀다. 구원을 위해서라지만 탄호이저를 고생스러운 순례길에 보낸 엘리자베트는 날마다 고통스러워하며 예배당에서 탄호이저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이교의 신인 비너스와 향락에 빠져 젊음을 낭비하고, 신앙으로부터 등을 돌린 탄호이저가 구원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나날이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이 야위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던 순례자들의 무리가 바르트부르크로 돌아왔다. 엘리자베트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뛰어나가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았지만, 그 안에서 탄호이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절망했다.

엘리자베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성모 마리아에게 이제 그만 자신을 거두어 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볼프람이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그녀의 집으로 데려다 주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볼프람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홀로 바위산을 향해 걸어간다.

볼프람은 엘리자베트에게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음을 알지만,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홀로 고개를 떨어뜨린다. 볼프람은 저녁별에게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엘리자베트를 결코 잊지 못 하는 자신의 인사를 저녁별이 대신 전해주기를. 이제 가냘프게 흔들리는 그녀의 생명이 꺼지고 나면,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한편 탄호이저는 순례자들의 무리와 함께 고생고생하며 겨우 로마에 당도했다.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전해 받고 지상에서 그 권세를 대신 행사하는, 지상 교회의 수장 교황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교황은 베누스베르크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 향락에 물든 생활을 하며 신을 져버린 탄호이저는 낡은 지팡이에 새싹이 돋지 않는 한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이라며 저주를 내렸다. 탄호이저는 절망에 빠진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다른 순례자들과 떨어져 홀로 괴로움을 곱씹었다. 이제 그에게 돌아갈 곳은 베누스베르크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어느 밤, 베누스베르크를 향해 가다가 고향 마을 인근을 지나게 된 탄호이저는 한 남자의 노래 소리에 이끌려 다가간다. 그는 볼프람이었다. 볼프람은 탄호이저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 했다. 탄호이저는 다 헤진 옷을 걸치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한데다가 몹시 야위어 있었다. 그 옛날 자신감과 생기가 넘치던 아름다운 청년의 면면은 사라져버리고, 겨우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겹게 서 있는 초라한 사나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탄호이저는 볼프람에게 베누스베르크로 가는 길을 묻는다. 어느 때고 치유가 필요해지면 결국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비너스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탄호이저는 스스로를 향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탄호이저의 체념을 눈치 챈 비너스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탄호이저는 모든 구원의 희망을 버리고 비너스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비너스는 이제야 말로 탄호이저의 영혼을 취해 영원히 자기 곁에 두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탄호이저의 낯빛은 이미 시체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지옥의 쾌락에…….” 탄호이저는 절규했다. 이때 볼프람이 그를 막아섰다. “전능하신 주여! 당신의 종을 구하소서!” 비너스는 거듭 탄호이저를 재촉했다. “비켜나시오, 내게서 멀리 떨어지시오!” 탄호이저는 볼프람을 향해 위협적으로 말했다. “한 단어가…….” 볼프람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을 구할 것이요.” “아니, 나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소. 비키시오, 볼프람!” “어서 내게로 와요, 탄호이저, 당신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 비너스가 팔을 벌려 탄호이저를 맞이하려 했다. “탄호이저, 한 천사가 당신을 위해 희생했소.” 볼프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천사가 곧 당신 위에 나타나 축복할 거요.” 그러나 탄호이저는 거의 비너스 품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윽고 볼프람이 외쳤다. “엘리자베트요!” 볼프람의 눈에서도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탄호이저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엘리자베트…….” 그때였다. 마을에서 장례 행렬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애통함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비너스는 절규하며 사라졌다. 볼프람이 잠시 행렬을 멈추게 하고 탄호이저를 관 가까이에 데려갔다. 새벽의 어스름한 빛 속에, 그러나 새벽별처럼 평화로운 모습으로 엘리자베트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 탄호이저는 쓰러졌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동녘에서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온화한 빛이 한 순례자의 낡은 지팡이를 비추었을 때, 그 위에 돋아난 푸른 새싹에 맺힌 이슬이 반짝였다.

이상이 바그너의 음악극 ‘탄호이저’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바그너는 이 곡을 1843년 테플리체에서 작곡하기 시작하여 1845년에 완성한다. 대본은 하인리히 하이네, 호프만 등의 작품과 독일 전승들을 참고, 짜깁기하여 직접 썼는데 역시 내용은 좀 엉성한 편이다. 갈등 구조가 뜬금없고 해결이 갑작스럽다.

성(聖)과 속(俗)의 대립 구도, 그리고 타락과 회개의 이야기 구조는 서양 예술에서 줄기차게 반복되어 온 하나의 패턴이다. 비너스는 속된 사랑을, 엘리자베트는 성스러운 사랑을 상징하며, 타락한 삶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상승의 이야기 구조는 본 오페라의 주인공인 탄호이저의 삶 속에 매우 ‘극적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뻔한 얘기는 그만 하자. 바그너의 음악극 속 주인공은 탄호이저이지만, 내 이야기 속 주인공은 탄호이저가 아니다. 재능이 넘치고 끝까지 방종하여 정신 못 차리다가 여인의 희생으로 구원 받는 행운의 사나이는, 이 블로그에서 주인공으로 거론될 자격이 없다. 21세기에도 ‘왜 여자들은 나쁜 남자에게 끌리나’ 같은 주제가 여전히 술자리 이야깃거리로 거론되고, 이를 다룬 심리학 서적이나 심지어 거지같은 소설도 줄기차게 출판되는 판에, ‘엘리자베트’를 주인공으로 꼽을 이유도 없다.

오히려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면 엘리자베트를 초월하는 진상 중의 진상, 그러나 정작 사람들로부터 주목도 제대로 못 받아 존재감마저 미미한 미련퉁이 남자, ‘볼프람 폰 에셴바흐’야 말로 이 블로그에서는 주인공으로 대접 받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자 그럼 위의 줄거리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이 한심남의 스토리를 좀 자세히 들여다보자. 알고 보면 볼프람, 이 남자도 노래에 소질이 좀 있다. 탄호이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노래 경연 대회에서 첫 타자로 노래를 뽑아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을 정도다. 그런데 성품이 지나치게 올곧다. 여인들을 보고 반할 수는 있지만, 차마 그들의 순수를 조금이라도 흐트러뜨리는 짓은 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탄호이저처럼 갈증이 나면 샘물을 들이키기는커녕, 이래서야 샘물을 퍼서 가져다준대도 입을 못 댈 사람이다.

볼프람은 엘리자베트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었다. 탄호이저의 노래에 푹 빠져있던 엘리자베트가, 탄호이저가 떠나가 버린 뒤 상심에 잠겨있는데도 볼프람은 그 주위를 맴돌며 애만 태울 뿐 엘리자베트를 어찌 해보지 못 한다. 남의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어진 선을 과감하게 넘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볼프람에게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어느 날 탄호이저가 돌아온다. 지난날 탄호이저의 거만한 태도를 기억하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계심을 품을 때, 가장 먼저 탄호이저의 개심을 믿고 그를 환영한 사람이 다름 아닌 볼프람이었다. 그것은 볼프람이 탄호이저의 본심을 꿰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볼프람이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엘리자베트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이었으니까!

볼프람은 앞장서서 탄호이저를 엘리자베트에게로 데려간다. 이 장면에서 볼프람은, 배경이 되는 벽면에 서서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윽고 두 사람이 감격의 재회를 하자, 자신에게는 희망의 빛이 사라졌다며 절망한다. 이런 미련퉁이! 이런 답답한 인간!

‘그녀만 행복하다면…….’은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만큼이나 역사가 깊고 해명이 불가능한 멍텅구리 순진남들의 심리다. 결국 볼프람, 너는 엘리자베트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어!

그러나 볼프람은, 평범한 순정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상을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는다. 탄호이저가 순례지에서 돌아오지 않자 절망에 빠진 엘리자베트가 죽어가며 자신의 희생으로 탄호이저의 죄를 대속(代贖)하기를 비는 모습을 보고서, 한편에서 볼프람은 그녀의 가련한 숙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바위산으로 홀로 올라가는 엘리자베트를 차마 붙잡지도 못 하고 그녀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떠오른 저녁별을 붙잡고 하소연한다.

이 하소연이 저 유명한 아리아 ‘저녁별의 노래’가 되었다. 엘리자베트가 사랑한 사람은 탄호이저였다. 엘리자베트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도 탄호이저, 그리고 엘리자베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사람도 역시 탄호이저였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를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볼프람이다. 물론 이야기 속의 인물이니까 그랬겠지만, 볼프람은 자신이 결코 탄호이저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볼프람은 자신의 역할을 엘리자베트의 조력자로 한정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다른 남자를 위해 희생하기로 한 결심까지 받아들이고, 그 숙명을 완수하는 것을 돕는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서도 그 미운 탄호이저가 비너스의 품으로 안기려 드는 것을 전력을 다해 막는다. 현대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 장면이 다루어졌다면 이때 볼프람은 탄호이저의 뺨을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긴 뒤, 땅 위에 엎어진 탄호이저를 깔고 앉아 멱살을 잡고 외쳤을 것이다. “정신 차려! 너 때문에 엘리자베트는 죽었단 말이야. 나의 엘리자베트가…….” 눈물이 뚝뚝.

오페라 계의 진정한 루저(looser) 볼프람. 종종 여인네들은 너무 쉽게 ‘나도 이런 사랑 한 번 받아 봤으면’하고 말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오페라 안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당하기만 하는 이 슬픈 사랑의 숙명은 도저히 구제 받을 길이 없다!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영원한 시간을 두고 맴도는 것처럼, 조금만 멀어져도 가슴에 서리가 내리고 조금만 가까워져도 속까지 시커멓게 태워버리는 이 바보 남자들의 가련함이라니.

오페라 탄호이저의 숱한 명곡들을 뒤로 하고, 이 세상 짝사랑으로 가슴앓이 하는 모든 순정남들을 생각하며 ‘저녁별의 노래’를 띄워본다.


Wie Todesahnung, Damm'rung deckt die Lande,
umhullt das Tal mit schwarzlichem Gewande;
der Seele, die nach jenen Hoh'n verlangt,
vor ihrem Flug durch Nacht und Grausen bangt!
Da scheinest du, o lieblichster der Sterne,
dein sanftes Licht entsendest du der Ferne
die nacht'ge Damm'rung teilt dein lieber Strahl,
und Freundlich zeigst du den Weg aus dem Tal.

O du mein holder Abendstern,
wohl grußt' ich immer dich so gern;
vom Herzen, das sie nie verriet,
gruße sie wenn sie vorbei dir zieht,
wenn sie entschwebt dem Tal der Erden,
ein sel'ger Engel dort zu werden.

죽음의 예감처럼 어둠은 땅에 내려
검은 옷자락으로 골짜기를 덮네
저 높은 곳을 희구하는 영혼도
어둠과 공포를 향한 비행이 두렵다
그때 네가 나타나는구나, 아 사랑스런 별
부드러운 빛이 멀리서부터 다가와
그 사랑스런 빛이 어둠을 꿰둟고
계곡의 길을 은은히 밝힌다

아, 나의 다정한 저녁별,
너에게 나 언제나 기쁘게 인사한다
나의 그녀가 너의 곁을 지나갈 때에
그녀를 끝까지 따르는 나의 인사를 전해다오
천국의 천사가 되기 위하여
그녀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천국의 천사가 되기 위하여
그녀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2009/08/10 03:17 2009/08/10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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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관련하여 기억하고 있는 연도(年度)는 둘. 하나는 1797년. 남자라면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따위의 멋들어진 대사를 내뱉으며 한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버리는 불굴의 무인에 대한 동경을 품는 바보 같은 시기를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다. 이 시기를 잘 극복하면 인간이 되는 거고, 그렇지 못 하면 짐승이 되는 거지. 그건 그렇고, 나폴레옹이 왜 알프스 산맥을 넘었는지, 사람들은 관심이나 있나?

나는 ‘나폴레옹 멋져’란 생각 때문에 이 연도를 외우고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1797년은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은 해도 아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방면 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은 그 전 일이니까 처음 알프스를 넘은 것은 1797년 이전일 것이고, 저 유명한 일화는 오스트리아와의 전투를 위해 한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을 때의 일이라니까 좀 더 후의 일일 것이다.

1797년은, 바로 나폴레옹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멸망시킨 해이다. 이로써 1200년 존속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진부한 표현을 빌자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때 유럽 제일이었던 국가의 부와 젊은이들의 피를 바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파상 공격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까지 생존했던 이 국가는, 결국 유럽 국가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산 마르코 광장을 보고서는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응접실이라고 평할 줄 알았던 나폴레옹이, ‘바다와의 결혼식’ 행사 때 베네치아 통령이 타던 선박인 ‘부르키엘로’는 호화롭다고 바다 위에서 불살라버렸다. 참고로 이 부르키엘로의 아주 작은 모형이, 이탈리아 해군 기지인 아르세날레 남쪽에 위치한 해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혹 베네치아에 관광 가는 사람이 있거든, 한 번 쯤 들러보라.

나폴레옹과 관련하여 기억하고 있는 또 하나의 연도는 1812년으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해이다. 사실 이 사이에 나폴레옹의 대관식도 있고 한데……. 이 1812년이라는 해를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다음에 소개할 곡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1840-1893)


차이코프스키 작곡 ‘1812년 서곡’ 작품 번호 49번.

‘1880년에 작곡된 이 장대한 오케스트라 곡은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에 대한 러시아 군의 승리를 묘사한 것으로써 프랑스 국가와 러시아 국가를 병치시켜 양국 군대의 치열한 전투와 러시아 군의 최종적 승리를 생생하게 그려낸…….’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은, 중학교나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도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나? 그런데 프랑스 국가와 러시아 국가도 구분 못 하는 애들한테 러시아적인 선율이 어쩌고 해도 사실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란 말이다. 결국 실제 대포를 가져와 펑펑 쏴대고, 교회 종을 울려가며 연주했다더라 하는 ‘일화’ 정도나 기억하면 아는 척 거들먹거릴 수 있단 얘기지.

사실 이 곡은 정말 단순하고 유치하다. 하지만 이 곡에는, 정치적 선전이라는 의도도 어느 정도 들어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단순하고 노골적이고 유치한 것만큼’ 이에 효과적인 것도 없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작부터 ‘아 차이코프스키’란 느낌의 선율이 연주되다가, 잠시 암울한 분위기가 지배하더니, 요란한 대포 소리와 함께 힘찬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의 선율이 연주된다. 그러다가 마치 러시아의 민족의 각성을 암시하는 듯한 서정적인 선율이 연주되더니, 이번에는 프랑스 군의 고전을 암시하는 듯 라 마르세예즈가 조각조각 해체되어 삽입된다. 마지막에는 러시아의 국가 ‘신이시여 차르를 구하소서’의 주제가 힘차게 연주되는 가운데, 승리의 팡파르로 장식된다.

혹시 여기 삽입된 멜로디가 러시아 국가가 맞는지 확인 해 보겠다고, 러시아 국가 찾아 듣는 짓은 하지 말기를. 차이코프스키 시대의 국가가 현대 러시아 국가랑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 재밌는 것은, 정작 전투가 벌어졌던 1812년엔 러시아에 국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러시아 국가는 1815년에 처음 지정되었는데, 차이코프스키의 시대에는 ‘신이시여 차르를 구하소서’가 1833년부터 새로 국가로 지정되어 불리고 있었다. 이후 소련 시대에 국가가 무려 네 차례나 바뀌었고, 소련이 해체된 직후인 1991년에 국가를 새로 정했으나, 2000년 푸틴 대통령 때 다시 한 번 바뀌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한편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도, 분명 혁명기 때부터 널리 불렸으나 국가로 지정된 것은, 1812년 서곡이 작곡되기 불과 1년 전인 1879년이었다. 그 힘차면서도 호탕한 선율 때문에 사랑받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섬뜩하기 그지없다. 이를테면 ‘놈들의 더러운 피를 밭에다가 뿌리자’라든가…….

곡만 들으면 러시아 군의 통쾌한 승리가 연상된다. 그러나 어디 러시아 군이 이렇게 칭송할만한 기념적인 승리를 거둔 적이 있었던가……. 사실 이 곡이 묘사하고 있는 ‘보르디노 전투’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맞닥뜨려 서로 비슷비슷한 피해를 입고 결국 결판을 내지 못 한 싸움이었다. 게다가 쿠투조프가 퇴군을 하는 바람에 결국 나폴레옹이 모스크바까지 진격하게 됐으니, 이 싸움이 어디 이렇게 웅장한 음악으로 치장할 만하냔 말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사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事實)이 아니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에게 거의 죽임을 당할 뻔 하고, 겨우 상대방의 실수로 목숨을 건져 ‘평화 조약’을 맺는 것으로 체면치레 했으나, 이집트 전역에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찬란하다 못 해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용의 기념 부조들로 자아도취의 향연을 펼쳐놨으니, 후대 사람들은 그를 정녕 위대한 승리자요, 이집트의 자주적 혼이라 여기지 않는가.

다섯 권짜리 ‘전쟁과 평화’로 읽는 것보다도 이렇게 15분 정도의 음악으로 듣는 이야기가 뇌리에 더 선명하게 각인되는 것이다. 정치 선전이란 ‘단순하고 노골적이고 유치해야’하며, ‘반복적’일수록 효과가 좋다.

하지만 곡의 이러한 성격 때문이었을까, 정작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이 쓴 이 곡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래 현명한 사람들은, 멍청한 사람들의 두뇌에 가장 직접적이고 위력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들을 혐오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멀찍이 떨어져 있는 우리들은, 그저 예술 작품의 하나로서 감상하면 될 것이다.

바로 이 곡이, 유포니아의 가을 정기 연주회 서곡이며, 나는 제1 바이올린 주자로서 연주하게 된다.

2009/07/21 04:15 2009/07/21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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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 (1862~1918)

Suite bergamasque No.3 'Claire de lune(달빛)'


언젠가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면, 쳐보고 싶은 곡은 사실 베토벤이나 쇼팽보다는 드뷔시일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쉬울 것 같아서인 것도 있고.

너무나 유명한 이 곡은, 드뷔시가 1890년에 작곡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의 일부이다. 'Claire de lune'는 문자 그대로 '달빛'이란 뜻인데, 같은 의미의 한자어인 '월광'이라고도 부르나, 베토벤의 저 유명한 '월광 소나타'와 구분 짓기 위해서 사람들이 일부러 '달빛'이라 부르는 것 같다. 곡의 부드럽고 소박한 정서를 볼 때, '달빛'이라는 수수한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고.

흔히 '드뷔시'를 인상주의 작곡가라고 부른다. 미술사의 용어들을 그대로 가져다가 음악사에 적용시키는 것은 많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도무지 미술사상의 '인상주의'와 음악사상의 '인상주의'의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다(전통의 거부, 새로운 기법의 창안이라고 하는 과정상의 공통점을 논외로 치면). 공교롭게도 모네와 드뷔시는 성이 '클로드'로 같은데, 모네에 대해서는 '모네의 눈'을 칭송했지만, 드뷔시에 대해서는 대체 무얼 칭송할 수 있단 말인가? '드뷔시의 귀?'

사람들은 종종 '감각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을 착각하는 듯하다. 모네의 그림은 분명 모네의 마음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모네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드뷔시의 음악은? 애초에 음악을 통해 시각을 자극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얘기다. 무언가 눈에 보일듯 말듯 아른아른하게 작곡을 해 놓았다고 해서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인다면, 그건 좀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2009/06/10 03:48 2009/06/10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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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딘의 현악사중주 2번 1악장. 지난 향상 연주회 때 어떤 팀이 연주해서 알게 된 곡이다.

만일 곡의 아름다움을, '선율에 어린 정서의 아름다움'이란 잣대로 평가한다면, 러시아 작곡가들의 곡들이 단연 으뜸을 차지할 것이다.

'미려(美麗)하다.' 연주는 보로딘 현악사중주단.
2009/06/07 05:25 2009/06/07 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