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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서재/편지

우리는 마약 중독자들이 마약으로 인하여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지만, 역설적이게도 약쟁이에게는 약에 취해있는 동안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허물어져버린 세계에서,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쾌락을 맛보고, 모든 감각을 뒤덮어버리는 지극한 환희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궁극적인 ‘생(生)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누군지는 잊었지만, 어떤 유명인 혹은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섹스를 해.”라고.

그러나 포식자가 되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뱃속에 집어넣는 것이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해 주는 충족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한 마리 양이 되어,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에 살점이 뜯겨나가고 뼈가 으스러질 때에,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비로소 살아있다는 것이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살아있다! 대체 생의 증거를 찾아 헤매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침마다 피로와 싸워 눈을 뜨고, 두 다리로 온몸의 무게를 느끼면서 터벅터벅 걸으며, 힘겹게 숨을 쉬는 그 자체보다 더 신물 나고 지긋지긋한 삶의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지겨운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는 게 재미가 없다. 현재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나는 앞으로 60년 정도를 더 살아야 하고, 의학 기술이 지금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면 어쩌면 100년 정도를 더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가야 할 그 긴 시간을 생각하면, 때로는 절망감마저 느낄 지경이다.

내겐 음악이 때로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음악을 들을 때면, 작곡가들이 현실에 대해 품었던 강한 불만족 같은 것을 느낀다. 그들은 단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자연이 허락한 이상의 것을 꿈꿨던 것이다. 실체가 없는 음악 안에서는 여전히 하늘로 닿으려는 탑을 쌓고 있다. 그 환상을 보며, 나는 잠시 살아있음을 잊는다.

사무실의 일에는 아무런 흥미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지금과 비슷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뒤죽박죽 뒤엉킨 거미줄 같은 것이고, 우리들은 그 위에 곤충의 시체처럼 내걸려 있다. 포식자의 뒷다리가 움찔거릴 때마다 우리의 삶은 요동친다. 잔바람에도 전 존재가 휩쓸려가 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을 느끼며, 그러나 이 고착된 삶의 형태로부터 벗어나기는커녕, 도태되는 것조차 그리 쉽게 되지는 않는 일임을 서글퍼한다. 우리는 그렇게 사회라고 하는 것에 거추장스럽게 들러붙어 있다.

연주회장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나는 내가 잊어버리고 싶었던 그 지긋지긋한 현실에 똑같이 구속받는 사람들을 본다. 내가 시시한 문서 작성을 위해 타이핑하듯 무표정하게 음표 하나하나를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의 모습을 볼 때면, 매춘은 아마도 이런 기분일 것이라고 깨닫는다. 혼자 열정을 불사르고 땀범벅이 되어 숨을 헐떡이지만 끝내 매춘부의 차가운 시선, 그 직업적인 딱딱한 태도와 마주하게 되고, 그 순간 덧없는 환상은 깨어지며 너무나도 재빠르게 비루한 현실 속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그저 인내할 뿐인 삶에 대한 씁쓸한 환기. 너도 나도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는 그저 역겨움을 참으며, 인생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2010/09/19 17:31 2010/09/19 17:31