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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군 입대를 앞두고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운운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들려주었던 이야기. 이제는 나를 위해 되새겨야 할 때인 것 같다.



시오노 나나미 <침묵하는 소수 中 "어느 모범수의 탈옥기" 전문>

17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로마에 주세페 피냐타라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직업은 추기경 비서였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는 거주하고 있는 추기경 수도 많으니, 이런 사람들을 보좌해주는 비서직은 당시 가진 재산이 별로 없는 지식인으로서는 귀족 집안의 가정교사와 더불어 일반적인 직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피냐타는 이제 비서가 아니다. 20대부터 모시던 추기경이 죽은 것이다. 게다가 죽을 때 그가 남겨준 연금은 검소하게 생활하면 일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한 정도였으니, 새 주인을 찾아나설 필요도 없었다. 지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유복한 가브리엘레 백작이 청하는 대로 그 집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것이 지금 그에게는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혈육이라고는 이전의 그와 같은 직업을 택한 아우 한 사람이 독일에 있을 뿐이다.

백작의 만찬 모임에서는 철학이나 역사, 과학이 주된 화제였다. 종교에 관해서는 이 집안의 전속 참회 청문수도사인 올리버가 말을 꺼내지 않는 한, 누구도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반동종교개혁의 폭풍은 한 세기 전만 해도 자유로운 르네상스를 누리고 있던 이곳 로마조차도 숨막힐 듯한 세계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피냐타가 체포당한 것은 평온하지만 지적인 자극으로 충만한 생활이 2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백작의 집을 나와 어두운 샛길을 가야 하는 두려움도 잊은 채, 착 가라앉은 여름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느긋한 걸음으로 귀가하고 있을 때였다. 남자들 몇이 그를 뒤에서 덮치더니 머리 위로 망토를 뒤집어 씌워 꼼짝 못하게 하고는 마차에 던져 태웠다. 망토가 벗겨진 것은 마차가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선 후였다. 달빛에 비친 정원을 본 피냐타의 가슴은 얼어붙는 듯했다. 그곳은 추기경 비서를 지낼 무렵 일 때문에 오곤 했지만, 그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지던 다름 아닌 이단재판소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하 감옥 속으로 그를 발로 차 던져버렸다. 취조하지도 않은 채……. 얼굴을 내보이는 인간이라고는 죄수를 마치 짐승 대하듯 난폭하게 다루는 간수밖에 없었으나, 그는 간수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피냐타는 창틈으로 새어드는 실낱같은 빛을 바라보며 하루가 저물 때마다 감옥 벽에 석회 조각으로 표시를 해나갔다.

그가 불려나간 것은 꼭 한 달이 지나서였다. 덩그러니 넓은 방에는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 수도사들이 벽을 뒤로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제 취조가 시작되었다. 심문은 참으로 교묘했다. 그래도 그는 책잡히지 않도록 바짝 긴장하여 끝까지 발뺌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부터는 고문이 시작되었다. 최조 때는 혼자였으나, 고문을 당할 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다. 헌 서럼아 한 사람이 고문당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지켜보아야 했다. 그제야 가브리엘레 백작의 만찬 모임 구성원 가운데 올리버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 전부가 붙잡혀 온 것을 알게 되었다. 피냐타는 겨우 한 달 전만 해도 생기에 찬 지적 대화를 즐기던 사람들이 지금 와서는 육체보다도 정신적인 타격이 더욱 커, 고문이 필요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초췌해진 것을 암담한 기분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단재판소에서 살아 나간 사람은 없다는 소문을 떠올리고는 공포감에 빠져들었다. 이단재판소는 죄가 재판되는 곳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곳이었다.

심문과 고문이 되풀이되는 것도 겨우 끝나고 이제 판결만 남았으나 그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 동안 그는 감방이 바뀌어 지하에서 같은 건물의 3층으로 이감되었다. 그곳은 내부 정원을 향해 철책이 쳐 있으나, 작으나마 창이 나 있어 바깥 공기를 충분히 들이마실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저녁 미사에 나가는 것도 허락되어 미사 때면 다른 죄수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독방 신세로서는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다. 이단재판소의 수도사들은 친절한 면도 있었다. 한 주에 한 번 죄수들과 대화할 때, 그들은 언제나 희망을 갖도록 다독거려주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절망스러운 말을 하기도 했다. 감방에 갇힌 사람들은 이런 말에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안절부절못하며 보내야 했다.

피냐타가 초연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희망은 희망대로 남겨두면서 혹시 그것이 실현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여 탈옥할 의지를 굳히고 있었다. 고문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회복되자 좁은 감방 속에서도 근육 단련을 잊지 않았고, 미사에 나갈 때도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탓에 머리가 둔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식사용 조그만 탁자 위에 석회 조각으로 쳄발로 건반을 그린 다음, 알고 있는 곡이란 곡은 몽땅 쳐보곤 했다. 글을 읽거나 쓰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사가 있던 어느 날, 수리하던 목수가 흘리고 간 듯한 못 하나가 우연히 눈에 띄어 그는 그것을 몰래 주워 숨겨놓았다. 또한 판결이 내려진 죄인들은 소일거리로 짚 세공품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 순회수도사에게 자기도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미결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며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다. 그럼 하다못해 목탄과 종이라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순회수도사는 울고불고하거나 아니면 협박하는 다른 죄수들에 비해 언제나 평정을 잃지 않는 피냐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지, 그건 규칙 위반이라고 말했지만 그 다음 주에는 물품들을 마련해주었다. 피냐타는 그것을 가지고 미사 때마다 보아온 바사리의 <성모자상>을 생각해내어 본떠 그렸다. 선과 농담만을 구사한 데생이었는데도 순회수도사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나 보다. 수도사는 이 데생을 짚 세공으로 재현하여 수녀원에 기증하겠다는 피냐타의 의향을 받아들였고, 본인도 힘써보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원하는 양만큼의 짚과 실, 바늘 그리고 가위와 풀을 받게 된 것은 그로부터 2개월이 흘러서였다. 짚 세공에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유모가 하던 것을 보아온 덕분에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이제 그 데생을 보아가면서 작업을 시작하면 되었다.

형태가 대충 잡혀갈 무렵, 피냐타는 흰색을 포함해 여러 색 물감을 청했다. 순회할 때마다 형태가 점점 정교해져가는 것을 보고 감탄하던 수도사는 싫은 내색도 없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가 원하는 물건 가운데 흰색 물감과 실이 필요 이상으로 많았지만, 수도사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데생용 목탄을 깎을 손칼이 필요하다는 피냐타의 요구를 들어주기까지 했다. 손칼도 가위도 무슨 일을 저지르기에는 너무 작은 것이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색깔을 입히는 작업도 끝나고 원화보다는 작았지만 수녀들이 매우 기뻐할 만큼 잘된 짚 세공품이 완성되었다. 18개월이 흘러서였다.

또 식사 때마다 나오는 작은 사기 병에 든 샐러드용 식초를 의심 받지 않을 만큼 모으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커다란 물항아리를 채울 정도가 되었다. 다행히 감방 청소는 죄수 스스로 직접 해야 한다는 게 규칙이었다. 작품이 완성된 뒤에도 그는 담뱃값이나 자잘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쉬지 않았다. 손칼과 가위를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기다리던 판결이 내려진 것은 체포당한 날로부터 3년이 지나서였다. 더욱이 전 교황이 죽고 새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즉위했으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은사(恩赦)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헛일이었다. 가브리엘레 일당이라고 분류된 사람들 모두에게 종신형이 내려진 것이다. 단지 백작만은 출감되어 어느 귀족 집에 보호인지 감시인지로 맡겨졌으나 그는 그 상태로는 안심할 수 없었던지 그곳을 탈출하여 베네치아로 망명했다. 피냐타는 그 소문을 한참이 지나서야 들었다.

피냐타가 판결에 좌절하여 다른 동료들과 함께 절망에 빠졌던 것도 이틀뿐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는 순회하러 온 수도사에게 오랫동안 앓고 있던 척추병이 고문과 감옥 생활 탓으로 도진 것 같다며 의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의사 앞에서 아픈 척하기는 간단했다. 의사는 마을 어디서나 흔히 구할 수 있는 철심이 든 코르셋을 구해주었다.

미사에 가던 피냐타는 또 우연히 건물 수리 공사장 하나를 목격했다. 이 건물의 바깥벽 두께는 2미터도 훨씬 넘었다. 그러나 방 천장이 활 모양이어서, 그 가운데 가장 움푹한 부분을 파내면 80센티미터도 못 미쳐 그 윗방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가 갇혀 있는 층은 모두 안쪽으로 창이 나 있지만, 그 위층에 있는 수도사들의 방은 철책 없는 창이 바깥쪽으로 나 있다는 것을 짚 세공일 덕택에 친해진 수도사로부터 들어두었다.

그렇지만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피냐타의 방은 모퉁이에 있었기에 양 옆에 있는 독방까지는 비교적 거리가 있었고, 두꺼운 벽이니 소리가 샐 염려 또한 적었다. 그러나 그 위층은 달랐다. 피냐타는 윗방에 사는 수도사가 예수회 고위층이라 간부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월요일과 수요일, 목요일 밤에 방을 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 했다.

피냐타는 2개월에 걸쳐 통계를 작성했다. 그리하여 이 건물 안에서 열리는 월요일 회의와 교황 앞에서 열리는 목요일 회의 때는 수도사가 한밤이 되기 전에 돌아오지만, 로마 시내의 예수회 본부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는 수요일은 언제나 자정이 지나서야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낮에 작업한다는 것은 그가 언제 감옥에 돌아올지 모르니 위험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침대와 책상과 의자를 겹쳐 세우고 그 위로 올라서면 보아둔 천장의 그 지점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다. 가위와 손칼, 그리고 못은 회찰한 벽을 긁어 깎는 도구로 바뀐다. 첫 벽돌을 빼기는 힘들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생각보다 쉬웠다. 특히 벽돌과 벽돌 사이를 굳히는 역할을 하는 석회층에 식초를 발라두면 다음 작업 때에는 그것을 깎아 빼기도 쉬울 뿐 아니라, 긁어낼 때 나는 소리도 작아진다. 벽돌을 뺄 때는 코르셋에서 빼낸 철삿줄을 썼다. 예정된 작업이 끝나면 틈이 난 구멍에 데생용 종이를 발라 그 끝을 흰색 물감으로 칠해두면 표가 나지 않았다. 빼낸 벽돌은 화장실에 갈 때 몰래 숨겨가서 그 속에 버렸다. 작업을 시작한 지 1년 후, 그는 바짝 야위었지만 잔뜩 움츠리면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을 윗방으로 트기까지 이제 벽돌 한 장만을 남기게 되었다.

피냐타는 수요일 저녁을 기다렸다. 그날은 낮부터 남요를 찢어 밧줄을 만들었다. 적어도 25미터는 필요했다. 이제 마지막 순회가 끝나자마자 그는 담요를 두루마기처럼 마름질했다. 탈옥 후 양치기로 변장하기 위해서다. 또 수건 두 장을 겹쳐 꿰매어 주머니도 만들었다. 그 속에는 손칼, 가위, 철심을 넣었다. 남은 일은 이제 마지막 벽돌 한 장을 빼내는 것뿐이다.

구멍이 뚫리자 피냐타는 우선 필요한 물건을 위로 올려둔 다음, 벽돌 모서리를 잡고 위로 기어올라갔다. 거친 벽돌 표면에 몸이 스쳐 쓰라렸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곧장 창문으로 달려가 창틀에 밧줄을 맨 다음, 그것을 타고 드디어 땅 위에 내려섰다.

주위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밖에서 지내기 좋아하는 로마 토박이들도 허구한 날 신음밖에 들리지 않는 이단재판소 근처를 지나가는 게 퍽이나 싫었을 것이다. 피냐타는 계획대로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날이 샐 때까지는 성벽 가까운 야채밭에 숨어 있고, 성문이 열리면 근교의 농민들 무리 틈에 숨어 도망할 작정이었다. 로마 성문은 어느 곳이나 페스트라도 유행하면 모를까 감시가 결코 허술하지 않다는 것은 로마 토박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피냐타가 비로서 베개를 높이하여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나 가까스로 베네치아 땅을 밟은 날 밤이었다.

지금도 베네치아 고문서관에 남아 있는 보고서 가운데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로마에 풀어둔 첩자가 보내온 이런 글이 남아 있다. 1693년 11월 11일자다.

“어제 예의 가브리엘레 일당으로 옥중에 있던 주세페 피냐타가 이단재판소 탈출에 성공, 오늘 아침 로마는 온통 이 소문으로 떠들썩하다. 일당 중 두 사람은 이미 옥에서 광사(狂死). 탈출에 성공한 마흔네 살의 이 사나이는 더할 나위 없는 모범수였다고…….”

2009/09/13 19:41 2009/09/13 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