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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베켓(1906~1989)


부조리(不條理)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이 단어를 자주 사회의 어떤 구조적 모순, 특히 사회의 불평등성이나 비도덕성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인간 사회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다는 우리의 통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실의 증거들이 바로 우리가 ‘부조리의 파편’이라 여기는 것들이다.

흔히 사람은 법과 질서를 준수하고 자기 양심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도록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하며, 게으름보다는 부지런함이 바람직하고, 막대한 부(富)보다는 훌륭한 인품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줄곧 제기되었으나, 여기에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의문 한 가지가 늘 따라붙었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느냐?”이다.

여기에도 물론 많은 답변들이 나왔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회가 사람들의 선의와 선행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줄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피력했고, 어떤 사람은 개인의 행위가 신이나 역사에 의해 심판 될 것이라는 숭고한 종교적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의 가치 판단이 결국 ‘자기만족’에 달렸음을 넌지시 내비치기도 했다.

묻건대, 사회의 부조리를 외치는 사람들은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것은 하나의 신념이다. 현실 사회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모범적인 삶의 방식, 인생의 목적 같은 것을 제시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도덕책을 통해 습득하게 된 ‘상식’이 현실 사회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회가 ‘부조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가 도덕책이 그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부정의’하기 때문일 뿐이다.

‘부조리’란 본래 배리(背理)의 동의어로, 논리적으로 이치(理致)에 맞지 않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사실 부조리란 단어는 우리의 신념에 비추어 어그러진 사회의 모습에 던지는 푸념의 용어로 사용될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물음, 즉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단어인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카뮈, 새뮤얼 베켓은 부조리 문학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삶의 부조리한 속성은 보통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이나 무력함,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불가능성 등으로 이해된다. 소설 속의 상황들은 근본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난제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질문은 어떤 논리적인 해법을 완벽하게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카프카의 ‘변신’ 속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레고르가 ‘벌레’에서 다시 ‘사람’으로 변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혹은 측량사 자격으로 마을을 찾아온 K가 성에 들어가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살인죄를 저지르고 법정에 선 뫼르소에게는 대체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법인 것일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고도’는 ‘해답’인가?

얼마 전 우연히 ‘세비지스 The Savages’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 주인공 웬디는 39살 극작가다. 남편은 없고, 애인은 늙은 유부남. 변변한 성공작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어느 날 갑자기 20년 전 사랑하는 여자를 좇아 자식들과 인연을 끊고 사라졌던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입원중이라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 병간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힘겨운 상황 속에서, 8번째 응모한 구겐하임 장학 재단으로부터는 또다시 탈락 소식이 날아든다.

보통 헐리우드 영화에는 명확한 문제제기와 그에 따른 해법이 존재한다.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도망치는 처지라면 그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해법이다. 세상이 위기에 빠졌다면 그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하면 되고, 짝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한다면 사랑을 이루는 것이 분명한 문제의 해법이다.

영화 ‘세비지스’에는 누구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그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사랑을 좇아 자식들까지 내버리고 떠나간 아버지이건만, 결국 치매 노인이 되어 자신이 버린 자식들의 간병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웬디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대체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버지의 회복 혹은 임종, 불륜 관계의 청산, 극작가로서의 출세, 안정적 가정의 구축 같은 것들이 ‘인생’의 해법들일까?

문제의 핵심은 ‘life goes on’, 즉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동화 속 주인공의 삶은 왕자와의 행복한 결혼식 장면에서 끝나지만, 인간의 인생은 책이 덮인 다음에도 이어진다. 인간은 ‘실존’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시시포스는 영원토록 비탈길에서 바위를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가 굴리는 바위는 영원히 정상에 안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는 행위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가? 그것은 바위를 비탈의 정상에 올려놓는 불가능한 임무의 완수인가? 혹은 바위를 굴리는 그 자체인가?

새뮤얼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마치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는 것처럼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무대는 장소를 특정할 수 없는 어느 시골길을 배경으로 한다. 이 두 부랑자는 ‘고도’를 기다리며 부질없는 대화를 나누고,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한다. ‘고도’는 이 둘에게 어쩌면 절대적 구원이요,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정작 두 사람은 고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그를 만나면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 한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도’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이 의미 없어 보이는 삶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도는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나무를 보며 목을 메달 생각을 한다. 만일 이들이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극한의 좌절 혹은 분노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수긍이며, ‘바위를 미는 행위의 중지’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감정이 부추긴 죽음’이 아니라, ‘정신이 선택한 죽음’인 것이다.

부조리 문학은 확실히 읽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며, 우리의 실존의 근거를 뒤흔듦으로 하여 존재의 불안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부조리 문학의 배경에도 ‘논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부조리 문학의 토대는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 혹은 ‘실존이 곧 본질이다.’를 뒤집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주장, 그 뿐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란 주장은, 인간의 존재가 엄연한 사실인데 비하여 그 존재의 목적은 특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우린 이 세상에 목적 없이 태어났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주장은 전혀 우리들, 그러니까 동양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서양인들에게는 커다란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것이 서구인들이 목적론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서양 철학자들이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인과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론적인 것이다. 인과론적인 견해는 오늘날 자연과학자들의 견해와 비슷하다. 즉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인과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의 보편화로,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반면 목적론적인 견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이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현상의 ‘목적’이 바로 실존과 본질 중 ‘본질’에 해당한다. 눈(目)의 본질은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은 ‘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날개의 본질은 비행(飛行)이다. 그러므로 날개는 ‘날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고 어쩌면 매우 비과학적인 얘기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 최고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목적론적인 사고가 서구 문명을 지배했다. 중세 1천 년간, 유럽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삶의 본질은 전능한 신에 의해서 디자인 되어, 그 완벽한 계획 위에 인간의 실존이 주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근대 유럽인들이 느낀 존재의 불안은, 중세 1천 년간 이어졌던 강한 종교적 확신의 증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의 문제 제기는, ‘실존’과 ‘본질’ 혹은 ‘존재’와 ‘목적’이 엄연히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동양의 고전 철학에서는 애당초 ‘목적인’이 되는 초월자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았다. 목적이 존재를 유발한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실존’과 ‘본질’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일도 없다. 어쩌면 부조리 문학이 많은 아시아권 독자들에게 ‘갑갑한 현실’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못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2009/09/11 05:39 2009/09/11 0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