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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신이니, 신은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우주이니, 신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거대한 것은 공간이니,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것은 지성이니, 모든 것을 관통하여 내달리기 때문이다.
가장 강한 것은 필연이니,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가장 현명한 것은 시간이니, 모든 것을 결국 명백하게 밝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곤란한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요,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것이다.”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가 쓴 그리스 철학자 열전의 첫 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탈레스. 그는 인류사상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곤 한다. 러셀의 서양 철학사를 펼쳐보아도 탈레스의 이름을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다.

탈레스는, 잘 알다시피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탈레스의 이 명제는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진짜 의미와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탈레스는, 이를테면 몇몇 특수한 상황에서 적용되는 법칙을,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일반 상황에 폭넓게 적용 시키는 ‘일반화’를 처음 시도한 사람이다.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생각도 그저 공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태양이 물을 증발시키고, 바다의 표면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구름이 비가 되어 떨어지는 자연 현상을 면밀히 관찰한 후에 도달한 결론이었을 것이다.

탈레스의 생몰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고, 그의 업적에 대해서도 후대의 기록이 너무 분분하여서 대체 뭐가 진짜 그의 행적이고 말인지 불분명하다(위의 인용을 포함하여). 다만 탈레스가 일식을 예언했다고 하는 사실은 유명한 전승으로, 후대의 학자들은 탈레스가 예언했다는 이 일식의 시기를 측정하여(기원전 585년이라고 한다) 그의 활동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2009/06/16 15:09 2009/06/1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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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에는 한때 밀라노 공국을 지배했던 스포르차 가문의 웅장한 성채가 있다. 포(砲) 이전 전쟁의 유물인 이 성은, 어중간한 기백은 압도해버리는 높은 성벽이 인상적이다. 벽돌로 탄탄하게 쌓아올린 성벽 둘레에는 해자(垓字)가 깊게 파여 있다. 그 성채 앞에 서서 나는 생각했다. 대체 이러한 성채는 왜 만든 것일까?

성벽의 목적은 당연히 방어이다. 그러나 웅장한 성채라고는 해도, 전투를 몇 번 치러낼 수 있을지언정 전쟁을 치러낼 수는 없는 규모다. 성채를 이만큼 확장하고 개축한 스포르차 가문은 프랑스의 공격에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런 ‘하찮은’ 방벽은 전쟁 앞에서는 무력하다.

이러한 성채는 외적, 즉 적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외적을 생각하고 세운 것이 아니라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지배 가문이 내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내부의 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신과 국민이다. 이토록 튼튼해 보이는 성체는 사실 불안한 정치 기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20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약 군주가 외세보다도 신민을 더 두려워한다면, 그는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군주가 외세보다도 신민을 더 두려워해야만 하는 형편에 처한다면, 그 지배자의 미래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다.

‘로마사 논고’ 제2권 24장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통치자)의 사악한 행동은 강제로 백성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나 통치자로서 그가 지닌 경솔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강제로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원인들 중 하나는 그가 백성들을 제압할 수 있는 성채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설령 당신이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어도 약탈당한 백성들에게 무기는 남겨져 있을 것이고 만약 당신이 그들의 무기마저 빼앗는다면 분노가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들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계속해서 다른 나머지 사람들도 해친다면, 마치 히드라의 머리처럼 그들의 머리가 또다시 생겨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군주에게 최선의 요새는 그의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군주론)”라고.



시청 앞 광장은 내가 학교 가는 길에 언제나 지나치는 장소이다. 현 정부 들어서 이 광장이 철옹성으로 변모한 것을 목격한 것만 몇 번이었던가. 저 성벽은 누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일까.

분명 민의(民意)라는 것은 항상 옳지만은 않다. 다수의 판단이란 흐름과도 같은 것이며, 집단 지성이라는 것은 때론 중우(衆愚)에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공포에 질려 절벽으로 뛰어드는 소떼들처럼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해 걸었다.

따라서 치자(治者)는 항상 민의(民意)에 따라서만 통치를 할 수 없다. 때로는 다수의 뜻에 반하여 의지를 관철시키고, 방향을 새로 설정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민은 다스림의 대상이며, 민은 국가 그 자체이다. 민과 싸우는 ‘정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소수의 권익만이 보호되는 성벽의 안쪽, 한 줌의 땅 위에 민은 살지 않는다. 그것을 어찌 나라라 부를 수 있을까? 설령 그 안에 무장한 이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남면(南面)한 채 앉아있는 이가 있다고 한들, 그가 어찌 치자(治者)일 수 있겠는가?

나라 안의 작은 성채는 언제나 사(私)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그 안에서 언제나 사사로운 이익만을 생각하는 무리들이 바로 한비자가 말하는 ‘나라를 좀먹는 벌레의 무리들’인 것이다.

2009/05/28 03:48 2009/05/28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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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으로 성장한 테세우스는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 무렵 아테네까지의 육로는 흉포한 도적떼들이 들끓어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힘세고 걸음이 빠르고 체력이 좋은 사람들은 대부분 도둑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의와 공정심, 자비심 같은 것들은 힘이 약한 자들이나 하는 소리이며, 힘을 가진 자신들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당시의 아테네는 부족 연합 수준의 나라에 불과했으며, 도시의 지배권은 넓지 않았다. 정치체제는 왕정(王政)이었는데, 장자 계승도 담보하지 못 할 정도로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아테네가 폴리스들의 모국(母國)이 된 것은, 테세우스 이후부터라고 한다. 그는 도적떼와 무법자들을 힘으로 처벌하는 한편,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여러 부족들을 설득하여 통일된 법질서 아래 복속시킴으로써 국가와 질서를 세웠다.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여, 이 땅에 오라.”는 그의 호소에, 평민과 가난한 자들이 가장 먼저 달려왔고, 권세 있는 자들은 꺼렸다. 그러나 결국 아테네가 폴리스의 으뜸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힘의 논리만이 존재하는 무질서보다는 아테네의 질서를 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루소는 “권리의 조정이 없는 곳에는 오직 선점(先占)과 강점(强占)만이 존재한다.”고 썼다. ‘힘이 세고 걸음이 빠르며 체력이 좋은’ 이들은 마음껏 몽둥이를 휘두를 수 있는 세상을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와 같은 더욱 힘센 자들에 의해, 자신들이 약자에게 행했던 바를 그대로 되돌려 받고 말았다.

오늘날 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머리 좋고, 셈이 빠르고, 배짱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사기꾼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정의와 평등보다는 편법과 특혜를 더 선호하는 법이다. 그 부정 속에서만 그들의 권세가 천년만년 지속될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 테세우스 같은 이가 나타나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해도, 반드시 격렬히 저항하는 무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개혁에 반대하는 무리는 항상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나온다.

이런 무리들을 이겨내지 못 하면 사회는 발전하지 못 하고 정체한다. 정체가 오래되면 고인 물처럼 썩는다. 썩은 물에서는 무엇도 살지 못 해 사회는 망하고 만다. 사실 많은 나라들이 이렇게 망하여 없어졌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영원히 살 수는 없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스러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국가가 채 못 다 핀 수많은 청년들의 꿈과 함께 요절하고 말 것인지 혹은 좀 더 오래 건강한 삶을 누릴 것인지는, 오직 제때 수술을 받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무지와 무관심은 병을 키우는 일이요, 체념은 목숨을 버리는 짓이다. 이런 자들이 스스로를 무어라 변호하든 간에, 현명한 자들이라고 할 수 없다.



 

2009/05/27 05:31 2009/05/27 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