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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집 앞에서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면, 예술의 전당 주차장까지 딱 30분 걸린다. 30분은, 음악회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음미하며 운전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성남 아트센터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예술의 전당이 생활권 내에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공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이른 저녁을 들고 여유롭게 출발했다. 주말에도 막히는 일이 없는 171번 국도를 타고 양재로 빠져나오니, 예술의 전당이 금방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덕분인가, 주차 공간도 여유로웠다. 공연 시작까지 시간이 꽤 남아서, 선선한 바람을 쐬며 걷기도 하고, 흘러나오는 음악을 감상하며 분수도 구경하다가, 로비에 들어가서는 3,000원을 주고 산 프로그램북을 꼼꼼히 읽어보기도 했다. 프로그램북을 살펴보니, 일전에 내가 구한 프로그램 목록과는 꽤 차이가 있었다. 오늘 공연만 하더라도 서곡이 로시니의 곡에서 이인식 작곡가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문경새재’라는 알 수 없는 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로비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교향악 축제인 만큼 여느 때보다 가족 단위의 관객들이 많은 듯했다. 악기를 짊어지고 있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도 자주 보였다. 카페에서 커피나 한 잔 마실까 했지만, 이미 앉을 자리도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어서 포기했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문경새재

대학교 4학년 때, 교양 강좌인 ‘음악 감상’ 강의를 들었다. 그때 강의 과제로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보고 감상문을 제출해야했는데, 내가 택한 공연은 힐러리 한과 함께 내한한 밴쿠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였다. 그날 연주회에서는 현대 작곡가의 곡이 서곡으로 연주되었는데, 제목은 ‘The Linearity of Light’였다. 후에 과제로 제출한 감상문에서 나는 이 곡의 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곡은 ‘빛’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이다. 따라서 감상의 포인트는 역시 빛이 전달하는 감각을 얼마나 청각 신호로 잘 치환시켰느냐가 될 터였다. 높고 낮은 음정, 빠르게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음렬, 분산 화음 등이 우리의 감각 체계에 전달하는 자극은 분명 빛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만큼 이 곡은 색채감이 풍부하고 빛의 느낌으로 가득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곡이 그러하듯, 한 번 들어서는 곡의 의미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현대 작곡가들의 가장 큰 비극이라면, 자신의 곡이 같은 청중과 두 번 이상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당시 ‘음악 감상’ 강의를 진행하던 교수는 작곡가였다. 나중에 돌려받은 감상문에는 “자신의 곡이 같은 청중과 두 번 이상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부분에 ‘agree’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청중에게 두 번 이상 들려줄 기회를 거의 갖지 못 하는 것. 그것이 많은 현대 작곡가들이 놓인 처지이다. 음악 감상 교수는, 이런 곡들도 언젠가는 클래식이 될 수 있을 거라며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과연 그럴까? 나는 가끔 의문이 든다. 오늘날 우리 세대가 한 세기 후의 사람들에게 문화적으로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지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문화적 공백기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과거를 치르기 위해 험준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향하는 옛날 선비들의 꿈과 희망을 재조명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순이 낮은 음으로 집요하게 반복하는 리듬만이 잠시 뇌리에 머물었을 뿐, 이내 이 곡은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난생 처음 듣는 곡에서 감동을 받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어떤 곡이든 한 번 듣고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곡에 서린 한국적 정서와 작가의 의도를 읽어 낼 새도 없이 곡은 끝나버렸고, 그것을 다시 시도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막스 브루흐. 어쩌면 그는 불행한 작곡가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불행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는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처럼 젊어서 요절하지도 않았고, 슈만처럼 정신병을 앓거나 차이코프스키처럼 남모를 비극을 떠안고 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들보다 훨씬 덜 중요한 작곡가로 여겨진다. 브루흐는 살아서 자신의 한계를 느껴야 했고, 죽어서도 그 입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세상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겼다는 것이, 브루흐라는 작곡가에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다. 브루흐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력을 얻었지만,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 한 곡에 얽매여 있다.

브루흐는 183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죽었다. 무려 90세 가까운 장수를 누린 것이다. 브루흐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완성했다. 사실상 이 곡이, 그의 작곡가로서의 정점이었다. 그는 이후로도 교향곡, 현악 사중주, 오페라, 오라토리오 등 많은 장르의 곡들을 썼지만 당대의 청중들에게도, 후대의 청중들에게도 외면을 받았다. 브루흐는 심지어 바이올린 협주곡도 두 곡이나 더 썼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곡들의 존재마저 잊어버린 듯, 그의 1번 협주곡을 바이올린 협주곡을 단 한 곡만 쓰고 죽은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처럼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부른다.

클라라 주미 강

힘이 대단했다. 소리는 더 다듬어질 여지가 있어 보인다. 저돌성은 좋으나, 테크닉적으로는 좀 더 세련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뽐내는 그 존재감을 보니, 스타가 될 충분한 자질이 있다. 플랫 슈즈를 신고서도 큰 키를 자랑하며 무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남자 이상의 박력으로 바이올린을 때린다. 그 액션 덕분에 솔리스트의 음향이 한층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봐서 볼륨이 만족스럽지는 않다. 이건 협주곡의 어쩔 수 없는 성향인가.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앙코르 곡을 연주했다. 귀에 익은 곡인데,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반주의 바이올린 곡이라면 거의 들어보지 않은 곡이 없을 텐데. 집에 들아와서도 한참 동안 그 멜로디가 머릿속을 떠나가지 않았다. 그 규칙적이면서 긴박한 리듬. 음산함을 느끼게 하는 동기……. 무반주 바이올린 곡들을 죄다 재생시켜봤지만 찾을 수 없었는데, 며칠이 지나서야 불현듯 곡목이 생각이 났다. 슈베르트의 ‘마왕.’ 분명 마왕의 멜로디였다. 가곡은 통 듣지를 않으니 잘 기억이 안 날 수밖에.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편곡 버전이 존재한 것도 몰랐다.

강남 심포니 오케스트라, 쇼스타코비치 5번

TV를 통해서는 자주 접했지만, 직접 연주를 들은 것은 아마 처음일 거다. 국내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이 총 출동하여 거의 매일 공연을 하는 만큼, 서로 비교 당하기에도 딱 좋은 자리인지라, 오케스트라가 긴장을 하고 연주를 하는 것이 느껴졌다. 진지한 자세로 연주에 임하는 만큼, 나도 진지한 자세로 감상을 했다.

사실 나는 이 날의 연주회에서 온통 협주곡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회 당일 저녁까지 메인 곡이 무슨 곡이었는지도 몰랐다.

쇼스타코비치. 생존 당시 대표적인 사회주의 작곡가로 여겨지며, 한국에서는 그의 곡을 연주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었다. 그의 사후, 친구가 출판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이라는 책을 통해 실은 쇼스타코비치가 자유사상과 예술을 억압하는 사회주의 정부에 반감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새로운 주장이 재기됨에 따라, 그는 일약 자유주의 진영의 스타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그의 사상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냉전 시절 대립하던 양 진영이 엇갈린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그의 교향곡 5번은 그런 논쟁을 비웃기라도 하듯 호탕함을 뽐낼 뿐이다.

쇼스타코비치 5번은 7번과 더불어 자주 듣는 곡이지만, 라이브로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3악장 라르고를 이렇게 주의 깊게 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금관이 배제된 채, 현과 목관에 의해서만 연주되는 선율들은, 마치 폭발을 예비하는 억눌린 내면의 감정을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악장 말미에, 곧 숨이 끊어질 듯 겨우 이어지는 현의 소리는 악장을 차분히 정리하고 종결짓기보다는 오히려 긴장감을 최대로 고조시킨다. 이윽고 그 긴장은 4악장의 힘찬 팡파르와 함께 해결된다.

앙코르

문경새재로 막을 올린 연주회는 아리랑으로 끝을 맺었다. 진정한 아리랑은, 70대 할머니가 탁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부르는 아리랑이다. 그 정서는 결코 수학적으로 계산된 음계와 리듬으로 연주되는 아리랑 속에 담길 수 없다.

2011/04/11 23:48 2011/04/11 2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