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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헤아려보지는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글로 정리되기를 기다리는 주제가 백만 개(?)쯤 들어있다. 물론 옥석(玉石)을 가릴 필요는 있겠지만,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꼭 글을 써보고 싶다’란 생각이 들게끔 하는 주제는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글로 옮겨내지 못하는 것이, 전적으로 내 게으름 탓인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표현력이다. 초보 조각가의 심중(心中)에 아무리 거창한 구상이 들어있더라도, 그것을 구현해 낼 기술이 없어 작업을 시작조차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마음 속 백벽(白璧)에만 수백 번 밑그림을 그려 볼 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사람은 아주 위대한 사람이거나, 아주 형편없는 인간이다. 꼭 세칭(世稱) 작가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형태의 글을 쓰든 간에, 그 글이 작자(作者)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썩 훌륭한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글이며, 그런 수단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역시 훌륭한 작가다.
나는 그런 경지와는 거리가 멀다. 내 한계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다. 언제나 완성(完成)은 내 능력의 지평 저 너머에 존재하고 있어서, 어렵사리 시작을 하더라도 그 끝에 이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담에도 불구하고 종종 글을 써내는 것은,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한다. 즉, 제재(題材)가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어서 쓰는 데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경우, 혹은 그것이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너무나도 급박하여 글쓰기를 잠시도 유예할 수 없는 것인 경우.
전자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작문 연습 삼아 써내버린다. 물론 언제나 글을 쓸 때는 진지한 자세로 임하지만, 구상에도 또 작문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완성도에도 과히 미련은 없고, 곳곳에서 허점이 들어나게 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이를테면, 그것은 습작(習作)에 불과하다.
후자의 경우는 모든 면에서 전자와는 판이하다. 다듬고 다듬어서 유리구슬이 되어야만 비로소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을, ‘급박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써내는 것이다. 비록 급박(急迫)함이 본래 ‘시간의 촉박함’이란 의미를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으나, 사실 시간에 쫓긴 다기 보다는, 그 주제를 더 이상 내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말 쓰지 않고는 내가 미쳐버리고 말 것 같은, 한 시라도 빨리 글로 써서 밖으로 뱉어내어야만 하는 것.
이 때에는 나도 전심전력(全心全力)을 기울여 글을 쓴다. 치밀하게 구상하고, 성실하게 쓴다. 어휘 하나도 선별하며, 그 배열에는 신중을 기한다. 동시에 너무 부분에만 치중하여 균형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전체를 조망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이렇게 써낸 글은,

“그렇다면 네가 전력을 기울여 만든, 네 능력을 증명할 만한 작품을 내보여라.(몽테뉴)”

라는 요구에 당당히 내놓을 수 있는 나의 작품이다. 물론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방만했기 때문에 느끼는 수치스러움이 아니라, 전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결국 표현력 부족으로 인하여 제재(題材)의 가치를 작품에서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느끼는 자괴(自愧)감이다.
즉, 그 글은 온전히 내 자신이다. 미진한 완성도는 내가 여전히 미성숙의 존재라는 것을 반증한다. 여기에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렇게 써낸 글은 애증(愛憎)의 대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매우 잔인한 일이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자각(自覺)하는 것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물론 내가 이렇게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 글을 쓴 것은, 생애를 통틀어도 몇 차례 되지 않는다.)
이 때에는, 내가 아직 젊다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초조해 할 것은 없다. 내 나이 이제 겨우 만 이십 세 일 개월이다. 앞으로 충분한 수련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기술적인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베토벤이 실러의 시(詩)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이기로 결심한 뒤 그것을 해내기까지 31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백년의 고독’ 첫 행을 쓴 뒤로 그것을 하나의 완성된 소설로 만드는 데는 장장 23년이 걸렸던 것을 보면, 어떤 위대한 주제를 표현해 내기 위한 뛰어난 표현력을 얻기 위해서는 과연 그에 걸맞은 수련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간혹 히라노 게이치로 같은 천재가 나타나 이십 대에 ‘장송’같은 대작을 써내버려서 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건 정말 예외라고 믿고 싶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평생을, 가능하다면 오래 살아서 삶의 의미와 달콤함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마지막에 열 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릴케)”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커다란 함정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파우스트’가 인생의 말년에 가서야 겨우 씌어질 수 있는 작품이었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역시 이십 대의 괴테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현재의 나는, 생각과 표현력 사이의 심한 불균형 상태에 있다. 젊은 만큼, 감정은 때때로 폭발적으로 격앙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적절히 표현할 표현력은 보유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물론 기술적인 면에서는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나이 사십, 혹은 오십에 가서야 성숙한다면, 그때에 이르러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표현 해 내는 것이 가능할까? 회상은 결국 회상일 뿐이다. 빛바랜 옛 추억을 마치 지금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인양 온갖 수사로 치장하여 묘사한들, 그것이 역겹기밖에 더할까?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곧바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면, 나는 젊은 시절을 영영 잃고 말 것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젊음을 잃어버렸는가? 그들은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노인(老人)이었던 것 같다.
결국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사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변한다. 변화 자체로는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써내고 싶다.
훗날, 나의 어떤 면은 비약적인 진전을 이루었을 것이고, 어떤 면은 눈에 띄게 퇴락하였을 것이다. 분명 그때에는, 단테가 그러했던 것처럼 젊은 시절의 작품을, 그 안에 섞인 치기(稚氣) 때문에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망각하는 것이야말로 더 우려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써댈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나는 오히려 아무 것도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아무렇게나 막 써대는 행위에 대해 분개한다. 하기야 이것은 학생들의 표현력을 말살해버린 현 교육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도무지 대학생들이 써대는 글을 읽어 줄 수가 없다. 그 문장의 조잡함, 초보적인 어휘력, 그리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알 수 없게 만드는 애매모호함!

“그가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다.(카이사르)”

내가 대학 강의 시간에 조별 작문 과제며 발표를 도맡아 했던 것은, 그런 유치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글을 써대는 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무렇게나 마구 써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수련이 필요하다. 나는 비록 아주 기초적인 지도도 받지 못했지만, 그것이 유치하고 난잡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대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에게 그것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표현력을 기르는 훈련을 하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은 가장 훌륭한 훈련 수단이다. 얼마동안은 소설에 집중했지만, 근래에 다시 역사서, 철학서 등도 읽고 있다. 또한, 내가 비록 ‘작문’을 ‘나의 수단’으로 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직 그 한 가지에만 얽매이려 하지는 않는다. 카프카는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문학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다른 것이 될 수도 없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내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 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음악도 미술도 모두 훌륭한 표현의 수단이며, 그 소양을 쌓는 것은 표현력을 기르는 데 분명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젊고, 미숙하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할 생각은 없다. 젊어서는 젊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절대 유예(猶豫)될 수 없으며, 미루다가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것을 누구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만큼은, 그것은 분명 커다란 상실이다.
생각과 표현력이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하자. 젊은 만큼 생기 넘치는 사고에는 역시 생기 넘치는 표현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갖추도록 하자.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서는, 그것을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심지어 필요성조차도 환기시켜 주는 이가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노력할 밖에!
2006/05/28 02:20 2006/05/28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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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이른 저녁 무렵부터 비[雨]의 냄새를 맡았다. 아득히 먼 옛날의 일같이 느껴지는, 그러나 그 무렵의 다른 모든 기억들이 이미 빛을 잃고 퇴락(頹落)해버린 뒤에도, 꿈 특유의 마술적인 신비로움을 간직한 색채를 띠는 선명한 하나의 기억, 하나의 사건. 실제와 환상(幻像)의 어디쯤에서인가 분별을 잃고, 일평생(一平生)의 소중한 추억으로 마음속에 자리해버린, 비 내리던 날의 그 덧없이 짧은 순간의 체험은, 정신을 나른하게 하고, 육체를 한없이 느슨하게 만들어버리는 저 우울한 낯빛의 하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소리가 습기 머금은 공기 중에 낭랑(朗朗)하게 울려 퍼졌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선(路線)을 밟아가듯, 눈으로 활자를 더듬다가, 어느 결엔가 사고는 궤도를 잃고 탈선(脫線)하여, 늪과 밀림과 안개의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여명의 빛 속에 몸을 숨기고 침입한 수마(睡魔)가 몽환(夢幻)의 어느 끝자락을 붙잡고 꿈의 피안(彼岸)으로 인도하였을 때, 그 이행(移行)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자명종의 울림은 하나의 세상을 깨부수는 우레 소리였으며, 그 파괴적인 진동에 뒤흔들린 전신(全身)은 피로(疲勞)를 호소했다. 날은 여전히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세수를 하고, 식탁 위에 놓여있던 토스트로 아침을 해결한 뒤,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였다. 반팔 티셔츠 대신, 와이셔츠를 꺼내 입었고, 여느 때 신는 갈색 캐주얼 구두 대신 검은 색 구두를 준비했다. 우산도 잊지 않고 가방 속에 넣었다.

현관을 나섰다. 개[犬]가 달려들지 않도록 손짓으로 제지하며 뒷마당으로 향했다. 자전거를 끌고 대문을 나선 뒤, 귀에 이어폰을 꽂고 mp3 플레이어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3번’의 제1곡 ‘프렐류드’를 재생시켰다. 차갑고 무겁고 습한 공기를 천천히 갈랐다. 시간은 충분했고, 도로변 텃밭 등에서 흘러나와 군데군데 고인 물웅덩이에 주의를 기울이며 서서히 달렸다. 정류장 인근의 아파트 단지 안에 위치한 자전거 보관소에 도착했다. 벌써 2주 가까이나 배열에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 보관소를 빼곡히 매우고 있는 자전거들 옆에, 내 자전거를 대충 대어놓았다.

만원 버스 한 대는 그냥 보내고, 몇 분을 기다려 두 번째 버스에 올라탔다. 을지로 입구’역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 시간 조절에 실패한 적은 전에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벤치에 앉은 채 전철을 두 대나 지나쳐 보내고서 세 번째로 도착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정각 11시, 요리 학원에 도착하였다. 실습실에 몇몇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그들은 자격증 반 학생들이었다. 가방에서 앞치마를 꺼내 몸에 두르고,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뒤, 수납장에서 칼과 젓가락, 프라이팬, 냄비, 계량컵 등을 꺼내 조리대 위에 나란히 늘어놓고 하나씩 헹구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야채도 한 차례 씻고, 지저분한 양파 껍질은 벗겨내었다. 실습 준비를 거의 끝마쳤을 무렵에야 겨우 가정 요리 반 소속의 주부 몇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이, 내가 이미 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준비 과정을 밟고 있을 무렵, 나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11시 반, 강사가 수업 시작을 알렸다. 오늘의 메뉴는 아귀찜과 파강회였다. 방언 억양이 섞인 말투로 열심히 설명을 곁들여가며 차근차근 펼쳐 보이는 그 요리 과정 하나하나를 꼼꼼히 메모 해 두었다. 뒤이은 실습 시간에, 메모를 참고하여 조리를 시작했다. 야채를 손질하고 끓는 물에 데쳤으며, 각종 재료를 정확한 비율로 섞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손질을 끝마친 재료들을 정해진 순서대로, 조금씩 시간차를 두어가며 넣고 볶았다.
녹말 물을 풀어가며 찜 요리의 농도를 조절하고, 햄과 맛살을 치즈로 맞붙인 다음 데친 실파로 허리를 묶어 파강회를 만들었다.

손수 만든 요리는 그대로 훌륭한 점심 식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지런한 주부들은, 차분히 점심 식사를 즐기지 않고, 서둘러 설거지를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적당히 아귀의 얼마 되지 않는 살점만 떼어 맛을 보고, 짭짤한 파강회 몇 개를 맨입으로 먹은 뒤, 남은 음식은 전부 버리고 설거지를 거들었다.그러나 실제로, 설거지 시간에 내가 할 일이라곤, 세척이 끝난 프라이팬이며 주걱 따위를 진열장에 가져다 놓는 일 정도였다.

오후 1시, 요리 학원을 나섰다. 여전히 공기는 많은 수분을 머금고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예상했던 비는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학교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며칠 전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수신하였다. 최우등생에 선발되었으니 확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지 사항을 찾아 읽어보니, 교내 총장공관 뜰에서 시상식을 거행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2005학년도 2학기 기말 고사 마지막 시험을 치른 후로 반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반년이 아니라, 반세기(半世紀) 쯤 전의 일인 것처럼 희미해져버린 기억에 바쳐지는 상. 그 새삼스러운 시상식 통고(通告)를 별다른 감흥 없이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상식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것이 최초의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예감(豫感)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교 정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의 상단부에는 연세대학교의 축제인 ‘대동제’ 개최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마치 소문의 여신인 ‘파마’의 방에 들어앉은 것처럼, 문명의 이기를 통해 바깥세상의 모든 소식을 접하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여전히 적(籍)을 두고 있는 학교에서 어느 샌가 축제가 시작되었으며, 그도 어느 덧 마지막 날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학교를 방문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요리 수업을 받기 위해 주 3회 꼬박꼬박 신촌에 왔지만, 학교 쪽으로는 걸음하지 않았다. 애초에 신촌에 위치한 요리 학원에 등록하게 된 계기도, 그것이 학교와 가까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니고 있던 미술학원이 근처에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공기 중에 섞여있는 희미한 유대감을 호흡했다. 캠퍼스의 위치를 눈으로 더듬을 적마다 번번이 높이 솟은 빌딩들에 시선을 차단당하면서, 그 유대감은 점차 엷어졌다. 그리고 오늘, 횡단보도 앞에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는 한 무리의 학생들 틈바구니 속에 끼어 있으면서, 이제 나와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캠퍼스 내부에 발을 들여놓은 게 언제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고, 그나마 지난 달 말, 수술 부위 진찰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을 찾으며 슬쩍 본 정문 앞 풍경이, 학교와 관련된 가장 최근의 기억이었다. 학교, 그리고 그것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학생들이 엮어가는 사회. 때때로 내게, 그 사회는, 이해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어떤 불가해(不可解)적인 시스템에 기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것은, 나 같은 외인(外人)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견고의 성(城) 같았다.

“그들은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카프카).”

서글픔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세상이 나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나도 세상과는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캠퍼스 정문으로 향하는 학생들의 무리에서 갈라져 나와, 나는 병원 입구 쪽으로 향했다. 시상식 시작까지는 여전히 1시간 이상의 시간이 있었다. 새 병원 건물을 지나 치과 병원 앞에 이르렀을 때,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완만한 언덕길을 걸어올라 음악대학 건물에 도착했다. 2층에 위치한 음대 도서실에서 알프레드 브렌델이 녹음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세 곡(21, 22, 28번)을 연달아 들었다. 이 음대 도서실은, 내가 이용하는 유일한 학교 시설이다. 음악 CD를 빌려 감상하기 위해서는 학생증을 맡겨야 하는데, 그것을 지갑에서 꺼내들 때에만 여전히 내가 학생 신분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창 밖을 내다보았다. 흐렸지만, 그러나 밝았다. ‘흐렸지만, 밝았다.’ 이 이상한 날씨 속에서, 나는 어쩌면 무언가를 읽어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의 예언이었고, 경고였다. 시상식이 시작되기 직전, 교환학생 상담실에 들렀다. 며칠 전에 있었던 상담회에 불참했는데, 그 후 상담 자료를 따로 찾아가라는 메일을 받았다. 그곳 담당자는, 내가 상담회에 불참했을 뿐만 아니라 자료도 상당기간동안 찾아가지 않은 것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나는 그에 대해 아무런 할 말도 없었고, 상담 자료 따위는 받지 않아도 상관없었으며, 이를테면 시상식장에 너무 일찍 도착하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렀던 것이었기에, 내어주는 자료를 그저 묵묵히 받아들고 간단하게 목례한 뒤 그곳을 빠져나왔다. 결국 시상식장에는 시작 시간보다 5분가량 늦게 도착했다.

시상식은 총장공관 뜰에서 거행되었다. 그런 장소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입구에 위치한 데스크에 내 소속을 밝히고 명찰을 받았다. 이것을 다시 다른 쪽 데스크에 제시하자, 행사 진행 순서와 전(全)수상자의 이름이 적힌 명부, 그리고 ‘메달’이 들어있다는 자그마하고 네모진 상자 하나를 주었다. 그 상자를 받아들고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훨씬 전에, 우등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시상식 일자를 몰라 불참하여 나중에 상장과 경품을 지도교수로부터 별도로 수령했을 때, 그 자그마하고 네모진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경품이 대체 무엇일까 하고 뜯어보았다가 난데없이 튀어나온 메달에 실소(失笑)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뜰에는 수상자들을 위한 좌석이 빼곡했다. 의자가 대여섯 개씩 딸린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과일과 떡 등이 마련되어 있었고 뜰 한쪽에는 각종 음료수와 함께 녹차, 커피 등도 끓여 마실 수 있도록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놀랐던 것은, 전부는 아니었겠지만, 상당수의 학생들이 그들의 부모를 대동하였다는 것이었다. 분명 공지사항에 따르면 수상자의 부모도 참석 대상이었지만, 그러나 설마 학교에서 주는 우등상 수상자리에 부모를 대동하고 나올 대학생은 그다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한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버렸다. 그곳 분위기는 마치 부모들의 자식자랑 축제 같았다.

이미 빈 자리가 거의 없어 자리 찾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시상식은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급히 시작을 알리자 곧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주님은 어느 자리에나 빠지는 법이 없다. 내가 최우등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것도,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주님의 은총 덕분이었다. 이런 시시한 일에, 신의 간섭(干涉) 운운하는 것은 하찮게 생각되었다.

기도가 끝나자, 사회자는 시상식 참석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기 시작했다. 총장을 비롯하여 교내의 인사(人士)들이 총출동한 느낌이었다. 그 호명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내 옆 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는, 아직 식장에 도착하지 않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수상자들의 명단을 받지 못했다며 나와 함께 보기를 청했다. 나는 수상자 명단을 적당한 위치에 활짝 펴 놓았다.

그 명부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였다. 낯이 익다고? 아니, 그것은 한때 내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렸던 이름이었고, 잠들기 직전, 가장 최후까지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그것은 한때 ‘몸 안의 모든 혈관을 고삐처럼 쥐고서’ 폭군처럼 ‘나를 지치도록 부리’던 그 이름이었다. 그것은 내 안에 너무 깊이 각인되어, 심지어 내 살이 썩고 백골이 파쇄(破碎)되어 분진으로 화(化)하더라도, 저 지옥문으로 여정을 떠나는 영혼이 최후까지 품고 있을 바로 그 이름이었던 것이다.

아, 정녕 신(神)의 조화를 이야기한다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한들, 이것은 자비심인가, 노여움인가?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저 경쟁 치열한 미국 대학교 교환학생 선발전에서 4위에 올랐다. 같은 4위더라도, 훨씬 경쟁이 덜 치열한 일본 대학교 교환학생 선발에 참여했던 나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런 내가 최우등상을 수상했다면, 그녀가 이 상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순간 사회자의 줄호명도, 그 외의 자질구레한 대사도 모두 관심에서 멀어져버렸다. 이 넓은 뜰을 가득 메운 모든 사람들이 일순간 허수아비로 변해버렸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시간의 강이라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의 저편에, 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 겨울 날, 비좁은 골방에 들어앉아, 창 너머 눈[雪]으로 새하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고뇌와 불안, 희망과 열정 때문에 밤잠 설쳐 붉게 충혈 된 눈으로, 보다 높은 곳을, 태양을, 눈과 정적 속에 파묻힌 세상의 저 끝에서부터 떠오른 아침의 태양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 아름다운 여인에게 바칠 고백의 편지에 써넣을 경이로운 한 문장을 갈구하는 그의 두 눈은 애원(哀願)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은색의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어느 틈엔가 시상이 시작되었고, 시상자가 그녀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 울림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먼 곳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일어 서 있었다. 방금 이름을 불린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소속된 학과의 좌석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일어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 중 과연 그녀가 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한참 후에, 내 이름도 호명되었다. 일어나서 다시 한 번 그녀를 찾아보았다. 여전히 발견할 수 없었다. 동요와 당혹이 물러가자 갑자기 무거운 피로가 몰려왔다. 불안과 초조, 망설임은 이제는 너무 버거운 짐이었다. 사랑의 감정은, 내가 그녀에 대해 일방적으로 품었던 것이었고, 나의 그 서툰 고백으로 ‘동아리 친구’라는 평범한 관계를 뒤틀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도 나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평정을 유지했고, 그래서 나의 고백 이후로도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았지만, 격동을 멈추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서, 나는 그렇게 태연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우연으로라도 그녀와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작별 인사를 건네 버린 나를, 아마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녀가 시상식장에 와 있다면, 만나서 인사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자리에 있다면, 수상자 명단에 오른 나의 이름을 보았을 것이다. 이대로 사라지는 것은 마뜩치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수상에 대한 축하의 말과 함께, 혹시 시상식에 왔는지를 묻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그녀로부터 답신이 왔다. 그녀는, 이곳에 있었다.

그녀와 나는 문자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나는 4개월 전의 상태로 멈추어 있었다. 그것은 내 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지루한 축사와 축가가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몇 차례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녀도 이처럼 늘어지는 시상식을 지루해 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시간이나마, 마치 예전의 동아리 동료 관계로 돌아간 듯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기념 촬영 행사가 시작되었을 때, 그녀의 자리로 찾아갔다. 어디에 있든 단번에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찾기가 어려웠다. 어지럽게 늘어선 테이블이며 의자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계속 그녀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드디어 그녀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녀도 나를 알아본 듯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막상 제대로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그녀 소속 학과의 기념 촬영이 시작되었다. 사람들과 나란히 서서 사진 촬영에 임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억 속의 그녀의 모습과 조금도,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분명 5월이 낳은,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시상식에 참여했다. 실인즉, 그녀 자신보다 부모님이 더 시상식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는데, 그녀의 성격에 미루어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그녀의 부모님을 본 것은, 아마도 그 분들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녀는, 사진 촬영이 끝난 자리에서 부모님을 먼저 보내고 좀더 남아 나에게 시간을 내주었다.

그녀와 나 사이의 대화는, 놀라울 정도로 4개월 전의 주제에 고착되어 있었다. 수업, 교환학생, 그리고 동아리. 이번엔 내가 기념사진 촬영을 마치고, 그녀와 나는 시상식장을 빠져나왔다. 출구에서는 상장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녀는, 학관 앞에서 친구와 만날 약속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곳까지만 동행하기로 했다. 그 짧은 거리를 함께 걷는 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녀는 타 전공과목 네 과목에 자기 전공과목 세 과목, 그리고 교양 수업도 한 과목 수강하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나마 여유로운 케이스라고 덧붙였다. 또 교환학생 건은, 가장 원하던 대학 자리는 2위를 기록한 친구에게 빼앗겼지만, 그래도 선배가 다녀온 대학에 갈 수 있게 되어 만족한다는 것. 동아리는, 새로 들어온 8기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어 자신은 낄 틈이 별로 없고, 동기 멤버들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등.

그녀가 말하고 있는 수업, 교환학생, 그리고 동아리 이야기는, 아마도 나와 관련해 가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통의 대화거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모든 것들이 아득히 먼 옛날의 일, 혹은 전혀 별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수업도 듣지 않았고, 교환학생 신청은 일단 원서를 넣어 둔 뒤로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보냈다. 동아리 일에는 벌써 반년 가까이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아침마다 수업을 들으러 간다는 ‘위당관’이 학교의 어디쯤에 위치한 어느 건물인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선명히 기억나는 한 가지가 있었다. 모레가 그녀의 생일이라는 것이었다. 작년 여름 우연히 그녀의 생일을 알게 된 뒤로, 나는 5월을 사랑하였고, 심지어 5월에 바치는 찬시(讚詩)를 쓰려고 마음먹은 일까지 있었기 때문에,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미리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그녀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생일 같은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도 나 스스로의 생일을 축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일은 자기 자신보다 그것을 훨씬 더 축복으로 여기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의 생일을 소중하게 여기고 축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고. 그것은 나의 감정 상태를 떠나, 앞으로도 변치 않을 사실이다.

우리는 동아리 방이 있는 글로벌 라운지 앞을 지나갔다. 도중에 한때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했던 선배 한 사람과 마주쳤지만, 무언가 바쁜 일에 쫓기는 듯싶었던 그 사람은 나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고, 나 역시 모자를 쓰고 있던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서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혹시 동아리 방에 들러 볼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다. 물론 동아리에 어느 정도 순수한 열정을 바쳤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있었기에, 그토록 동아리에 충실을 다 했던 것이다. 내가 동아리를, 그리고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난 일은, 이미 그녀 옆에서 친구로나마 존재하기를 포기한 순간에,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누구와도 그 어떤 조직과도 유대를 갖기를 원한 적이 없다. 원한 것이 있었다면, 오직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 해 주기를 바랐던 그 한 가지 뿐이었다.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학관 앞에서 헤어졌다. 내 마지막 인사는 그동안의 이야기의 요약판이었다. 만나서 반가웠고, 생일 미리 축하하며, 교환학생 잘 다녀오기를,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또 보자.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터벅터벅, 백양로 길을 걸어 내려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가슴 속에서 후회와 절망을 닮은,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닌 감정이 덩어리졌다. 어쩌면 내 생의 단 한 차례 있을, 이 기막힌 재회의 순간에, 나는 어째서 그런 시시한 얘기밖에는 하지 못하였던 것일까? 어째서 나는, 어떤 결론도 없는 어정쩡한 태도 밖에는 취하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어째서 그녀에게 보다 다른 이야기, 이를테면 내가 호주로 떠났던 것은 그녀의 흔적을 좇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말하지 못하였던 걸까? 태양이 녹아든 시드니 만(灣)의 금빛 물결을 바라보며 얼마나 간절히 그녀를 생각했었는지, 삶의 활기로 충만한 거리를 자연스럽게 거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얼마나 세밀하게 머릿속에 묘사했었는지, 미술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일화를 담은 그림을 보고 얼마나 깊은 상념에 잠겼었는지,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에어즈 록 위로 태양의 마지막 빛이 명멸하던 순간, 내가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 어째서 오직 그녀의 모습뿐이었는지, 아, 은하수가 가로놓인, 사막의 밤하늘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러나 이미 하늘에 내걸 소원을 갖고 있지 않은 내게 별들로 가득한 그 하늘이 얼마나 공허하게 느껴졌는지를.

그러나 모두 다 부질없는 망상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중충한 회색빛 하늘, 흐물흐물한 구름 속으로 햇빛이 스미고 있었다. 나는 똑바로 태양을 응시했다. 눈이 아파올 정도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현기증과 피로가 몰려왔다.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일까? 방금 있었던 일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왜 여기 이렇게 서서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 태양, 태양 때문에······.”

한때 잠들기 전 주어지는 겨우 삼십 분이나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얇게 저미고 펼쳐서 하루, 하루, 그리고 또 하루를 내 멋대로의 상상으로 엮어가며 남들보다 열 배는 더 빨리 늙어가고 있을 무렵에조차, 그녀와 나는, 전혀 상관없는 남남이었을 뿐이었다. 결코 변하지 않는 그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 뿐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째서 지금 이 순간 더 혹독하리만치 분명하게 감지되는가? 비가 내릴 듯 내리지 않고, 회색 빛 구름 속에서도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는 기묘한 날씨처럼, 이 우연하며 짧은 재회의 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덧없는 환상이었던 것은 아닐까.

분당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을 때, 심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쳐있었으나, 잠들지는 않았다.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감정의 퇴조(退潮). 진심이 담긴 마지막 눈물을 흘렸던, 그 ‘아득히 먼 옛날’ 이후로, 나는 허탈하게 웃었고 건성으로 화냈다. 순간순간 내 모든 감각 기관들이 달음질쳐 내 내부의 깊숙한 곳 어딘가에 숨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이 세상에 기름 막을 덮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은 본래의 선명한 색을 잃어버리고 만다. 모든 것은 무뎌진다. 내 심부에까지 전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때마다, 어떤 예리한 칼날이 내 몸속 어느 한 점에 뭉쳐버린 통각(痛覺)을 겨누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그 예리한 칼날이 내 몸속으로 뚫고 들어와 감정의 핵을 찌르는 그 순간,

“기쁨이든, 슬픔이든, 고통이든 한계를 넘으면, 결국 파멸하고 만다.(괴테)”

그녀가 바로 예리한 칼날이었고, 오늘이, 지금까지 몇 차례나 유예되어왔던 바로 그 순간이었을까? 하지만 나의 감정들은 또다시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물러갔다. 나는 그저 피로감 이외에 다른 무엇을 느끼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그녀를 위해 사십일 동안 썼던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그즈음에 나는 어디를 향해서 계속 추락하고 있을까.”

어쩌면 나는 여전히 추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원이 끝나지 않는 추락. 끊임없이 무언가를 조금씩 상실하는 과정. 그리고 이윽고 나는 완전히 무욕(無慾)적인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나는 어느 때고 마음껏 먹은 손님처럼 인생을 떠나갈 수 있다.

5/19
2006/05/21 05:18 2006/05/21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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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에서 반팔 티와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맨살에 와 닿는 햇살은 따가우리만치 강렬했다. 마당에는,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 아침 산책을 다녀온 두 마리의 개가 널브러진 채 뜨거운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늘은 깨끗했고, 산은 덤벼들 기세로 푸르렀다. 여름이었다. 셔츠 소매를 들추어 보았다. 자외선의 흔적은 이곳에 이르러 모호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살을 그을려 놓은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여름의 태양이 아니다. 이것은 ‘생겨나는 흔적’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흔적’이다. 회상 속에서만은 여전히 찬란히 빛나고 있는, ‘호주 하늘의 태양’에 대한, 몸의 기억인 것이다.

지난겨울, 한반도에 본격 한파가 몰아칠 무렵, 나는 적도 이남의 대륙 국가 호주로 떠났다. 한겨울에도 장정들은 반팔 티를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는 시드니. 북반구에 위치한 한국과는 계절이 정반대여서 여전히 한여름인 그곳의 하늘은, 그야말로 염천(炎天)이었다. 피부암 발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호주의 저 이글거리는 태양이, 불과 며칠 전에 눈발 흩뿌리는 구름 사이로 언뜻 모습 내비치던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어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완전히 다른 하늘, 전혀 새로운 태양 아래에서, 나는 온전한 ‘여름’의 한 달을 보냈다.

지붕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뜨거운 여름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눈이 녹아내렸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쌓여 있던 우울한 몽상. 여름은 그마저도 집어삼키고 불타올랐던 것이다. 내 안에서, 더욱 뜨겁게! 나는 혼자였고, 고독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쾌활(快活)하였고, 자유로웠다. 나는 심지어 ‘열정(熱情)’을 생각했다!

지붕이 드리운 그늘 아래서 무성한 나뭇잎 속에 몸을 묻고 여유롭게 눈만 껌뻑이는 코알라를 바라보며, 지붕 없는 곳에 선 채 선 블록을 바르지 않아 벌겋게 익어버린 얼굴을 하고 부신 눈을 겨우 가늘게 뜨고 있던 나는, 그러나 ‘네가 귀물(貴物)이로구나.’하고 웃어버렸다. 나는 보았다. 사막의 태양을. 그것은 대지를 그슬리는 파에톤의 수레바퀴. 우울 · 고뇌 · 번민 · 불안마저 녹아들어간 용광로이며, 열정 · 낭만 · 분노 · 격앙 · 흥분을 토해내는 사출구(射出口). 거대한 화구(火口)로부터 뿜어져 나온 용암과도 같은 아침놀은 광요(光耀)를 끌어안고 퍼져나가 구름조차도 삼켜버렸다. 아, 불타는 하늘, 화염의 바다! 그 일렁임은 거대한 힘이 되어 내 안으로 들이쳤다. 감정의 격류! 그리고 외쳤다, 나는 바란다! 나는 원한다!

그렇게 여름은, 한순간 거센 열풍(熱風)으로 휘몰아쳤다.

나는 돌아왔다. 이곳 3월 초엽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나는 그 신선한 냉기를 마음껏 들이켰다. 섣불리 앙양(昻揚)되었던 광분한 정신은 조금씩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날씨는 곧 더워지기 시작하였다. 봄은 어느 구석엔가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벚꽃과 함께 폭발하였고, 사라졌다. 또다시 계절은 여름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올려다본 태양은, 나를 그토록 뜨겁게 달구어놓았던 바로 그 태양. 너무나도 짧은 주기로 반복되는 여름, 계절감이 흐트러진다.

아, 눈부신 태양이여, 인생의 어느 한 도막이 그대와 같이 찬란할 수 있을까? 여름과도 닮은 한 때의 젊음을 골라 뜨거운 빛을 쪼이는 너, 우울(憂鬱)에 그대의 빛 쇠하는 일 없고, 청춘의 번민마저도 잡아먹어 더 거세게 불타오르는구나. 지친 숨 헐떡이는 여름,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젊음이 있으니!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팽창하는 의욕. 노곤(勞困)도, 게으름도, 방만(放漫)도, 방황(彷徨)도 어쩌지 못하는 열망, 그 위대하고 오만한 착각이야말로 광분하여 불타오르는 한여름 날의 태양이어라!
여름, 다시 여름으로.
2006/05/09 15:55 2006/05/0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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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늦게까지 벚꽃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이곳 산골 집의 매력이다. 그러나 며칠 전까지도 산 군데군데를 환하게 밝혀놓았던 벚꽃은 이제 거의 져버렸다. 온 산을 뒤덮은 녹색은 너무나도 선명하여 자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광택이 도는 유화(油畵) 같은 느낌을 준다. 옆집 마당에 우뚝 선 벚나무를 스치는 실바람 한 줄기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꽃잎을 떼어내어 울타리 안쪽에 떨어뜨려 놓는다. 그 초라한 낙화(洛花)를 바라보며, 이번에도 때늦은 후회에 사로잡힌다. 만개한 벚꽃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는 정작 그것을 마음껏 감상하지 못했다. 그토록 좋아하는 벚꽃이면서, 어째서 번번이 때를 놓치고 마는 것일까.

나에게 봄은, 언제나 화사한 벚꽃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아니, 봄과 벚꽃은 완전한 동의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봄비가 촉촉이 대지를 적셔도, 따스한 양기가 헐벗은 토지 위에 부드럽게 깔려도, 벚나무 가지에 꽃이 피기 전에는 봄을 실감할 수 없었다.뭇 사람들은 두터운 코트를 벗어놓기가 무섭게 봄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내게는 그것이 너무 성급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벌써부터 봄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을 때, 나는 조금 더 인내를 가지고 봄을 기다렸다. 4월 문턱을 넘어서서 드디어 벚나무 가지에 망울이 지면, 봄은 서서히 내 상상 속에서 먼저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찰나(刹那)와도 같은 순간의 봄이다.

햇빛을 받아 융랑(融朗)하게 섬요(閃燿)하는 벚꽃의 향연(饗宴). 산 하나를 한 그루의 거대한 벚나무로 만들어버리는 풍성한 꽃송이들. 선들선들 부는 춘풍(春風)을 눈앞에 그려놓는 화우(花雨), 그리고 달빛에 비쳐 아스라이 드러나는 밤 벚꽃의 매혹. 어느 한 군데 흠을 논할 수 없는 완벽한 미(美)로, 봄은 어느 샌가 내 머릿속에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어느 때고 이러한 것들을, 이 도저히 놓칠 수 없을 것 같은 아름다움을 좇아 나선 적이 있던가? 막상 고대하던 봄이 오고, 벚꽃이 만개하면 언제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했었냐는 듯, 무심함이 내 가슴을 점거하고 나서지 않았던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동산이 시시각각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데, 나는 단 십 여 분이라도 그 정경을 차분히 감상한 일이 없다. 정작 꽃비가 내릴 때에는, 어느 한 장의 잎이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에 가 닿아 살며시 수면을 두드리는 그 숨 막힐 듯 조용하고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외면했다. 그래놓고서 이제야 탁색(濁色)된 꽃잎이 맥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때늦은 후회를 품는다. 그토록 좋아하는 벚꽃이건만 어째서? 아니, 나는 정말로 벚꽃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 좋아하는 마음에 어떤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때때로 생각하면 불안하다. 상상에 의해 각색되지 않은, 온전히 이 세상의 것을 나는 사랑한 일이 있었는가.

나는 이따금, 나 자신의 감정 토로가 얼마나 솔직한 것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그것은 어쩌면 크게 부풀려져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회화에 바친 나의 찬사는 오직 진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떤 음악회장에서 나는 정말로 ‘전율’을 느꼈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은 ‘언어’로 표현하여 확정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숨겨진 의도에 의해 발설된 거짓이 아니었을까? 나는 오직 상상만을 사랑하였고 정작 실체에는 마음을 준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나는 벚꽃을 동경한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거리를 걷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는 느낄 수 있는 그 감동을, ‘현실’의 꽃비가 쏟아지는 길목을 걸으면서 단 한 차례라도 맛본 적이 있었던가? 내 머릿속의 이미지들은 물론 현실 세계에서 내가 직접 목격한 것들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토대의 역할에 불과하다. 대체 무리 진 달빛이 발하는 휘광(輝光)과 어우러진 밤 벚꽃이라는 것을 나는 본 적이나 있었던가? 그것은, 어느 가을 날 밤 우연히 산책을 나갔다가 본 아름다운 보름달의 인상을 엉뚱하게도 벚나무 위에다가 걸어놓음으로써 억지로 생성해버린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상상 속에서 재구성하고 오직 그 안에서만 지극한 감동을 탐색하여 왔던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기만(欺瞞)적인 행위인가. 얼마나 기만적인 감동인가.
2006/04/28 22:43 2006/04/28 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