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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37년은 훗날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최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영정이 진(秦)나라 왕위에 오른 지 10년째를 맞이한 해였다. 훗날의 위업으로 역사상 시황제(始皇帝)라 일컬어지는 인물이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적극적인 정복 사업을 벌이기는커녕 섭정 여불위의 손아귀에서 이제 막 벗어나 겨우 친정(親政)을 시작하는 단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정이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 그는 겨우 13세의 소년에 불과했고, 반면 여불위는 영정의 아버지인 영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시절부터 그를 도와, 영자초가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장양왕) 이미 승상으로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해온 노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영정은 즉위 후 10년간을 여불위의 그늘 아래서 숨을 죽이며 보냈다. 그러나 영정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불비불명(不飛不鳴)하며 10년의 세월 동안 서서히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기원전 238년, 여불위의 수하였던 노애의 반란을 계기로 기회를 잡은 영정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여불위를 압박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 여불위가 자결함으로써 비로소 영정의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었다.

거의 시기를 같이 하여 진나라를 뒤흔든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위수 지역 북쪽에 관개수로를 설치하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위수는 남북으로 기다랗게 자리한 진나라의 허리를 관통하고 있는 강이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이 위수에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함양의 북동쪽으로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지역은 땅이 매우 넓지만 물이 부족하여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인공 운하를 설치하여 물을 끌어오면 별 쓸모가 없는 황무지가 단숨에 곡창 지대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한(韓)나라 출신으로 토목 기술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정국(鄭國)이란 인물이었다. 진나라에서 이 진언이 채택이 되어, 정국이 운하 건설의 총책임자로 선정되었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정국이 사실은 한나라가 파견한 첩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국 시대의 나라들 중 가장 세력이 약했
던 한나라는, 반대로 가장 세력이 강대했던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언제 진나라의 병사가 파도처럼 밀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나라 조정은 선수를 치기로 했다. 물론 힘으로 겨뤄서는 승산이 없다. 힘으로 안 된다면 꾀로 승부를 걸어볼 수밖에 없다. 한나라의 속셈은, 진나라에 전대미문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스스로 국력을 소진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어설픈 감언이설로 이런 대공사를 일으키게 할 수는 없다. 정말 진나라에 이익이 되는 것처럼 완벽하게 꾸밀 필요가 있다. 한나라도 국가의 명운을 걸고 펼치는 작전인 만큼 신중을 기해서 완벽에 가까운 제안을 만들어낸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가짜 제안에 그쳤어야 할 것이 오히려 너무 완벽한 계획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 운하가 완성되었고, 완벽하게 기능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다.

정작 더 신중을 기했어야 할 부분은 비밀의 유지였지만, 실패하고 만다. 정국의 정체가 탄로 났고, 이 일은 진나라를 뒤흔든 일대 스캔들이 되었다. 이때 진나라 조정의 왕족들이며 진나라 토박이 귀족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타국 출신의 관료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였다.

기원전 237년은 전국시대의 말기에 해당한다. 주나라가 주도하는 봉건 질서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진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보통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사회적으로는 100개도 넘는 제후국들이 난립하여 서로 패권을 다투느라 한시도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혼란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왕성한 지적 활동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립한 수많은 제후국들은 저마다 부국강병을 꾀하기 위해 많은 인재들이 필요했고, 이런 수요가 신분의 차이를 막론하고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천한 신분이면서도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 자가 있었고, 타국 출신이면서도 군대를 통솔하는 장군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 시기에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새파랗게 어린 증삼으로부터 자신의 가르침을 ‘충서(忠恕)’라는 단 두 글자로 요약 당해버린 공자도 춘추시대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를 나와 여러 국가를 떠돌며 일자리를 구했다.

이런 시대였던 만큼, 외국 출신의 인사가 국가의 중요한 책임을 맡아보는 자리에 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진나라는 외국 인재 등용에 열심이었던 것 같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진나라는 비록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는 있어도 중국 대륙의 중심이 아니라 서쪽으로 치우친 변방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진나라가 중국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상당히 소외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실제로 당시 진나라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 용맹하고 호전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열등한 야만족의 인상이 짙게 풍긴다. 진나라의 건국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진나라는 은나라 주왕을 섬기던 신하 악래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고 한다. 은나라의 주왕은 폭정으로 주나라에게 반란의 빌미를 제공한 폭군이었고, 악래는 그 주왕과 죽이 잘 맞은 간신이었던 모양이다. 주나라는 은나라 정복 후 설령 주왕의 친족이라 하더라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제후로 봉했을 정도로 처분에 관대했지만, 악래는 처형했다. 그런 악래의 후손들이 변방에 세운 나라라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까, 당시 중국 대륙 중앙에 위치한 국가들이 진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은 곧 뛰어난 인재를 배출할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국민들의 기질이 용맹하다고 해도, 이것을 잘 통합하고 이끌 지도자가 없어서는 패자(覇者)가 될 수 없다. 진나라가 외국 인재 등용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납득이 갈 뿐만 아니라, 훌륭한 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무리 국경의 의미가 오늘날과 같지 않은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외국 인재의 등용을 모두가 달갑게 여긴 것은 아니다. 외국 인사를 관료로 임명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오늘날에는 심지어 험한 일을 도맡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조차 눈을 흘기는 것이 인심이다. 따지고 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나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게 그들을 배척하는 본심이지만, 항상 대의명분은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식으로 귀결된다.

또한 높은 문화 수준으로 동질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중국 중앙부의 국가들과는 달리, 진나라 토박이들은 열등의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외국 출신의 인사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정국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순수 진나라 토박이들은 이것이 외국 출신의 인사들을 추방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회복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진나라 왕 영정은 이제 겨우 여불위를 물리치고 친정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시작부터 정치적 시험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향후 영정의 국가 운영 방침을 결정하는 중대한 사안이기도 했다. 당시 영정의 나이는 고작 이십대 초반. 그의 결정에 따라 향후 수십 년 진나라의 정책 노선이 달라질 터였다.

역시 젊었던 탓인지, 영정도 혈기왕성했다. 외국 인사들을 추방하고 진나라 사람들끼리 똘똘 뭉치자는 의견에 솔깃했다. 지난 10년간 자신을 억눌렀던 여불위도 실은 한나라 출신이었다고 하니까, 그로 인해 더욱 타국 출신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영정은 결심을 한다. 곧 축객령(逐客令)이 내려졌다. 객(客)이라고 하면 오늘날에는 ‘손님’의 의미로 이해되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객(客)들을 좇아내라(逐)라는 령이라고 해서 통칭 축객령이라고 한다.

이웃 나라를 위해 첩자 노릇을 하던 정국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것은 당연하지만,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라고는 하나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진나라 조정을 섬겨왔던 많은 인재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성취를 잃고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이사(李斯) 역시 그런 난처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사(李斯)는 원래 초나라 사람이다. 소년 시절에 뒷간의 쥐와 곳간의 쥐의 태도가 다른 것을 보고 환경의 중요성을 통찰했다고 하니까,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사가 초나라에 머물러서는 뒷간의 쥐 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일찌감치 진나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고는 과연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여 순조롭게 승진했다. 축객령이 내려질 당시 이사는 객경(客卿)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경(卿)은 공경대부(公卿大夫)로 통칭되는 중국 고유의 직위 제도 안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다. 경(卿) 앞에 객(客)자가 붙은 것은 외국 출신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위치가 높은 만큼 표적이 되기도 쉽다. 이사는 당장에라도 추방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사가 왕에게 글을 한 편 써 올린다. 축객령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명을 물릴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것이 ‘축객령에 간(諫)한 글’이라 하여 ‘간축객서(諫逐客書)’라 불리는 유명한 글이다. 여기 그 전문을 소개한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진나라 관리들이 외객의 추방을 결의하였다고 하는데, 신의 생각으로 이는 당치도 않은 결정입니다. 옛날 목공(穆公)은 어진 선비를 구하여 유여를 서쪽의 융(戎)에서 취했고, 백리해를 동쪽의 완(宛)에서 얻었으며 착숙을 송나라에서 맞이했고 비표, 공손지를 진(晉)나라에서 찾았습니다. 이 다섯 사람의 모국은 진나라가 아니었지만 목공은 그들을 등용하여 20개국을 병합하고 마침내 서융(西戎)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또 효공(孝公)이 상앙의 법을 채용하여 풍속을 개혁함으로써 백성은 번영하고, 나라는 부강하게 되고, 백관은 즐거이 봉사하고 제후는 친히 복종하고, 초(楚), 위(魏)의 군사를 깨뜨려 넓힌 토지가 천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군사가 강한 것입니다. 혜왕(惠王)은 장의의 계획을 써서 삼천(三川)의 땅을 둘러 빼고, 서쪽으로 파(巴), 촉(蜀)의 땅을 합하고, 북쪽으로 상군(上郡)을 치고, 남으로 한중을 취하여 여러 오랑캐를 아우르고, 언(?), 영(?)을 제압하고, 동은 성고의 험난한 곳을 의지하여 기름진 토지를 뺏고, 마침내 6국의 합종을 해체하여 진나라에 복종케 하였습니다. 그 공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왕(昭王)은 범수를 얻어 그 계략에 의하여 양후(穰候)를 폐하고 화양군을 추방함으로써 공실을 굳세게 하고, 사가의 번창하는 길을 막고, 제후의 땅을 잠식하여 진나라의 제업을 이룩하였습니다. 이 네 분의 군주는 모두 외객을 등용하여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외객이라 하여 반드시 진나라를 배반한다는 것은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이란 말입니까? 만약 이 네 분의 군주가 일찍이 외객을 물리쳐 받지 않고 어진 선비를 등용하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부귀함을 거두지 못 하고 진나라의 굳센 명성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폐하는 곤륜산(崑崙山)의 유명한 옥을 손에 넣었고, 수후주(隨侯珠)와 화씨벽(華氏璧)을 지니고 계시고, 명월주(明月珠)로 몸을 치장하고, 태하의 명검을 차고, 성리의 좋은 말을 타며, 취봉(翠鳳)의 깃털을 세우고, 악어가죽으로 만든 북을 설치해 놓으셨습니다. 이들 여러 가지 보배는 어느 하나도 진나라에서 난 물건이 아닌데 폐하께서 이런 물건을 귀중히 생각하는 것은 어쩐 일이십니까? 만약 진나라에서 나는 물건만을 쓰신다고 하면 야광의 벽옥은 조정에 장식할 수 없고, 뿔과 상아로 만든 기물은 완상할 수 없으며, 정(鄭), 위(衛)의 미녀는 후궁으로 들일 수 없고, 결제 같은 준마도 마구간에 넘칠 수 없으며, 강남의 금, 은도 쓰임새에 충당할 수가 없고, 서촉의 단청도 채색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후궁을 장식하고, 궁내의 쓰임새를 충당하고, 심정을 즐겁게 하고, 이목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진나라 산물이 아니면 쓸 수가 없다고 한다면, 완의 주옥으로 만든 비녀, 구슬을 붙인 귀고리, 아호(阿縞)의 비단옷, 금수의 장식은 대왕의 앞에 올릴 수가 없으며, 토속 그대로 아취를 더한 조나라 미인 역시 지금처럼 폐하를 모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독을 치고, 항아리를 두드리고, 쟁을 퉁기고, 무릎을 치며 노래 불러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참으로 진나라의 음악이며 정(鄭), 위(衛), 상간(桑閒), 소(昭), 우(虞), 무(武), 상(象)은 이국의 음악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진나라에서는 물독과 항아리를 두드리는 대신 소와 무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이 곧 마음을 즐겁게 하고 눈으로 보기에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인물을 취하는 것은 이와 다르게 논설의 가부와 행위의 곡직을 말하지 않고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제외하여 외국 사람을 추방하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진나라가 존중하는 것은 여색과 음악뿐이며 인물은 경멸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일어서서 해내(海內)의 제후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신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고, 나라가 크면 사람이 많고, 군대가 굳세면 병졸이 용감하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같이 태산은 한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기에(泰山不辭土壤) 그토록 크며, 바다는 한 가닥의 가는 물줄기도 가리지 않아(河海不擇細流) 그토록 깊어진 것입니다. 임금 역시 한 인간일지라도 물리치지 않기 때문에 덕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의 땅에는 사방의 구별이 없고, 임금의 백성에는 이국의 차별이 없고, 네 계절이 조화하여 그 아름다움이 충만하고 귀신도 성인의 시대를 칭송하여 복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삼황과 오제로 하여금 적이 없게 했던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민을 버리고 적국을 이롭게 하며, 빈객을 물리치고 제후를 도와 천하의 선비를 뒷걸음질 치게 하여 서쪽으로 향하게 아니하며, 발을 묶어 진나라로 들여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원수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 됩니다. 진나라에서 나는 물건이 아니고도 보배로 삼을 것이 많으며, 진나라에서 난 선비가 아니고도 충성을 바치는 자가 많습니다. 이제 외객을 추방하여 적의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줄여서 원수에게 이롭게 하고, 국내에서는 스스로 모자라는 것을 견디고, 국외에서는 열국의 원한을 사면, 어떻게 나라의 편안을 바라며 어떻게 소원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타국 출신의 인사들이 진나라 조정에 진심을 다해 충성할 리가 없다, 결국 자기 출신 나라의 이익이 결부되면 배신을 할 게 분명하니까 미리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논리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주장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물리치기가 더 어렵다. 아무리 정연한 논리를 세워 반박하더라도 듣는 쪽에서 귀를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이사(李斯)의 글은 과연 명문이다. 논리적으로도 흠잡을 구석이 없다. 그러나 이 글이 진정 명문으로 꼽히는 까닭은, 이 글이 단지 완벽한 논리만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강하게 호소하는 어떤 기백이 서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진나라 토박이들의 옹졸한 생떼로 들뜬 왕의 가슴을,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웅장한 기상으로 달궈놓는 것이다. 이사는 글에서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표현도 서슴지 않지만, 요순시대 이야기를 꺼내며 왕이 앞으로 이룩해야 할 위업이 어떤 것인지를 넌지시 암시한다. 요순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그것은 중국 대륙이 완전히 통일되어 하나의 왕 아래 질서를 갖추고 국가의 구분 없이 모든 백성이 화목을 누렸던 이상의 시대가 아닌가? 장차 그런 시대를 다시 열어야 할 분이 지금 이 나라 사람 저 나라 사람 운운하는 것은 너무 쩨쩨한 것 아닌가? 이사가 글 서두에 구구절절 늘어놓은 과거의 예는 단지 과거의 예일 뿐이다. 그런 케케묵은 이야기들은 사실 무시해도 좋다. 하지만 장차 진나라가 중국 대륙의 태산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한 줌의 흙이라도 마다하지 말아야 할 시기에, 오히려 산을 스스로 허물 작정인가?

결국 축객령은 폐지되었다. 이사가 계속 중용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번 스캔들을 일으킨 장본인인 정국조차 첩자 노릇을 관두고 공사에 최선을 다해 운하를 완벽하게 완성시킨다는 조건 하에 처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직위도 그대로 두었다. 이후에 정국은 자기 목숨을 걸고 한 약속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일국의 일개 첩자로 이름을 남기기보다는 운하의 완성자로 이름을 남기고 싶은 토목 전문가로서의 자존심 때문인지, 정말 운하를 완벽하게 완성했다. 정국의 이름을 따 정국거라고 불린 이 운하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어, 고대 중국의 뛰어난 건축 기술의 증명이 되었다.


<오늘날 새로 정비된 정국거의 모습>

이사의 호소가 이제 막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접어든 야심찬 젊은이의 가슴을 새로운 기백으로 채우고 시선을 미래로 돌리게 만든 것이다. 어차피 조만간 자신이 대륙을 통일하면 진나라, 초나라, 한나라의 구분도 없다. 이사의 글을 읽고, 영정은 벌써 여기에 생각이 미쳤는지도 모른다.

정국이 완성한 운하로 황무지는 옥토로 변모했다. 이 옥토의 생산물이 진나라가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사 등 외국 인재들을 두루 활용한 것도 종전과 다름이 없었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중국 대륙을 통일했고, 영정은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게 되었다. 대륙 변방의 가장 야만한 나라 중 하나였지만, 외국의 것을 배척하지 않고 잘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에 마지막에는 오히려 다른 나라들을 모두 제압하고 패자(覇者)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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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젊어서는 포용력이 있고 진취적인 기백이 넘쳤던 영정이, 통일 이후에는 그런 장점을 모두 잃고 만다. 너무 젊어서부터 두드러지면 쇠퇴도 빠른 것일까. 진나라는 이사나 정국 같은 타국 출신의 책사, 기술자들을 등용함으로써 패업을 이룬 나라다. 그런데 통일 이후에는 밖으로는 오랑캐 대책으로 만리장성을 쌓아 국력을 소모시키고, 안으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대표되는 사상 탄압 정책으로 다양성의 씨를 말려버렸다. 결국 진나라는 통일을 이룩한 지 15년 만에 너무나도 허망하게 망하고 말았다. 외국인 기술자를 등용하여 만든 운하는 국력을 신장시켰지만, 외침을 막으려고 세운 성벽은 오히려 국가가 망하는 원인이 되어버렸으니 이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오늘날 여전히 우리, 우리의 것, 국가, 민족을 외치는 것을 진정한 애국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간축객서의 태산불사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辭土壤 河海不擇細流)란 구절과 더불어 이런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2009/10/15 04:54 2009/10/15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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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군 입대를 앞두고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운운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들려주었던 이야기. 이제는 나를 위해 되새겨야 할 때인 것 같다.



시오노 나나미 <침묵하는 소수 中 "어느 모범수의 탈옥기" 전문>

17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로마에 주세페 피냐타라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직업은 추기경 비서였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는 거주하고 있는 추기경 수도 많으니, 이런 사람들을 보좌해주는 비서직은 당시 가진 재산이 별로 없는 지식인으로서는 귀족 집안의 가정교사와 더불어 일반적인 직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피냐타는 이제 비서가 아니다. 20대부터 모시던 추기경이 죽은 것이다. 게다가 죽을 때 그가 남겨준 연금은 검소하게 생활하면 일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한 정도였으니, 새 주인을 찾아나설 필요도 없었다. 지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유복한 가브리엘레 백작이 청하는 대로 그 집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것이 지금 그에게는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혈육이라고는 이전의 그와 같은 직업을 택한 아우 한 사람이 독일에 있을 뿐이다.

백작의 만찬 모임에서는 철학이나 역사, 과학이 주된 화제였다. 종교에 관해서는 이 집안의 전속 참회 청문수도사인 올리버가 말을 꺼내지 않는 한, 누구도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반동종교개혁의 폭풍은 한 세기 전만 해도 자유로운 르네상스를 누리고 있던 이곳 로마조차도 숨막힐 듯한 세계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피냐타가 체포당한 것은 평온하지만 지적인 자극으로 충만한 생활이 2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백작의 집을 나와 어두운 샛길을 가야 하는 두려움도 잊은 채, 착 가라앉은 여름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느긋한 걸음으로 귀가하고 있을 때였다. 남자들 몇이 그를 뒤에서 덮치더니 머리 위로 망토를 뒤집어 씌워 꼼짝 못하게 하고는 마차에 던져 태웠다. 망토가 벗겨진 것은 마차가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선 후였다. 달빛에 비친 정원을 본 피냐타의 가슴은 얼어붙는 듯했다. 그곳은 추기경 비서를 지낼 무렵 일 때문에 오곤 했지만, 그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지던 다름 아닌 이단재판소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하 감옥 속으로 그를 발로 차 던져버렸다. 취조하지도 않은 채……. 얼굴을 내보이는 인간이라고는 죄수를 마치 짐승 대하듯 난폭하게 다루는 간수밖에 없었으나, 그는 간수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피냐타는 창틈으로 새어드는 실낱같은 빛을 바라보며 하루가 저물 때마다 감옥 벽에 석회 조각으로 표시를 해나갔다.

그가 불려나간 것은 꼭 한 달이 지나서였다. 덩그러니 넓은 방에는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 수도사들이 벽을 뒤로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제 취조가 시작되었다. 심문은 참으로 교묘했다. 그래도 그는 책잡히지 않도록 바짝 긴장하여 끝까지 발뺌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부터는 고문이 시작되었다. 최조 때는 혼자였으나, 고문을 당할 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다. 헌 서럼아 한 사람이 고문당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지켜보아야 했다. 그제야 가브리엘레 백작의 만찬 모임 구성원 가운데 올리버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 전부가 붙잡혀 온 것을 알게 되었다. 피냐타는 겨우 한 달 전만 해도 생기에 찬 지적 대화를 즐기던 사람들이 지금 와서는 육체보다도 정신적인 타격이 더욱 커, 고문이 필요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초췌해진 것을 암담한 기분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단재판소에서 살아 나간 사람은 없다는 소문을 떠올리고는 공포감에 빠져들었다. 이단재판소는 죄가 재판되는 곳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곳이었다.

심문과 고문이 되풀이되는 것도 겨우 끝나고 이제 판결만 남았으나 그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 동안 그는 감방이 바뀌어 지하에서 같은 건물의 3층으로 이감되었다. 그곳은 내부 정원을 향해 철책이 쳐 있으나, 작으나마 창이 나 있어 바깥 공기를 충분히 들이마실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저녁 미사에 나가는 것도 허락되어 미사 때면 다른 죄수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독방 신세로서는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다. 이단재판소의 수도사들은 친절한 면도 있었다. 한 주에 한 번 죄수들과 대화할 때, 그들은 언제나 희망을 갖도록 다독거려주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절망스러운 말을 하기도 했다. 감방에 갇힌 사람들은 이런 말에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안절부절못하며 보내야 했다.

피냐타가 초연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희망은 희망대로 남겨두면서 혹시 그것이 실현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여 탈옥할 의지를 굳히고 있었다. 고문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회복되자 좁은 감방 속에서도 근육 단련을 잊지 않았고, 미사에 나갈 때도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탓에 머리가 둔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식사용 조그만 탁자 위에 석회 조각으로 쳄발로 건반을 그린 다음, 알고 있는 곡이란 곡은 몽땅 쳐보곤 했다. 글을 읽거나 쓰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사가 있던 어느 날, 수리하던 목수가 흘리고 간 듯한 못 하나가 우연히 눈에 띄어 그는 그것을 몰래 주워 숨겨놓았다. 또한 판결이 내려진 죄인들은 소일거리로 짚 세공품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 순회수도사에게 자기도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미결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며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다. 그럼 하다못해 목탄과 종이라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순회수도사는 울고불고하거나 아니면 협박하는 다른 죄수들에 비해 언제나 평정을 잃지 않는 피냐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지, 그건 규칙 위반이라고 말했지만 그 다음 주에는 물품들을 마련해주었다. 피냐타는 그것을 가지고 미사 때마다 보아온 바사리의 <성모자상>을 생각해내어 본떠 그렸다. 선과 농담만을 구사한 데생이었는데도 순회수도사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나 보다. 수도사는 이 데생을 짚 세공으로 재현하여 수녀원에 기증하겠다는 피냐타의 의향을 받아들였고, 본인도 힘써보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원하는 양만큼의 짚과 실, 바늘 그리고 가위와 풀을 받게 된 것은 그로부터 2개월이 흘러서였다. 짚 세공에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유모가 하던 것을 보아온 덕분에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이제 그 데생을 보아가면서 작업을 시작하면 되었다.

형태가 대충 잡혀갈 무렵, 피냐타는 흰색을 포함해 여러 색 물감을 청했다. 순회할 때마다 형태가 점점 정교해져가는 것을 보고 감탄하던 수도사는 싫은 내색도 없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가 원하는 물건 가운데 흰색 물감과 실이 필요 이상으로 많았지만, 수도사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데생용 목탄을 깎을 손칼이 필요하다는 피냐타의 요구를 들어주기까지 했다. 손칼도 가위도 무슨 일을 저지르기에는 너무 작은 것이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색깔을 입히는 작업도 끝나고 원화보다는 작았지만 수녀들이 매우 기뻐할 만큼 잘된 짚 세공품이 완성되었다. 18개월이 흘러서였다.

또 식사 때마다 나오는 작은 사기 병에 든 샐러드용 식초를 의심 받지 않을 만큼 모으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커다란 물항아리를 채울 정도가 되었다. 다행히 감방 청소는 죄수 스스로 직접 해야 한다는 게 규칙이었다. 작품이 완성된 뒤에도 그는 담뱃값이나 자잘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쉬지 않았다. 손칼과 가위를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기다리던 판결이 내려진 것은 체포당한 날로부터 3년이 지나서였다. 더욱이 전 교황이 죽고 새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즉위했으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은사(恩赦)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헛일이었다. 가브리엘레 일당이라고 분류된 사람들 모두에게 종신형이 내려진 것이다. 단지 백작만은 출감되어 어느 귀족 집에 보호인지 감시인지로 맡겨졌으나 그는 그 상태로는 안심할 수 없었던지 그곳을 탈출하여 베네치아로 망명했다. 피냐타는 그 소문을 한참이 지나서야 들었다.

피냐타가 판결에 좌절하여 다른 동료들과 함께 절망에 빠졌던 것도 이틀뿐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는 순회하러 온 수도사에게 오랫동안 앓고 있던 척추병이 고문과 감옥 생활 탓으로 도진 것 같다며 의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의사 앞에서 아픈 척하기는 간단했다. 의사는 마을 어디서나 흔히 구할 수 있는 철심이 든 코르셋을 구해주었다.

미사에 가던 피냐타는 또 우연히 건물 수리 공사장 하나를 목격했다. 이 건물의 바깥벽 두께는 2미터도 훨씬 넘었다. 그러나 방 천장이 활 모양이어서, 그 가운데 가장 움푹한 부분을 파내면 80센티미터도 못 미쳐 그 윗방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가 갇혀 있는 층은 모두 안쪽으로 창이 나 있지만, 그 위층에 있는 수도사들의 방은 철책 없는 창이 바깥쪽으로 나 있다는 것을 짚 세공일 덕택에 친해진 수도사로부터 들어두었다.

그렇지만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피냐타의 방은 모퉁이에 있었기에 양 옆에 있는 독방까지는 비교적 거리가 있었고, 두꺼운 벽이니 소리가 샐 염려 또한 적었다. 그러나 그 위층은 달랐다. 피냐타는 윗방에 사는 수도사가 예수회 고위층이라 간부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월요일과 수요일, 목요일 밤에 방을 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 했다.

피냐타는 2개월에 걸쳐 통계를 작성했다. 그리하여 이 건물 안에서 열리는 월요일 회의와 교황 앞에서 열리는 목요일 회의 때는 수도사가 한밤이 되기 전에 돌아오지만, 로마 시내의 예수회 본부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는 수요일은 언제나 자정이 지나서야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낮에 작업한다는 것은 그가 언제 감옥에 돌아올지 모르니 위험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침대와 책상과 의자를 겹쳐 세우고 그 위로 올라서면 보아둔 천장의 그 지점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다. 가위와 손칼, 그리고 못은 회찰한 벽을 긁어 깎는 도구로 바뀐다. 첫 벽돌을 빼기는 힘들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생각보다 쉬웠다. 특히 벽돌과 벽돌 사이를 굳히는 역할을 하는 석회층에 식초를 발라두면 다음 작업 때에는 그것을 깎아 빼기도 쉬울 뿐 아니라, 긁어낼 때 나는 소리도 작아진다. 벽돌을 뺄 때는 코르셋에서 빼낸 철삿줄을 썼다. 예정된 작업이 끝나면 틈이 난 구멍에 데생용 종이를 발라 그 끝을 흰색 물감으로 칠해두면 표가 나지 않았다. 빼낸 벽돌은 화장실에 갈 때 몰래 숨겨가서 그 속에 버렸다. 작업을 시작한 지 1년 후, 그는 바짝 야위었지만 잔뜩 움츠리면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을 윗방으로 트기까지 이제 벽돌 한 장만을 남기게 되었다.

피냐타는 수요일 저녁을 기다렸다. 그날은 낮부터 남요를 찢어 밧줄을 만들었다. 적어도 25미터는 필요했다. 이제 마지막 순회가 끝나자마자 그는 담요를 두루마기처럼 마름질했다. 탈옥 후 양치기로 변장하기 위해서다. 또 수건 두 장을 겹쳐 꿰매어 주머니도 만들었다. 그 속에는 손칼, 가위, 철심을 넣었다. 남은 일은 이제 마지막 벽돌 한 장을 빼내는 것뿐이다.

구멍이 뚫리자 피냐타는 우선 필요한 물건을 위로 올려둔 다음, 벽돌 모서리를 잡고 위로 기어올라갔다. 거친 벽돌 표면에 몸이 스쳐 쓰라렸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곧장 창문으로 달려가 창틀에 밧줄을 맨 다음, 그것을 타고 드디어 땅 위에 내려섰다.

주위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밖에서 지내기 좋아하는 로마 토박이들도 허구한 날 신음밖에 들리지 않는 이단재판소 근처를 지나가는 게 퍽이나 싫었을 것이다. 피냐타는 계획대로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날이 샐 때까지는 성벽 가까운 야채밭에 숨어 있고, 성문이 열리면 근교의 농민들 무리 틈에 숨어 도망할 작정이었다. 로마 성문은 어느 곳이나 페스트라도 유행하면 모를까 감시가 결코 허술하지 않다는 것은 로마 토박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피냐타가 비로서 베개를 높이하여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나 가까스로 베네치아 땅을 밟은 날 밤이었다.

지금도 베네치아 고문서관에 남아 있는 보고서 가운데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로마에 풀어둔 첩자가 보내온 이런 글이 남아 있다. 1693년 11월 11일자다.

“어제 예의 가브리엘레 일당으로 옥중에 있던 주세페 피냐타가 이단재판소 탈출에 성공, 오늘 아침 로마는 온통 이 소문으로 떠들썩하다. 일당 중 두 사람은 이미 옥에서 광사(狂死). 탈출에 성공한 마흔네 살의 이 사나이는 더할 나위 없는 모범수였다고…….”

2009/09/13 19:41 2009/09/1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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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베켓(1906~1989)


부조리(不條理)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이 단어를 자주 사회의 어떤 구조적 모순, 특히 사회의 불평등성이나 비도덕성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인간 사회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다는 우리의 통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실의 증거들이 바로 우리가 ‘부조리의 파편’이라 여기는 것들이다.

흔히 사람은 법과 질서를 준수하고 자기 양심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도록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하며, 게으름보다는 부지런함이 바람직하고, 막대한 부(富)보다는 훌륭한 인품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줄곧 제기되었으나, 여기에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의문 한 가지가 늘 따라붙었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느냐?”이다.

여기에도 물론 많은 답변들이 나왔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회가 사람들의 선의와 선행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줄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피력했고, 어떤 사람은 개인의 행위가 신이나 역사에 의해 심판 될 것이라는 숭고한 종교적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의 가치 판단이 결국 ‘자기만족’에 달렸음을 넌지시 내비치기도 했다.

묻건대, 사회의 부조리를 외치는 사람들은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것은 하나의 신념이다. 현실 사회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모범적인 삶의 방식, 인생의 목적 같은 것을 제시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도덕책을 통해 습득하게 된 ‘상식’이 현실 사회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회가 ‘부조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가 도덕책이 그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부정의’하기 때문일 뿐이다.

‘부조리’란 본래 배리(背理)의 동의어로, 논리적으로 이치(理致)에 맞지 않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사실 부조리란 단어는 우리의 신념에 비추어 어그러진 사회의 모습에 던지는 푸념의 용어로 사용될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물음, 즉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단어인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카뮈, 새뮤얼 베켓은 부조리 문학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삶의 부조리한 속성은 보통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이나 무력함,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불가능성 등으로 이해된다. 소설 속의 상황들은 근본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난제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질문은 어떤 논리적인 해법을 완벽하게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카프카의 ‘변신’ 속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레고르가 ‘벌레’에서 다시 ‘사람’으로 변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혹은 측량사 자격으로 마을을 찾아온 K가 성에 들어가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살인죄를 저지르고 법정에 선 뫼르소에게는 대체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법인 것일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고도’는 ‘해답’인가?

얼마 전 우연히 ‘세비지스 The Savages’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 주인공 웬디는 39살 극작가다. 남편은 없고, 애인은 늙은 유부남. 변변한 성공작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어느 날 갑자기 20년 전 사랑하는 여자를 좇아 자식들과 인연을 끊고 사라졌던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입원중이라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 병간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힘겨운 상황 속에서, 8번째 응모한 구겐하임 장학 재단으로부터는 또다시 탈락 소식이 날아든다.

보통 헐리우드 영화에는 명확한 문제제기와 그에 따른 해법이 존재한다.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도망치는 처지라면 그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해법이다. 세상이 위기에 빠졌다면 그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하면 되고, 짝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한다면 사랑을 이루는 것이 분명한 문제의 해법이다.

영화 ‘세비지스’에는 누구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그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사랑을 좇아 자식들까지 내버리고 떠나간 아버지이건만, 결국 치매 노인이 되어 자신이 버린 자식들의 간병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웬디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대체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버지의 회복 혹은 임종, 불륜 관계의 청산, 극작가로서의 출세, 안정적 가정의 구축 같은 것들이 ‘인생’의 해법들일까?

문제의 핵심은 ‘life goes on’, 즉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동화 속 주인공의 삶은 왕자와의 행복한 결혼식 장면에서 끝나지만, 인간의 인생은 책이 덮인 다음에도 이어진다. 인간은 ‘실존’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시시포스는 영원토록 비탈길에서 바위를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가 굴리는 바위는 영원히 정상에 안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는 행위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가? 그것은 바위를 비탈의 정상에 올려놓는 불가능한 임무의 완수인가? 혹은 바위를 굴리는 그 자체인가?

새뮤얼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마치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는 것처럼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무대는 장소를 특정할 수 없는 어느 시골길을 배경으로 한다. 이 두 부랑자는 ‘고도’를 기다리며 부질없는 대화를 나누고,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한다. ‘고도’는 이 둘에게 어쩌면 절대적 구원이요,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정작 두 사람은 고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그를 만나면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 한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도’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이 의미 없어 보이는 삶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도는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나무를 보며 목을 메달 생각을 한다. 만일 이들이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극한의 좌절 혹은 분노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수긍이며, ‘바위를 미는 행위의 중지’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감정이 부추긴 죽음’이 아니라, ‘정신이 선택한 죽음’인 것이다.

부조리 문학은 확실히 읽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며, 우리의 실존의 근거를 뒤흔듦으로 하여 존재의 불안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부조리 문학의 배경에도 ‘논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부조리 문학의 토대는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 혹은 ‘실존이 곧 본질이다.’를 뒤집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주장, 그 뿐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란 주장은, 인간의 존재가 엄연한 사실인데 비하여 그 존재의 목적은 특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우린 이 세상에 목적 없이 태어났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주장은 전혀 우리들, 그러니까 동양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서양인들에게는 커다란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것이 서구인들이 목적론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서양 철학자들이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인과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론적인 것이다. 인과론적인 견해는 오늘날 자연과학자들의 견해와 비슷하다. 즉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인과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의 보편화로,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반면 목적론적인 견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이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현상의 ‘목적’이 바로 실존과 본질 중 ‘본질’에 해당한다. 눈(目)의 본질은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은 ‘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날개의 본질은 비행(飛行)이다. 그러므로 날개는 ‘날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고 어쩌면 매우 비과학적인 얘기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 최고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목적론적인 사고가 서구 문명을 지배했다. 중세 1천 년간, 유럽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삶의 본질은 전능한 신에 의해서 디자인 되어, 그 완벽한 계획 위에 인간의 실존이 주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근대 유럽인들이 느낀 존재의 불안은, 중세 1천 년간 이어졌던 강한 종교적 확신의 증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의 문제 제기는, ‘실존’과 ‘본질’ 혹은 ‘존재’와 ‘목적’이 엄연히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동양의 고전 철학에서는 애당초 ‘목적인’이 되는 초월자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았다. 목적이 존재를 유발한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실존’과 ‘본질’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일도 없다. 어쩌면 부조리 문학이 많은 아시아권 독자들에게 ‘갑갑한 현실’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못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2009/09/11 05:39 2009/09/11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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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게임 데이터를 에디트하기 위해 ‘울트라 에디터’라는 프로그램으로 세이브 파일을 열어젖혔을 때, 난생 처음 세상에 ‘16진법’이라는 기수법 체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까지 나는 10진법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나머지, 십진법 자체를 수의 체계로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수를 표기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물론 수의 개념도 제대로 몰랐던 아주 어렸을 적, 종이 위에 어떤 수의 크기만큼 일일이 사물을 하나씩 그려 넣었던 것이 인류 최초의 기수법인 ‘1진법’ 표기였다는 것은 당연히 알 지 못 했고 말이다.

16진법의 존재는 내게 하나의 충격이자 공포였다. 나는 현재 전 세계의 인류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10진법 체계가, ‘수(數)’라고 하는 개념에 내재된 자연스러운 속성이어서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원리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설령 우주 저 멀리에 인류와 전혀 다른 외계 문명이 존재하더라도 반드시 10진법 체계는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또 다른 기수법의 존재는 사실상 10진법 체계가 수의 원리에 부합하는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기수법 체계라는 믿음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정녕 10진법은, 인간의 손가락이 10개라는 생태적 특성에서 기인한, 철저한 우연의 산물(물론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역시 필연의 산물이지만)이란 말인가!

1974년 미지의 외계 문명을 향해 발송된 지구인들의 메시지인 아레시보 메시지는 2진수로 작성되었다. 숫자가 우주 공통의 언어임에는 틀림없지만, 기수법 체계는 다를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정말 외계인들의 손가락이 6개이거나 14개라면, 6진법이나 14진법을 사용할까?

참고로 16진법은 16을 밑으로 하여 숫자를 표기하는 기수법을 말한다. 1진법에서는 모든 숫자를 그 수의 크기와 동일한 개수의 어떤 기호로 표시한다. 즉 10진법상 12라는 숫자를 1진법으로 표현하면, 동그라미 열두 개가 된다. 설령 동그라미 대신 ‘0’이나 ‘1’같은 숫자를 쓰더라도, 1진법 상에서는 ‘자릿수’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령 1진법 상의 수 111111을 놓고 보면, 첫째자리 1이나 끝자리 1이나 같은 1이다.

2진법 이상의 기수체계가 되면, 숫자의 위치가 중요해진다. 그래서 이러한 표기법을 ‘위치 기수법’이라고도 한다. 10진법 체계에는 0부터 9까지 총 10개의 기호가 존재하며, 단지 이 10개의 기호로 모든 자연수를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10진법은, 한 자리에 0부터 9까지 표기할 수 있으며 셈이 ‘열’에 이르면, 1의 자리를 비워주고, 대신 10의 자리를 마련하여 숫자를 표기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셈에서 열을 하나의 단위, 혹은 완결로 보는 것이다.

16진법은 16을 밑으로 한다. 이 말은 한 자리에 0부터 15까지 열여섯 개의 숫자 표시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셈이 16에 이르면, 10진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릿수 하나를 늘린다. 단 이때 새로 생긴 자리는 ‘10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16을 위한 자리’다. 따라서 16진법 상에서 ‘10’은, 10진법 상에서 ‘16’을 의미한다.

16진법으로 수를 표기하기 위해서는, 10진법보다 많은 기호가 필요하다. 열다섯까지는 한 자리에 표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16진수를 표기할 때에는, 0부터 9외에 알파벳 A부터 F를 함께 사용한다.

10진법의 수 : 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진법의 수 : 0 1 2 3 4 5 6 7 8 9 A B C D E F

사실 수의 표기는 ‘약속’에 불과하니까, 어떤 기호를 쓰든 무방하다. 이 경우에는 10진법상의 수 1부터 9를 빌려와 표기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 ‘십’이니 ‘십일’이니 혹은 ‘이십 사’니 하는 자연어 표현도 역시 16진수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장애 요인이 된다. 16진수에 완전히 적응하려면 ‘십육’ 혹은 ‘열여섯’ 대신 다른 명칭이 필요할 것이다.

16진수를 10진수로 바꾸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C236이라는 16진수를 10진수로 바꾸려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낮은 자리부터 높은 자리의 수를 표기한다는 약속은 동일하다. 6은 10진법에서와 마찬가지로 ‘1의 자리’의 숫자다. 3은 ‘16의 자리’에 있다. 2는 16의 제곱, C는 16의 세제곱 자리에 표기되어 있다.

C236을 10진법의 수로 변환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과정이 필요하다

C x 16^3 + 2 x 16^2 + 3 x 16^1 + 6 x 16^0

여기서 C는 16진법 체계에서만 존재하는 기호이다. 10진법 수로 변환하는 과정에 있으니까, C를 10진법 상의 수인 ‘12’로 대체하자.

C x 16^3 = 12 x 16^3 = 49152

나머지 숫자를 더해주면 16진수 C236은 10진수 49718이 된다.

숫자를 10진법으로 표기하든 16진법으로 표기하든, 수의 속성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소수’나 ‘완전수’ 같이 특정한 수의 특수한 성격도 그대로 유지되고, ‘우애수’ 같은 수 사이의 관계도 변하지 않는다. 10진법과 16진법은 단지 같은 수를 표기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숫자의 크기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것은 그저 적응의 문제일까? 만일 우리의 손가락이 16개였다면, 16진법을 오늘날 10진법 사용하듯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인류 역사상 10진법이 실제로 사용된 유일한 기수법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수메르인들은 60진법 체계를 고안 해 냈다. 10세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이는 마야 문명은 20진법을 사용했는데, 매우 정밀한 역법을 개발 해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날 일상생활에서도 10진법 외의 기수법이 쓰이고 있다. 바로 60초를 1분, 60분을 1시간으로 규정하고 있는 시간이다. 물론 완전히 10진법 상의 숫자들만을 가지고 표기하기 때문에 다소 헷갈리는 면은 있다. 사람들은 종종 120분을 1시간 20분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시간 계산에서 60진법을 처음 사용한 것은 바빌로니아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중국 문명에서도 60간지를 이용하여 날짜 계산을 한 것은 보면, 이 60진법 체계의 발달에도 어떤 필연성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시간의 표기가 60진법인 까닭에 초등학생 때 따로 시간 계산법을 배워야 할 정도로 시간 계산은 까다로워졌다. 언젠가 일본에서 연예인들이 나와 퀴즈를 푸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몇몇 바보 연예인들은 분을 시간으로 환산하는 간단한 문제를 풀지 못 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이러한 병폐를 고치고 또 사람들을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해 100초를 1분으로, 100분을 1시간으로 하는 새로운 시간 체계를 도입했으나, 이때에는 사람들의 습관이 승리했다.

또 하나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바로 ‘2진법’이다. 사실 2진법은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가 흔히 ‘아날로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디지털’은 본래 어떤 모호한 중간 값을 표기하지 않고 데이터를 단위 별로 끊어서 ‘숫자’로 표현하는 것을 일컫는데, 이 디지털의 기저를 이루는 것이 ‘2진법’이다. 2진법이 유용한 이유는 신호의 ‘있음’과 ‘없음’만으로 모든 수의 표현이 가능해, 이 단순한 수단만으로도 무한한 데이터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기계 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이 2진수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2진법과 16진법의 관계이다. 내가 울트라 에디터로 세이브 데이터를 열어 젖혔을 때 마주한 것은 2진수가 아닌 16진수였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2진수와 16진수 사이의 관계를 알면 의문은 쉽게 풀린다.

자연수 중에서 네 자리로 표기 가능한 2진수를 모두 생각해 보자. 몇 개나 있을까? 0001, 0010, 0011 ... 1110, 1111 등 모두 15개다. 이는 10진법 상의 자연수 1에서 15까지에 해당한다. 10진수 1에서 15라니, 왠지 친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이는 16진수 1부터 F까지로 간단히 나타낼 수 있다. 즉 무려 네 자리로 이루어진 복잡한 2진수를, 16진수로 바꾸어 표현하면 달랑 한 자리 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0001 = 1

0101 = 5

1000 = 8

1110 = E

1111 = F

2진수가 신호의 ‘있음’과 ‘없음’으로 디지털 신호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얘기 했다. 컴퓨터에서 이렇게 ‘있음’ ‘없음’의 단 두 가지를 표현할 수 있는 최소의 단위를 ‘비트bit’라고 한다. 그리고 ‘있음’과 ‘없음’은 간단히 1과 0으로 쓴다.

1과 0 단 두 개의 신호를 표현할 수 있는 1비트를 8개 모은 것이 1바이트byte이다. 따라서 1바이트는 무려 8자리로 된 2진수로 표현된다. 8자리로 된 2진수는 대체 몇 개나 있을까? 이것을 일일이 화면상에다 표시하는 것도 일이다.

하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이런 복잡한 2진수를 16진수로 바꾸어 매우 간결하게 표기할 수 있다. 네 자리로 된 2진수를 모두 표기하는 데, 16진수는 겨우 한 자리를 필요로 했다. 이제 2진수의 자리가 네 자리에서 여덟 자리로 늘어났다. 모든 숫자를 표기하기 위해서는 몇 자리의 16진수가 필요할까? 답은 단 두 자리이다.

여덟 자리로 된 2진수를 네 자리 씩 둘로 끊어서 보면 이해하기 쉽다. 가령 8자리로 된 2진수 중 가장 큰 수인 11111111은 1111,1111로 끊어서 표기할 수 있다. 이를 16진수로 바꾸면 F,F가 된다. 이렇게 1바이트는 16진수 단 두 자리로 표현할 수 있다. 왜 그 옛날 게임 캐릭터들의 한계 능력치가 255였는가 하는 의문이 풀린다. 10진수 255는 16진수 FF에 해당한다. 캐릭터의 능력치에 할당된 공간이 1바이트였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생활 속에는 이미 여러 가지 기수법들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우리가 종종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의심조차 품지 않는 세상의 겉모습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어떤 절대성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여지없이 부수어버리는 낯선 진실들이 가득하다.

정녕 10진법 체계는 수 개념의 내적 속성과는 아무 관련도 없고, 결코 절대적이거나 유일무이한 수 체계도 아닌 것이다. 눈앞에서 10진수가 해체되었다가 16진수로 재구성되는 순간, 나는 숫자 앞에서 완전한 무지자가 되었으며, 머릿속에서는 숫자의 모든 개념이 백지화된 것과 같은 공황 상태가 일어났다. 이는 실로 생활에 필요한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수를 정복한 것처럼 여기던 그 오만함에 경종을 울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우주적 차원에서 수의 질서는 정말 절대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낮은 차원에서 그 절대성을 구하고자 했던가? 단지 우주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수를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위해서 고안한 표기법, 고작 그 표기법의 장난질에도 내가 믿었던 질서는 붕괴되고 혼돈에 휩싸이고 말았으니!

다른 기수법을 통해 바라본 수의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수의 본질은 전혀 변화하지 않지만, 우리 인식 구조에는 완전히 낯선 세계가 표상한다. 이것은 비단 수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전혀 다른 기준에 의해 정렬된 세계에서는 우리의 상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수 있다. 익숙한 세계는 모습을 바꾸고, 절대적이라 신봉했던 질서는 한 순간에 붕괴되어 우리를 가치의 혼돈 속으로 내몬다.

10진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16진법의 수 체계는 잘 이해되지 않고, 낯설며, 심지어 공포를 유발하기도 한다. 공포는 혐오를 낳고, 혐오는 언제나 인간들의 분노를 이끌어 낸다. 아마 지구상에 열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소수의 인종이 존재했다면, 그들은 손가락이 열 개인 다수의 인간들로부터 10진법의 사용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사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오늘날에도 살짝 다른 모습으로 수없이 자행되고 있지만.

미약한 인간은 우주적 차원에 서서 모든 자연의 질서를 파악할 수 없다.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만 해도 한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지평의 범위를 훨씬 초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국소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기준들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거나 이해할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 기준이 절대적이며 유일무이한 가치라는 판단을 섣불리 내려서는 안 된다. 이런 태도는 종종 10진법에 타 기수법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초래한다. 그리고 자신이 신봉하는 그 절대성이 붕괴되었을 때, 인간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손가락이 열 개인 우리는 10진법만 잘 알고 활용하면 된다. 그러나 2진법이나 16진법, 그 외에 5진법이나 8진법, 12진법, 60진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다양할수록 좋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저 재미를 위해서도 말이다.

2009/07/26 08:13 2009/07/26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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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여호와께서 내게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말씀하시기를 아모스야 무엇이 보이느냐 하니, 내가 아뢰기를 여름 과일 한 광주리가 보입니다, 하고 답하였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른 즉, 내가 다시는 저들을 용서치 아니하리니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통곡으로 변할 것이며, 죽은 자가 넘쳐나 사람의 시체가 곳곳에 내버려지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말하기를 “언제 월삭이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 수 있을까.” 하며 “언제 안식일이 지나서 우리가 밀을 시장에 낼 수 있을까.” 한다. 에바(되)는 작게 하고 세겔(추)은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궁핍한 자를 종 삼으며 쌀겨까지 팔고자 하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기를,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이로 인하여 어찌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이로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범람같이 솟아오르며 나일의 강과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케 하며 모든 사람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두 머리를 밀고서 외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게 하여 그 마지막이 이처럼 비참한 날로 끝맺게 하리라.

아모스서 8:1~8:10

과학 지식의 발달과 대중화는, 사람들을 자연 현상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식을 보고도 그것을 더 이상 재앙에 대한 징조나 신의 징벌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 때문일까, 달그림자에 태양이 삼켜져 공기가 싸늘해지고 백주의 대낮이 어두워질 때, 하늘의 눈이 가려진 틈을 타 버젓이 죄를 일삼고 전혀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정녕 그들은 하늘에 죄를 얻지만, 용서를 구할 마음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나 궁핍한 자를 삼키고 가난한 자를 멸케 하려는 자, 저울을 속이고 푼돈으로 사람들을 종 삼으려는 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하늘의 눈인지를. 태양이 언제고 여호와와 제우스의 뜻으로 가려진 적이 있었던가? 일식을, 크세르크세스의 정신 나간 원정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 만든 것은 정녕 누구였던가?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 속에 있는 푼돈을 응시할 때에, 마치 먼 듯 감긴 듯한 민중의 눈은 가만히 그들의 죄를 응시하고 있다. 예언은 사람들의 절망 속에서 태어나, 전염병처럼 번지는 분노를 타고 퍼진다.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힘은, 언제나 그 예언을 성취시켜왔다. 그 때에 이르러 하늘에 죄를 지은 자, 정녕 용서를 구할 데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2009/07/23 03:18 2009/07/23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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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모래 속에서 하나의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하나의 천국을 보며,

손바닥 위에 무한을 싣고서,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느낀다.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中]


원어시 전문



사담

2009/07/16 22:31 2009/07/16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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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대답은 “예스!”

사강을 좋아하세요?

대답은 “글쎄?”

시몽은 매우 잘생겼지만, 자신의 잘생긴 외모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나는 잘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외모가 출중하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다만 이것 하나는 상상이 간다. 그런 캐릭터가 범인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인가 하는 점 말이다.

시몽은 14살 연상의 여인 폴에게 반한다. 소설의 제목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인 것, 그리고 시몽과 폴의 나이 차이가 14살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브람스가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았던 클라라 슈만은, 브람스보다 꼭 14살 나이가 많았다.

스스로 인생에서 해 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하는 이 무기력하고 허무적인 청년이, 폴과 만난 이후로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의미이며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그녀와의 사랑에 매달린다. 이 맹목적인 청년이 운운하는 ‘행복’이란 것에, 나는 반하지 않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이지만, 시몽이라는 캐릭터에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폴에 대해서는 거의 절망적인 답답함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지 못 하며, 앞으로도 영영 브람스를 사랑할 기회를 상실 해 버렸다. 그건 그녀가 39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늙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되고 싶지 않은, 그렇기 때문에 가장 두려운 ‘늙은’ 모습이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메마른 건초 밭으로 달려드는 불 수레바퀴의 경고장. 오감으로 전해지는 감각은 짜릿짜릿하고 감정은 폭발한다.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난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사형’도 아니고 ‘고독 형’도 아니다. 다만 재가 남을 뿐…….

소설 속에서 시몽과 폴이 함께 들으러 간 ‘브람스’는,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이 곡은 브람스가 생애동안 단 한 곡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힘차고 아름다워 수많은 거장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떠들기 좋아하는 대중들의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호들갑스러운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곡의 가장 유명한 3악장을 올려본다. 언젠가 There will be blood란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유전에서 기름이 터져 나오는 순간 이 3악장이 배경 음악으로 쓰였다. 영화의 시종 암울했던 분위기 속에서 이 음악이 마치 태양의 반짝이는 빛처럼 느껴졌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연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셰링.

2009/06/21 20:35 2009/06/21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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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신이니, 신은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우주이니, 신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거대한 것은 공간이니,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것은 지성이니, 모든 것을 관통하여 내달리기 때문이다.
가장 강한 것은 필연이니,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가장 현명한 것은 시간이니, 모든 것을 결국 명백하게 밝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곤란한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요,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것이다.”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가 쓴 그리스 철학자 열전의 첫 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탈레스. 그는 인류사상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곤 한다. 러셀의 서양 철학사를 펼쳐보아도 탈레스의 이름을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다.

탈레스는, 잘 알다시피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탈레스의 이 명제는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진짜 의미와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탈레스는, 이를테면 몇몇 특수한 상황에서 적용되는 법칙을,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일반 상황에 폭넓게 적용 시키는 ‘일반화’를 처음 시도한 사람이다.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생각도 그저 공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태양이 물을 증발시키고, 바다의 표면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구름이 비가 되어 떨어지는 자연 현상을 면밀히 관찰한 후에 도달한 결론이었을 것이다.

탈레스의 생몰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고, 그의 업적에 대해서도 후대의 기록이 너무 분분하여서 대체 뭐가 진짜 그의 행적이고 말인지 불분명하다(위의 인용을 포함하여). 다만 탈레스가 일식을 예언했다고 하는 사실은 유명한 전승으로, 후대의 학자들은 탈레스가 예언했다는 이 일식의 시기를 측정하여(기원전 585년이라고 한다) 그의 활동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2009/06/16 15:09 2009/06/1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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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調歌頭

                        蘇 軾

明月幾時有
밝은 달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把酒問靑天
술잔을 들어 하늘에 묻지만,
不知天上宮闕
천상의 궁궐에선 모를 것이다,
今夕是何年
오늘이 무슨 해인지를

我欲乘風歸去
바람을 타고 돌아갈까 싶어도,
又恐瓊樓玉宇
옥으로 지은 저 궁궐,
高處不勝寒
높은 곳에 있어 추울까 두려워,
起舞弄淸影
춤추고 그림자와 노닐 수 있어도,
何似在人間
어찌 인간 세계에 있음만 할까

轉朱閣低綺戶
붉은 기둥 돌아, 비단 창가에 스미어,
照無眠
달빛은 잠 못 드는 이를 비추네
不應有恨
한스런 일은 없을진대,
何事長向別時圓
어찌하여 헤어질 때 달은 더 둥근가

人有悲歡離合
사람에게 슬픔과 기쁨이 있고, 헤어짐과 만남이 있는 것은,
月有陰晴圓缺
달에 어두움과 밝음이 있고, 차고 기우는 것이 있는 것 같아서
此事古難全
예부터 어찌해 볼 수 없는 일이지만,
但願人長久
단지 바라네, 그대와 나 오래도록,
千里共嬋娟
멀리 떨어져서도 같은 달을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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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4 05:00 2009/06/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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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문 전문

2009/05/29 03:36 2009/05/29 0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